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굴곡 함께하며 한국 법조계에 젖줄 역할
  • 이춘삼 | 편집위원 (sisa@sisapress.com)
  • 승인 2009.12.22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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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대 법대 건물 ⓒ시사저널 임준선


‘가슴마다 엉큼스런 야심을 품고 / 육법전서 맡겨 놓고 외상술이라 / 고등고시 핑계 삼아 연애 잘하니 / 부모님과 애인들의 크나큰 고통 / 날고 기는 놈팽이들이 다 모여들어 / 어제 술집 오늘 도서관 내일 고시다 / 어제 휴강 오늘 종강 서울법대다.’

‘가슴마다 성스러운 이념을 품고…’로 시작되는 서울대 교가를 법대생들은 이렇게 개사해서 불렀다. 술집에 가고는 싶은데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못하고 연애에 관심이 있으면서도 목표는 고시 합격임을 스스로 다짐하는 내용이다. 물론 막걸리를 마시던 자리 같은 곳에서 불리던 장난기 섞인 ‘서울대 법대 교가’이기는 하지만, 이 노래 속에는 자기들 스스로가 야심을 간직한 ‘날고 기는 놈팽이’라는 자부심도 은연중에 깔려 있다. 

표에 실린 명단에서도 알 수 있듯 서울대 법대는 정·관계 및 법조계를 중심으로 사회 각계에 엄청나다고 할 만한 숫자의 일꾼들을 길러 내보냈다. 특히 사법시험 합격자 숫자가 지금처럼 많지 않던 시절 법조계는 서울대 법대 출신들의 독무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였다.

서울대 법대의 법통적 비조(鼻祖)로 불리는 법관양성소가 문을 연 것은 1895년.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1만6천여 명의 졸업생을 기록했다. 법관양성소는 근대화의 여명기에 새로운 사법 제도를 뒷받침하기 위해 개설되었으며, 이후 법학교 → 경성전수학교 → 경성법학전문학교로 이름과 모습을 바꿨고, 나아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를 거쳐 광복 후 1946년 국대안(國大案) 반대 파동의 소용돌이를 겪으면서 오늘의 서울대 법과대학으로 자리 잡았다. 오는 2012년 법학전문대학원인 로스쿨이 본격적으로 문을 열면 서울대 법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될 운명에 처했다.

서울대 법대는 한 세기가 넘는 세월을 지내오는 동안 학생들에게 ‘법의 정신(legal mind)’을 기르도록 가르쳐왔다. 교정에는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라는 문구가 내걸려 있지만, 정의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부침하고 역으로 정의를 갈구하는 목소리가 커진 측면이 있다. 이동진 시인(법대 24회·전 외무부 대사)은 법대 100년에 부치는 축시에서 “지난 한 세기 동안 이 밭에서 탁월한 수재들이 법을 배우고 떠났다. 각계각층에서 눈부신 업적을 이루었고, 나라에 든든한 동량을 제공했다. 그러나 이 땅에는 아직도 법 때문에 무수한 사람들이 울고 있는 구석도 있다”라고 지적했다. 그리하여 법 때문에 흘리는 눈물을 씻어줄 깨끗한 손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정·관계, 법조계에 선후배 라인 즐비

법대 출신들이 진출한 현관(顯官) 요직(要職)은 실로 다양하다. 우선 국무총리를 역임한 사람을 보면 경성제대를 졸업한 현승종·신현확 전 총리를 비롯해 노신영·이홍구·이한동·이회창·이수성 전 총리로 이어진다. 서울대 법대 출신은 아니지만 서울대 법대 학장을 역임한 이한기씨도 총리 자리에 나갔다.

장관급에 이르면 그 숫자를 일일이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로 복잡해진다. 문홍주 문교, 정석모 내무, 금진호 상공, 서정화 내무, 김용환 재무, 손수익 교통, 장재식 산자, 이대순 체신, 정종택 환경, 이규효 건설, 김종호 내무, 박윤흔 환경, 이정빈 외무, 최동섭 건설, 홍순영 외무, 조해녕 내무, 임인택 건교, 김영수 문화체육, 안병만 교육, 이헌재 경제, 황산성 환경, 강만수 기획재정, 김종민 문화관광, 강금실 법무 등이 정권의 명멸에 아랑곳없이 판서 자리를 거쳐갔다.

서울대 법대 졸업 회수별로 보면 10회(1952년 졸업)에서 3명, 11회에서 5명이 장관으로 기용되었다. 12회에서는 대통령 비서실장을 포함해 6명이 요직에 올랐으며, 18·19·23·24회에서 복수의 장관이 나왔다. 기획재정부 강만수 전 장관과 윤증현 현 장관은 동기끼리 바톤 터치를 한 기록을 세웠다. 여기에 타계한 이들은 포함되지 않아 그 숫자까지 합치면 굉장한 규모가 될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현직을 보더라도 안병만 교육과학기술부장관, 윤증현 기획재정부장관, 유명환 외교통상부장관, 진동수 금융위원장이 활약 중이며 대법관을 역임한 김황식 감사원장도 있다. 서울시 부시장으로 재직하면서 이명박 시장을 보필한 원세훈 국가정보원장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막후에서 역할을 해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법부로 가보면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 대법관, 각급 법원장에 서울대 법대 출신들의 숫자가 가히 압도적이다. 대법원장은 김용철(7대)·김덕주(11대)·최종영(13대) 원장에 이어 이용훈 원장이 현직을 지키고 있다. 검찰도 사정은 비슷하다. 졸업 회수 순으로 정구영·김도언·이명재·신승남·박순용·송광수·정상명·임채진 총장이 줄을 잇고 있다. 법무부장관을 보면 1회 졸업생인 이선중 장관으로부터 정치근·배명인·최상엽·정해창·김기춘·김두희·정성진·김종구·김경한·최경원 장관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법무부장관의 경우에는 김기춘·김두희 씨처럼 검찰총장을 지내고 나서 장관 임명을 받은 경우도 있고, 총장이나 장관을 마치고 중앙정보부장이나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옮긴 사례도 눈에 띈다.

