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나라하게 드러난 우리 자신에게 열광하다
  • 하재근 | 문화평론가 ()
  • 승인 2009.12.22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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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프로그램 ‘남녀탐구생활’과 ‘남보원’이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이유

▲ KBS 의 ‘남보원’ 코너에서 박성호·황현희·최효종 (왼쪽부터)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KBS


올 하반기에 케이블방송 tvN <재밌는 TV 롤러코스터>의 한 코너인 ‘남녀탐구생활’의 열풍이 불었다. 케이블TV 프로그램임에도 시청률이 5% 수준으로 치솟았다. 케이블TV에서 이 정도면 지상파 시청률 30%에 맞먹는 성과라고 한다. 시청률뿐만이 아니다. ‘남녀탐구생활’은 시청률 수치를 뛰어넘는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세바퀴>의 경우 시청률은 높지만 별다른 화제를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반면에 ‘남녀탐구생활’은 수많은 사람의 탐구 대상이 되고 각종 지상파 프로그램이 패러디에 나서는 등 가히 한국 케이블TV의 새 장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이 개를 문 것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케이블TV가 지상파 프로그램을 조잡하게 패러디하는 경우는 있어도, 지상파 프로그램이 케이블TV를 참조하는 일은 없었다. ‘남녀탐구생활’이 기적을 일으킨 셈인데, 이 괴력의 근원은 무엇일까?

그 비밀은 코너 제목에 숨어 있다. 바로 ‘탐구’이다. 이 프로그램은 남성과 여성의 행태를 세밀하게 탐구해서, 촌철살인의 코미디적 표현으로 보여준다. 이 프로그램에서 가장 화제가 되었던 성우 내레이션이 그 탐구의 분위기를 더욱 극적으로 만든다. ‘남녀탐구생활’의 성우는 외계 미스테리물 <엑스파일>로 유명한 서혜정이다. 그녀가 일체의 감정이 배제된 기계적인 톤으로 남녀의 생태를 분석·리포트하는 것이 프로그램의 내용이다. 그래서 마치 우주인이 지구인을 탐구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기계적인 소리를 내다 보니 일반적인 내레이션을 할 때보다 목이 더 빨리 쉰다고 한다. 그 목소리는 우리에게 익숙했던 일상을 낯설게 하는 효과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시청자는 프로그램의 남녀 탐구에 함께 참여하며 우리 자신의 모습을 제3자의 시선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우리 자신을 탐구해서 그 단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에 한국인이 열광한 것이다. 인간은 인간의 이야기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여기서도 확인하게 된다. 할리우드처럼 천문학적인 제작비를 들여 기가 질리는 스펙터클을 만들지 못할 바에야, 한국처럼 저예산으로 승부를 보아야 하는 나라는 역시 ‘인간’의 이야기에 집중해야 한다.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표현하는 데 성공했을 때, ‘남녀탐구생활’과 같은 대박이 가능한 것이다.

‘탐구’의 위력 보여줬지만 ‘된장녀’ 공격하는 내용 많아 찜찜

▲ tvN 의 ‘남녀탐구생활’ 코너 출연자 정형돈(왼쪽)·정가은.

최근 <개그콘서트>에서 가장 크게 화제를 모으는 코너는 ‘남보원’이다. 이 코너도 마찬가지다. ‘남보원’의 원 제목은 ‘남성인권보장위원회’인데, 요즘 젊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느낄 법한 남성의 애환·불만을 관찰해서 촌철살인으로 표현해낸다. ‘남녀탐구생활’이 남녀의 입장을 각각 탐구한다면, ‘남보원’은 오직 남성의 속마음만을 대변한다는 것에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관찰이 예리하고, 그것을 표현한 것에 보는 이가 공감하며 박수를 칠 만큼 정확하다는 데에는 차이가 없다. 사회과학 보고서가 아니므로 건조하지 않게 코미디적 과장을 섞어 촌철살인으로, 동시에 매우 적나라하게 우리 마음의 속살을 드러낸다는 점에서도 두 프로그램이 같다.

