세계에 부는 한국어 열풍 ‘한글 세계화’ 앞당길까
  • 이석 (ls@sisapress.com)
  • 승인 2009.09.29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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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한국어능력시험 응시자, 전세계 19만명에 달해 문화부, 한글 세계화 프로젝트 ‘세종학당’ 본격 가동

“한글은 21세기를 겨냥해 세종대왕이 후손들에게 안겨준 축복이다.”(정원수 충남대 교수)

“우리의 강점인 IT를 활용할 경우 반도체나 조선업을 능가하는 효자 상품이 될 수도 있다.”(리의재 한글세계화연구소 대표)

ⓒ시사저널 임영무


10월9일 5백63돌을 맞는 한글날을 앞두고 한글이 재조명되고 있다. 동북아는 물론이고 전세계 경제권을 움켜쥘 ‘핵’으로 한글이 거론되고 있다. 인도네시아 소수 민족인 찌아찌아족이 한글을 공식 문자로 채택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학계를 중심으로 한글 세계화 방안이 심도 있게 거론되고 있다. 일부는 ‘5백만명 인재 양병설’까지 주장할 정도이다. 과연 한글의 세계화는 가능한 것일까.

한글의 우수성에 대해서는 학계에 이견이 없다. 유엔 발표에 따르면 한글 사용 인구는 지난 2005년 기준으로 7천7백39만여 명에 이르고 있다. 전세계에서 13번째로 많은 규모이다. 실제 언어 영향력은 그 이상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규 전 국립국어원장(경북대 교수)은 “힌두어·벵골어·우르드어 등은 현재 제3국의 외국인이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한국어가 국제적 소통 언어라는 점에서 영향력은 9위 정도에 속할 것으로 예상된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세계지식재산권기구(WIPO)는 지난 2007년 한국어를 아홉 번째 국제 공개어로 채택했다. 전세계적으로 한국어 강좌를 개설한 대학은 62개국, 7백50곳에 이르고 있다. 최근 국내 기업의 해외 진출이 잇따르면서 외국인의 한국어 학습 수요도 크게 늘어나는 추세이다. 교육과학기술부(이하 교과부) 발표에 따르면 올해 한국어능력시험(TOPIK) 응시자는 19만명에 달한다. 지난해에 비해 30% 증가한 수치이다. TOPIK을 처음 도입한 지난 1997년 지원자가 4개 국가 2천6백92명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비약적인 증가세이다.

이은우 교육과학기술부 국제협력국장은 “한국어능력시험 응시자가 늘어나는 것은 여러 가지 긍정적인 효과를 나타낸다. 국내 기업의 해외 진출을 확대하고 한국의 위상을 높이는 것은 물론이고 외국인 유학생까지 유치할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한나라당 김재경 의원은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발음을 표기할 수 있는 글자이다. 국가별 언어로 소리의 표현을 보면 한글은 1만1천여 개, 일본은 3백여 개, 중국은 4백여 개이다. 찌아찌아족과 마찬가지로 문자가 없는 소수 민족에게 한글을 수출한다면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글 세계화를 위해서는 문자가 없는 소수 민족의 언어에 맞게 한글을 재구성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이다. 이번에 찌아찌아 교과서를 편찬한 이호영 서울대 교수 역시 현지 언어를 연구하는 데 3년여가 걸렸다. 한글이 표현 능력은 우수하지만 남의 언어를 한글화시키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때문에 학계 일각에서는 현행 한글 기본법의 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신부용 카이스트 초빙교수는 “일제 강점기 당시 주시경 선생이 훈민정음을 쓰기 쉽도록 간략하게 한 것이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이다. 그러다 보니 일부 외국어 표현에 한계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원래 훈민정음에는 자음이나 모음이 더 있었다. 심지어 자음이나 모음끼리도 섞어서 사용하는 일이 가능했다. 훈민정음 정신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사라진 자음이나 모음을 부활시킬 필요가 있다”라고 주장했다.