언론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조선일보에서는 서울대 법대 출신 기자 여섯 명이 유명하다. 김용태 전 대통령 비서실장(12회)이 편집국장으로 있던 1978년 즈음해 5명의 동기들이 편집국에 포진해 위세를 떨쳤다. 훗날 한나라당 대표를 지낸 최병렬 정치부장(15회)과 그의 동기들이었다. 청와대를 출입한 안병훈 정치부 차장(조선일보 부사장 역임)과 국회에 출입하던 이현구 수석기자, 이상우 편집기자(한림대 총장 역임)가 그들이다. 김대중 현 조선일보 고문은 워싱턴 특파원으로서 필봉을 휘둘렀다.

12·12 사태와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들어선 전두환 대통령의 5공은 서울대 법대 출신들을 요직에 다수 기용했는데, 그때 생긴 말이 ‘육법당’이다. 육사 출신들과 법대 출신들이 나라를 좌지우지한다는 비아냥이었다. 혹자는 법대 출신들이 상당히 권력 지향적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법대생들은 일정 정도는 인정하면서도 그에 대척되는 반대편에는 부당한 권력에 맞서 싸우고 사회적 약자를 옹호하며 대변해 온 투쟁의 역사가 있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 두 갈래 흐름이 서울대 법대의 큰 틀 안에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신범(25회) 전 국회의원이 주도해 펴낸 <서울법대 학생운동사>는 이런 내용을 상당 부분 담고 있다.

전공과 전혀 다른 길 택한 인사도 상당수

서울대 법대 출신 가운데 아직도 많은 사람으로부터 기억되는 고 조영래 변호사(23회)가 있다. 조변호사는 서울대 법대를 수석 입학한 수재로,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주도한 이유로 정학 처분을 당하고 삼성 재벌 밀수 규탄, 6·8 부정선거 규탄, 3선 개헌 반대, 교련 반대 등에 앞장서며 학생운동의 중심에 섰었다.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으로 복역하고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 중이던 6년여 동안 그는 그 유명한 <전태일 평전>을 썼다. 변호사 활동을 하는 동안에는 노동·빈민·공해·학생 관련 사건 등 인권 변호에 진력하기도 했다. 그가 팔을 걷고 나선 부천 성고문 사건 진상 규명은 한국 사회에서 인권 신장과 더불어 민주화를 앞당기는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한창 일할 43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 그에게 큰 기대를 걸었던 많은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9회 졸업생인 고 최종길 교수의 안타까운 죽음도 굴곡진 우리 역사가 빚어낸 또 다른 비극이었다. 1973년 10월25일 당시 중앙정보부는 유럽을 거점으로 한 대규모 간첩단을 적발했다고 발표했고, 이와 관련해 수사를 받던 최교수가 건물 7층 화장실 창문 밖으로 투신했다고 설명했다. 1974년 10월 살벌한 유신 체제의 폭압 속에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명동성당에서 최교수를 위한 추모 미사를 가졌고, 그가 정보부에서 전기 고문의 오작동으로 사망했다고 폭로했다. 이 사건은 결국, 2003년에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투신 자살이 아니라 고문사로 밝혀졌다.

서울대 법대 출신 중에는 전공인 법률과 관련 없는 분야에서 나름의 영역을 개척해 이름을 날린 인사도 꽤 있다. 황병기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13회)은 가야금 연주와 작곡을 전공으로 한다.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에 재학 중이던 1951년부터 1958년까지 국립국악원에서 국악을 연구한 끝에 대학을 마친 후 서울대와 국립국악원에서 강사로 나섰다. 이화여대 음대 국악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50년 걸려 가야금 산조를 완성했고 그 공으로 은관문화훈장·방일영국악상·호암상·대한민국 예술원상 등 수많은 훈·표창을 받았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로 유명하며 갑작스런 죽음으로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렸던 고 전혜린 교수는 10회 졸업생이다. <하숙생>을 불러 인기를 얻은 가수 최희준(13회·구명 성준)은 저음의 허스키한 음성으로 내놓는 곡마다 히트를 기록하며 당대의 최고 가수로 열광적인 사랑을 받았다. 그 밖에 검도 사범으로 활동하는 전광희씨(25회)는 대학 1학년 때부터 검도를 시작해 지금은 7단의 경지에 이르러 있다. 문무관이라는 이름의 도장을 차려 후학들을 가르치고 대한검도회 전무이사로 한국 검도의 계발과 해외 보급에 힘쓰고 있다.

서울대 법대 내에서는 다양한 동아리 활동도 활발한데,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곳은 15회로 졸업한 1957년도 입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산악회이다. 산악회는 선후배·동료가 자일로 서로를 묶고 호흡을 함께하며 호연지기를 기르고 체력을 단련하면서 우의를 다져오고 있다. 졸업 후에도 OB 산악회 활동을 계속하며 그 어떤 동아리보다도 유대가 돈독하다는 평을 듣는다. 회원들은 사회 주요 포스트에서 활약하고 있다. 그 밖에 법학회와 <법학저널> 편집 모임, 문학회, 종교 모임도 끈끈한 유대감을 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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