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잠 깨운 ‘룰라 전성시대’ 남은 목표는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 조홍래 | 편집위원 ()
  • 승인 2009.10.20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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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올림픽 유치하자 온 나라가 ‘들썩’…라틴 아메리카 전역에서도 일제히 반겨

▲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오른쪽)이 2016년 하계올림픽 유치에 성공하자 기뻐하고 있다. ⓒ연합뉴스

올해 브라질의 카니발은 4개월 일찍 시작되었다. 2016년 하계 올림픽 유치에 성공한 브라질 시민들은 코파카바나 해변으로 몰려나왔다. 형형색색의 비키니를 입은 남녀들은 밤이 새도록 춤추었다. 뭔가 강력한 힘이 나라를 꿈틀거리게 했다는 자부심과 환희가 전국을 뒤덮었다.

 남미 최초의 올림픽 개최국이 되었다는 사실도 가슴 벅찬 일이지만, 이런 식으로 10년만 더 가면 정말 위대한 국가가 된다는 기대로 모두가 들떴다. 아내와 함께 뜨거운 태양을 무릅쓰고 춤추던 한 전기공은 “브라질은 강하다”라고 외쳤다. 시카고를 물리치고 올림픽을 거머쥔 쾌거에 신바람이 난 젊은 부부는 “미국도 하지 못한 일을 했다”라고 흥분했다.

 브라질에 영광을 안긴 주역은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 대통령이다. 초등학교 4년 학력이 전부인 그의 삶은 온통 인고와 반전과 시련으로 가득하다. 두 아내를 둔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으로 일찍 죽었다. 열 살이 될 때까지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다. 겨우 들어간 학교도 4학년에서 중퇴했다. 어려운 가계를 돕기 위한 그의 노동자 인생은 열두 살 때 시작되었다. 구두닦이도 하고 거리에서 물건도 팔았다. 열네 살이 되어서야 겨우 철강 회사 정규 사원이 되었다.

 자동차 부품 회사에서 제법 인정을 받는 숙련공이 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열아홉 살이었다. 이때 작업 중 사고로 왼쪽 새끼손가락을 잃었다.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여러 병원을 전전했다. 이 사건이 그에게는 인생의 분수령이 되었다. 가난한 사람을 대변한다는 노동당 노조에 가입했다. 당시의 군사 정권은 노조를 몹시 탄압했다. 20년 가까운 군부 통치 기간 룰라는 파업으로 맞섰다. 덕분에 그에 대한 대중적 인기는 치솟았다. 좌경 이념으로 변한 것도 이 즈음이었다. 24세에 결혼했으나 5년 만에 사별하고 미망인이었던 지금의 부인과 재혼했다.

 이런 삶은 가난에 찌든 브라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생이다. 그러나 그는 가혹한 시련에 굴복하지 않았다. 조국의 가난을 극복하려는 야망을 품었다. 노동당 당수와 의원을 거쳐 1989년 대통령에 출마했다. 세 번이나 낙선했다. 빈약한 학력이 발목을 잡았다. 드디어 2002년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2006년에는 재선에 성공했다. 대통령에 선출된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사망한 어머니를 그리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 이처럼 그는 감성적인 인물이다. 2011년에 끝나는 임기를 앞두고 지지자들이 3선 개헌을 건의했으나 단호히 거부했다.

  2등 국가 신세를 면치 못하던 브라질을 남미에서는 최대의 정치·경제 리더로, 세계 랭킹에서는 9위의 경제 대국으로 끌어 올린 그의 리더십은 기구한 삶을 통해 만들어졌다. 평소부터 큰일을 낼 사람으로 그를 바라보던 국민들은 올림픽 유치 소식에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브라질은 가난의 굴레를 벗고 1등 국가로 올라섰다. 오늘 우리는 당연히 받을 만한 존경을 세계로부터 받고 있다.” 코펜하겐에서 올림픽위원회의 투표 결과를 듣고 그가 내뱉은 일성이다. 손수건을 꺼내 눈물 젖은 뺨을 닦으면서 그는 말을 계속했다. “지금 죽어도 여한은 없다. 이것만으로도 그만한 가치가 있다.”

2014년에는 월드컵 경기도 열려 겹경사

▲ 올림픽 유치가 확정되자 코파카바나 해변에 몰린 브라질 국민들이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

올림픽위원회도 브라질의 순항에 휩쓸린 듯하다. 지난 5년간 브라질에서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소비는 늘어나고 물건은 없어 못 팔았다. 인플레는 진정되고 소득 차이는 줄었다. 국제통화기금(IMF) 차입금은 만기보다 3년 빨리 상환했다. 인근 심해에서는 거대한 유전도 발견했다. 2014년에는 마라카나 스타디움에서 월드컵 경기도 열린다.  

 룰라가 처음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세계는 기겁을 했다. 특히 부시 행정부가 놀랐다. 노조 지도자 출신 경력과 좌파 노선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념을 버리고 실용 노선으로 급선회했다. 외국 투자자들을 안심시키고 경제를 안정시켰다. 국내외에서 그의 카리스마와 대중적 인기는 치솟았다. 남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인으로 자부하던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는 룰라의 그늘에 묻혔다.

 차베스가 미국의 냉대를 받는 동안 룰라는 오바마와 우의를 다지고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과는 군사조약을 체결했다. 기후 변화를 토의하는 세계적 회의에서도 한몫을 했다. 얼마 전에는 미국 의원들과 엑손의 CEO가 참석한 연회에 초대되기도 했다.

 올림픽 유치는 세계사의 당당한 일원이 되기 위해 룰라와 브라질이 기울인 노력에 대한 객관적 인증이다. 올림픽은 룰라에게 늘 ‘강박감’을 안겨준 요인이었다. 비천한 유년 시절을 보낸 그에게 올림픽 유치는 넘기 어려운 장벽이었다. 그러나 그가 살아온 힘든 세월이 길러준 도전 정신은 그를 그냥 두지 않았다. 룰라는 유치 경쟁의 뜨거운 무대로 자신의 몸을 던졌다.

 런던과 베이징을 방문해 올림픽 시설을 둘러보고 올림픽 관계자들을 수없이 만나 리우데자네이루가 올림픽을 개최할 수 있는 재정적 준비를 갖추었다고 역설했다. 그는 2003년 이후 올림픽 예산을  2억9백만 달러에서 7억7천3백만 달러로 증액했다.

유치가 결정된 10월2일 덴마크에서 한 그의 연설은 국내외에서 감동을 자아냈다. 고국에서 연설을 경청한 한 변호사는 “과연 유치를 할 수 있을까 조마조마했지만 룰라의 연설을 듣고는 안심했다”라고 말했다.
 룰라의 도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임기가 끝나기 전 브라질을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진출시키는 것이 그의 최종 목표이다. 남미의 위상과 저력을 합하면 가능하다는 것이 룰라의 신념이다. 남미와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는 올림픽 유치를 일제히 반기고 있다. 남미 지도자들은 “우리 모두의 승리이다”라고 입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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