리의재 한글세계화연구회 대표도 현재 개별적으로 개발 중인 맞춤법을 통일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그는 “한글을 세계화하기 위해서는 한글의 업그레이드가 필수이다. 하지만 관련 작업이 대부분 개별적으로 진행되다 보니 시너지 효과가 없다. 외국에 나가기에 앞서 국내 문제부터 해결할 필요가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우리가 강점을 가지고 있는 IT(정보기술)를 활용할 경우 한글 세계화를 훨씬 앞당길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현재 사용되는 컴퓨터는 영어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어느 나라든 영어 문자판을 통해 자국 언어를 입력해야 한다. 하지만 컴퓨터 기술이 꾸준히 발전하면서 IT 기기 또한 점차 소형화되는 추세이다. 가까운 미래에는 휴대전화 모양의 컴퓨터가 등장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같은 추세에 맞춰 컴퓨터 자판 또한 작아지고 있다. 하지만 나열식 언어인 영어로는 한계가 있다. 한글의 경우 천지인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소형화되어도 얼마든지 활용이 가능하다. 이를 상품화해 시장을 선점할 경우 부가가치를 크게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기능·실용적인 관점만으로 세계화 추진해서는 곤란

중국이나 일본 등 강대국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망하고 한족들이 이끄는 중화민국이 탄생했다. 당시 류신 같은 선각자는 “한자가 멸하지 많으면 중국은 반드시 망한다”라고 외치면서 한자 대신 로마자를 쓰자고 주장했다. 이때만 해도 중국 사람들의 90%가 한자를 몰라서 어문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1949년 마오쩌둥 정권이 들어서면서 기존 한자를 간소화시키는 간체자가 만들어졌다. 알파벳을 발음 기호로 활용한 한어 병음 자모를 만들어 국어 교육을 크게 장려했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중국 국민은 상당수가 문맹자이다. 한자가 그만큼 배우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한글을 병음자로 사용한다면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정원수 충남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 휴대전화로 문자메시지를 보낼 때 발음이 나는 대로 영어를 입력한 뒤 해당 단어를 다시 찾아야 한다. 한글은 글자를 변환할 필요가 없어 시간과 노력이 적게 드는 장점이 있다. 휴대전화뿐 아니라 한글 표기법을 활용한 프로그램을 제작할 경우 얼마든지 가능성이 있다”라고 말했다. 

▲ 한글 교과서를 이용한 짜아찌아어 수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인도네시아 부톤섬 까르야바루 초등학교에서 한 학생이 수업에 열중하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학계의 주류는 이같은 주장을 외면하고 있다. 한 학계 관계자는 중국을 예로 든다. 그는 “현재 중국과 소수 민족을 연결하는 유일한 끈이 한자이다. 중국이 이같은 기득권을 포기하고 한글을 채택할지 미지수이다”라고 지적했다. 심지어 정부에서조차 이같은 제안은 현실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보는 분위기이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우리 정부가 중국의 소수 민족에게 한글을 심으려 한다면 (중국 정부가) 즉각 반발할 것이다. 이번에 한글을 공식문자로 채택한 찌아찌아족도 일부 소수 민족의 판단일 뿐이다. 인도네시아 정부의 시선은 곱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귀띔했다. 과거 일제가 조선어 말살 정책을 폈던 것에서 보듯 ‘글’은 단순히 ‘문자’가 아니라 민족의 혼이 담겨 있는 것이기 때문에 글의 전파는 문화의 핵심을 파고드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단순히 기능·실용적인 관점에서만 ‘한글 세계화’ 문제에 접근할 수 없는 이유이다.

‘한글 세계화’와 관련해서는 기업들도 부담스럽다. 삼성, LG 등 국내 휴대전화 단말기 제조사의 매출은 매년 급증하고 있다. 동남아시아 등 개발도상국은 물론이고, 유럽, 미국 등 선진국에서도 국내 휴대전화가 인기를 얻고 있다. 하지만 한글 키패드를 장착한 제품을 판매하기 위해서는 우선 한글의 보급이 전제되어야 한다.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는 판매를 해도 외면받기 십상이라는 반응이다.

이렇듯 한글 세계화를 두고 정부는 물론이고 학계나 재계에서조차 ‘동상이몽’을 꿈꾸고 있다. 한글 세계화 정책은 발표되었지만 여전히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는 한 한글 세계화는 요원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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