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 만의 만남, ‘미얀마의 봄’ 부를까
  • 조홍래 | 편집위원 ()
  • 승인 2009.11.17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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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캠벨 차관보, 미얀마 군부와 회동…아웅산 수치 여사 석방과 정치 활동 문제 논의

▲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미얀마 민주화 운동 지도자인 아웅산 수치 여사(오른쪽)가 11월4일 커트 캠벨 미국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왼쪽)와 면담을 마치고 인야 호수 호텔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미얀마는 옛 버마의 새 이름이다. 45년 전 군부가 집권하면서 잔혹한 독재와 가난에 시달리고 있는 이 나라에 민주화의 봄이 오리라고 기대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듯이 최근 들어 군부가 국제 사회의 압력에 굴복하는 조짐이 나타났다. 아직은 희미하고 애매한 단계이지만 희망의 빛은 매우 집요하고 복합적이다. 미얀마 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건국의 아버지 아웅산 장군의 딸이자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민주화 투사 아웅산  수치 여사(64)이다. 지난 20년 동안 14년을 가택연금 속에서 살고 있는 여사와 수많은 정치범이 내년 선거를 앞두고 석방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서서히 커지고 있다. 

미얀마의 해빙을 알리는 가장 강력한 신호는 커트 캠벨 미국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가 11월4일 군부 지도자들과 수치 여사를 만난 사실이다. 미국 고위 관리가 미얀마 인사들을 만난 것은 14년 만의 일이다. 이 만남은 그래서 파격적이고 전례가 없다. 캠벨은 수치 여사 및 그가 창당한 민주주의민족동맹(NLD) 지도자들과 2시간 동안 만난 자리에서 군부에 여사의 석방과 정치 활동 허용을 촉구했다고 밝혔다. 이 요구에 대한 군부의 공식적인 반응은 없으나 긍정적인 진전이 이루어지는 듯한 정황이 여러 곳에서 포착되었다. 

수치는 1990년 선거에서 압승해 집권 기회를 잡았으나 군부에 의해 묵살되었다. 수치는 그 후 줄곧 가택 연금 상태에 놓여 모든 외부 인사와의 접촉을 금지당했다. 그가 미국 고위 관리를 만난 것은 1995년 이후 이번이 처음이다. 캠벨은 미얀마 총리 테인 세인과도 회담했으나 군정 지도자 탄 슈웨는 만나지 못했다. 캠벨은 과학기술장관도 만나 핵 비확산을 규정한 유엔 결의를 준수할 것을 촉구했다. 미얀마의 핵 야망은 아직 초기 단계이나 북한과의 제휴설이 있어 미국으로서는 신경 쓰이는 일이다. 

캠벨의 방문은 오바마 행정부가 표방한 광범위한 대화 외교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미국은 오바마가 등장하기 전 미얀마에 대해 철저한 고립과 제재 정책을 고수했다. 캠벨은 수치를 만난 후에도 정치범 석방과 민주화 조치가 없는 한 제재는 풀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내친 김에 군부에 대한 압박 강도를 높이자는 의도이다. 제재 정책에 따라 미국 회사들에게는 미얀마와의 무역·투자·금융 거래가 금지되어 있다.

유럽연합(EU)도 다양한 압력을 넣고 있다. 미얀마에 대한 제재라는 측면에서 미국과 철저한 공조를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일본도 수치의 석방을 촉구하고 나섰고, 그동안 미얀마 사태에 침묵하던 아세안도 인권위원회를 발족시켜 우회적으로 군부를 압박했다. 

일방 독재의 한계에 직면한 군부, 수치 석방 가능성 비쳐

▲ 11월11일 군인들을 태운 미얀마 경찰 트럭이 아웅산 수치 여사를 지지하는 단체의 집회 장소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다. ⓒ연합뉴스

미얀마 압박 작전은 10월 초부터 시작되었다. 지난 10월9일 미국·호주·EU  외교관들은 수도 양곤에서 수치를 만났다. 이 회담에서는 서방의 경제 제재 문제가 주로 논의되었다. 이 회담은 특히 미얀마 정부가 황급히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이는 군부가 서방과의 긴장 완화 및 제재 해제를 절실히 바라고 있다는 반증이다.

20년째 계속되는 서방의 경제 제재는 미얀마에 매우 아프게 작용하고 있다. 이 조치에 따라 미얀마 관리들은 서방 은행과 금융 거래를 할 수 없고, 미국·EU 회원국 및 호주를 방문할 수 없다. 미국은 이에 추가해 제3국을 통해 이루어지던 미얀마 보석류의 수출도 규제한다. 이 일련의 조치들은 미얀마 경제에 막심한 피해를 주고 있다. 결국 군부가 온건 신호를 보낸 데는 경제 제재의 압력이 주효했고, 그 산물로 10월과 11월의 주요 회담이 성사된 것으로 분석된다. 

수치는 이 회담에 앞서 서방의 제재를 환영한다고 말해 군부의 분노를 샀으나 서방 대표들과의 회담에서는 자신의 입장을 바꿀 수 있다고 시사했다. 수치와 군부 사이에 모종의 교감이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EU를 대표해 10월 회담에 참여했던 앤드루 헤인 미얀마 주재 영국 대사는 아직 단정하기는 이르나 미얀마 군부가 “진지하다”라는 감을 잡았다고 말했다.

미얀마 군부는 내년 새 헌법과 총선을 준비하고 있다. 일정은 잡히지 않았으나 선거는 1990년 이후 처음이다. 수치는 14년의 가택 연금에 추가해 예고 없이 찾아온 미국인을 하룻밤 재워준 혐의로 18개월의 추가 가택 연금 선고를 받았다. 따라서 그가 선거에 출마할 가망은 없어 보인다. 다만, 새 헌법이 군부와 민간의 권력 분배를 규정하고 있어 변화의 계기가 생길 것은 확실하다. 이는 군부의 일방 독재가 한계에 직면했다는 증거로도 해석된다.

한편, 오바마 대통령은 11월15일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 경제포럼에 참가한다. 이 포럼의 막간을 이용해 미얀마 총리와 조우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미국 관리들은 오바마가 그를 비밀리에 만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대통령이 미얀마 지도자를 만난 것은 1966년 존슨이 네윈 총리를 만난 일이 마지막이었다.

오바마는 취임 10개월 만에 인기가 추락하고 있다. 혹시 미얀마에서 좋은 소식이 온다면 그의 화해 외교는 탄력을 받을 것이다. 미얀마 군부도 고립에서 탈피해 지지 기반을 확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굳이 이번 기회를 마다할 이유는 없는 상황이다. 한 가지 옥에 티가 있다면 미얀마의 인접국인 중국, 인도, 태국 등이 군사 정권과의 활발한 무역 거래를 통해 서방의 압력 효과를 반감시키고 있는 점이다. 하지만 이들의 경제 우선주의가 대세를 거스르지는 못할 것이라는 분석이 안도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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