‘남녀탐구생활’이 보여주는 우리의 모습은 이런 것들이다. 10대 여자의 이상형은 춤 잘 추는 학교 오빠, 20대 여자의 이상형은 명문대생 오빠, 30대 여자의 이상형은 돈 많고 차 있는 남자, 40대 여자의 이상형은 TV 드라마 속 주인공, 50대 여자의 이상형은 자기 아들(그래서 아들 여자친구가 얄미워)이라고 한다. 반면에, 10대 남자의 이상형은 ‘예쁜 여자요’, 20대 남자의 이상형은 ‘예쁜 여자요’, 30대 남자의 이상형은 ‘예쁜 여자요’, 40대 남자의 이상형은 ‘예쁜 여자요’, 50대 남자의 이상형은 ‘예쁜 여자요’, 60대 남자의 이상형은 ‘예쁜 여자’라고 한다. 시청자는 이런 내레이션을 들으며 박장대소하게 된다.

‘남보원’은 남성의 분노에 집중한다. 왜 남자만 데이트 비용을 내야 하는가? 여자는 왜 계산서를 남자에게 떠맡기며 비싼 커피를 마시는 것인가? 왜 동네 노래방 놔두고 럭셔리 노래방을 찾나? 왜 영화 볼 때 팝콘 하나 안 사려고 하나? 그러면서 ‘여성 여러분, 그렇게 살아서 살림살이 나아지셨습니까?’라고 읍소하고, 기어이 남성을 모두 일으켜 세워 ‘여자가 밥을 사는 그날까지 남자여 일어나라!’라는 선동으로 나아간다.

‘남녀탐구생활’에서 그려지는 남녀의 모습은 철저히 사회적인 통념이나 편견을 반영하고 있다. 사회적인 통념을 반영하므로 시청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런 표현이 바람직한 것인가에는 의문이 남는다. 이 프로그램에서 그려지는 남녀는 철저히 속물이다. 대체로 남성은 ‘무신경 밝힘증 진상’으로, 여성은 ‘결벽증 허영병 된장’으로 그려진다. 이런 모습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TV가 너무 과장되게 표현하면 편견을 강화하거나 대상을 비하하는 것이 될 우려가 있다. 여성의 경우 명품 쇼핑에 열중하며, 비싼 커피를 테이크아웃해서 고급스러운 액세서리와 함께 직장 명찰을 달고 강남거리를 활보하는 것에 보람을 느끼는 존재로 그려지는데, 이것은 그렇지 않아도 격심한 ‘된장녀 혐오증’을 강화할 수 있다. 20대 여성의 관심사가 ‘옷, 화장품, 명품 그리고 그것을 사주는 남자’로 표현된 것도 그렇다고 하겠다.

‘남녀탐구생활’의 경우에는 남녀가 모두 속물로 그려지므로 한쪽만을 차별한다고 할 수는 없는데, ‘남보원’은 여성만을 공격하는 성향이 확연하다. ‘남보원’이 표현하는 것은 ‘된장녀’에 대한 증오심이다. 왜 돈도 안 내며 명품만 밝히느냐고 공격하면서 남성의 인권을 지키겠다고 하는 것이다.

남성이 된장녀 혐오증을 갖게 된 것은 21세기 이후 여성들의 소비 욕구가 커진 반면에 남성들의 주머니는 더 가벼워졌기 때문이다. 남성은 빈곤에 직면하면서 루저가 될 공포에 떨고 있다. 얼마 전 있었던 ‘루저 사태’에도 남성의 그런 공포심과 된장녀 혐오증이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남성이 주로 ‘씹는’ 대상은 못생긴 여자, 즉 ‘오크녀’였었는데 요즘에는 ‘된장녀’가 추가되어서 비록 예쁘더라도 된장의 기미가 보이면 가차 없이 단죄에 들어간다. ‘남보원’도 그런 분위기를 반영해 한국 남성의 공감을 얻고 있는 듯하다. 요즘 한국 남성은 ‘예쁘고 소박하며 된장스럽지 않으면서도 글래머 가슴에 꿀벅지를 가진 청순녀’를 원하고 있다.

유감스럽지만, 된장녀를 그렇게 공격해도 남성의 살림살이는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한국 사회 양극화의 원인이 된장녀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여성도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여성에게 분풀이를 하는 남성이 ‘찌질’해 보이지 않을 수 없다. 데이트 비용을 남성이 내는 이유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러 지표가 한국의 여성 차별 정도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최고 수준이라고 말해주고 있다. 이런 상황인데도 여성 인권이 아닌 남성 인권을 부르짖는 프로그램과 그에 공감하는 수많은 남성. 그들의 공감 속에 오늘도 ‘오크녀 놀려먹고 된장녀 씹는’ 내용이 TV와 인터넷을 수놓고 있다. ‘남보원’의 웃음이 개운하지만은 않은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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