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합중국, 대통령이 고민된다
  • 조홍래 | 편집위원 ()
  • 승인 2009.10.13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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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의 리스본 조약 비준으로 선출 길 열려…실질 권력 행사에 장애 많아 국제적 영향력은 미지수

▲ 아일랜드의 딕 로체 EU 장관(왼쪽)이 국민투표로 리스본 조약 비준안이 통과되자 기뻐하고 있다. ⓒ연합뉴스


아일랜드가 유럽연합(EU)의 리스본 조약을 비준함으로써 이른바 ‘유럽합중국’ 대통령을 선출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27개국 EU는 단일 대통령과 외무장관을 갖는 국가 집합체로서 국제 무대에 등장한다. 그러나 당장 의문이 따른다. 모든 EU 회원국들이 새로운 국가 블록을 원하느냐는 것이다.

우선 EU 대통령이 얼마나 많은 권한과 영향력을 행사하느냐를 놓고 많은 논란이 예상된다. 또한, 새 EU 대통령이 국제 무대에서 진정으로 유럽을 대표하는 막강한 정치 스타로 군림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자칫하면 회원국들의 간섭에 휘말려 주도적 역할도 못하는 반신불수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크다. 회원국 지도자들은 10월 말에 이 문제를 결정한다. 이 결정에 따라 EU가 미국, 중국, 러시아 같은 강대국들과 맞설 수 있는 강력한 동맹체로 거듭날 수 있느냐의 여부도 판가름난다. 

리스본 조약은 만장일치제로 되어 있는 EU의 의사결정 과정을 과반수 찬성제로 바꾸는 한편, 각국마다 다른 정부 구조를 개혁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이 조약은 앞으로 탄생할 EU 대통령의 임기를 2년 반으로 규정했다. 조약은 폴란드와 체코만 서명하면 5년 후 정식으로 발효된다. 조약이 발효되면 EU 대통령 외에 외무장관도 임명된다. EU 외무장관은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외교 문제 전반에서 EU를 대표한다. 27개국을 대표하는 대통령과 외무장관이 나오면 유엔을 비롯한 국제 무대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EU의 대통령과 외무장관은 회원국 지도자들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 이들이 등장하더라도 유럽집행위원회의 포르투갈 출신 의장인 마누엘 바로수의 임기는 그대로 계속된다. 바로 여기에서 갈등이 예상된다. 신임 EU 대통령과 외무장관은 독자적 권한을 행사하려고 할 것이고, 그러다 보면 집행위 의장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그 밖에도 또 다른 권력 기관인 유럽의회가 있다. 선거를 통해 구성되는 유럽의회는 EU 공통 사안에 대한 각 회원국들의 책임 소재를 규명하는 임무를 갖고 있다. EU 대통령과 유럽의회 간 권력 배분 역시 숙제로 남아 있다.  

미국 브루킹스연구소의 프랑스 학자 쥐스텡 바이사는 리스본 조약의 탄생을 ‘장엄한 성공’이라고 극찬했다. 그는 조약의 성공 여부는 향후 임명될 인사들의 면면과 국가별 기능의 통합에 좌우될 것이나 EU의 빅 3로 불리는 프랑스·영국·독일 3국의 이견 조정이 용이해진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라고 평가했다. 그동안 EU 문제는 이들 3국의 패권 경쟁으로 난관을 겪었다. EU는 10월 말 정상회담에서 어떤 유형의 대통령을 선출할지를 결정한다. 카리스마 넘치는 대통령과 비교적 회원국들에 순종하는 대통령 중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가 관건이다. 새 대통령의 성격에 따라 EU 대통령의 이미지와 권한도 달라진다. 런던에 본부를 둔 유럽개혁센터의 부소장 카틴카 바리쉬의 분석이 흥미롭다.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 같은 인물이 선택되면 유럽 시장 개방 같은 실무 차원의 문제보다 이란 핵 개발 같은 국제 이슈를 놓고 오바마와 담판을 벌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가장 유력한 후보는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

▲ 아일랜드의 유권자들이 EU에 대한 기대에 들떠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

EU는 국제적으로 좀 더 큰 역할을 하기를 바라는 입장이기는 하나 각국 지도자들은 너무 통이 큰 대통령이 나오면 회원국들의 소리를 무시하고 독단으로 흐를까 우려한다. 그렇게 되면 EU 합중국의 무게 중심이 특정국의 입맛에 맞게 이동할 수 있다. 

아직 EU 대통령에 출마하겠다고 의사를 표명한 인물은 없다. 현재 물밑에서는 블레어가 가장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그는 그러나 지지와 반대가 엇갈리는 가운데 말썽의 소지를 가장 많이 안고 있다는 점에서 부담을 준다. 블레어는 영국 노동당 정부를 이끌면서 세 번의 선거에서 승리한 리더십의 소유자이지만 유럽 중도좌파 정당들로부터 지지를 받지는 못하고 있다. 좌파 정당들은 이라크 전쟁에 적극 동참한 블레어에게 유감이 많다. 또한, 영국이 유럽 단일 통화인 유로가 탄생하는 과정에서 국외자로 일관한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블레어의 후임인 고든 브라운 총리도 후보군에 들어 있다. 하지만 그는 다음 선거에서 보수당의 데이비드 카메론에게 패배할 가능성이 커 입지가 약하다.

어쨌든 네덜란드의 프랑수아 필롱 총리를 제외하면 비공식 여론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은 블레어뿐이다. 블레어는 무엇보다 바로수 의장 및 몇몇 EU 지도자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점에서 점수를 얻고 있다. 다만, 약소국들을 희생시켜 강대국들의 이익을 우선할 가능성이 결함으로 지적된다. 필롱 총리는 프랑스의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 같은 까다로운 정치인과도 잘 어울린다고 평가되고 있다.

EU의 대통령 선택에서 결정적 역할을 할 인물은 사르코지와 최근 재집권에 성공한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 두 사람이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변수가 많다. 사르코지는 과거 블레어에 대해 호의적이었으나 지금 생각이 어떤지는 알 수 없다. 또한, 메르켈은 블레어에 대해 결코 호감을 보이지 않았으나 최근 사르코지와의 회담에서는 상당히 개방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블레어를 지지할 여지를 보였다. 일부 외교관들은 사르코지의 경우 블레어가 프랑스 같은 강대국의 이익을 대변할 적임자로 보고 있기 때문에 블레어를 지지하는 것으로 돌아설 수 있다고 말했다.

그 밖에도 문제는 많다. 좌우 정치인들의 의견을 통합하고 대국과 소국의 이해를 적절히 조절하는 적임자를 찾는 일이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중도우파가 대통령이 되면 외무장관은 중도좌파에서 나올 것이 거의 확실하다. 메르켈 총리는 대통령과 외무장관 중 한 명은 여성이 맡았으면 하는 눈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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