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바꾸는 열정의 ‘덕후’들
  • 이경희 인턴 기자 ()
  • 승인 2010.01.05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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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아와 달리 전문성 지닌 컬렉터…2차 창작한 콘텐츠로 주목

ⓒ일러스트 이경국


‘덕후’(일본어 오타쿠와 유사한 발음을 이용한 신조어. 오덕후가 정식 명칭)들의 반란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은둔형 외톨이’로 불리던 덕후들이 음지에서 양지로 나왔다. 오타쿠는 안경 쓰고 여드름 난 돼지로 비하될 만큼 부정적으로 비쳤다. 방 구석에 처박혀 하나에만 몰두하는 집착형 캐릭터로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와 동의어로 인식되었다.

때문에 ‘오타쿠’는 젊은이들이 가장 기피하는 단어 중의 하나였다. 항간에는 ‘오타쿠가 되는 방법’이라는 역설적인 설명서가 나돌기도 했다. 실제는 오타쿠가 되지 않기 위한 설명서였는데, 어느 한순간에 ‘덕후 문화’를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신조어도 등장했다. 한때 유행했던 ‘~한다능’ 등의 용어가 그것이다. 오타쿠가 되지 않기 위해 오타쿠 용어를 정리해놓았는데, 이런 용어가 젊은이들 사이에 인기리에 통용되는 아이러니를 낳은 것이다. 이유는 ‘재미’에서 찾을 수 있다. 개그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일상 용어에서도 덕후들의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덕후질’의 대표 격인 편집된 동영상과 그림, 움짤(움직이는 짤방의 줄임말, 드라마나 뮤직비디오의 주요 장면을 캡처해 만든 움직이는 GIF 파일을 총칭) 등이 인기를 끌면서 덕후 문화는 이제 우리 사회의 문화 트렌드가 되고 있다.

사회 저변에 ‘덕후 문화’를 전파한 일등 공신은 인터넷 사이트 ‘디시인사이드’이다. 이곳은 덕후들이 단순히 문화 생산자에 머무르지 않고 놀이 문화를 주도적으로 이끌게 했다. 때문에 덕후들 사이에서 디시인사이드는 ‘오덕후의 성지’로 불린다.

각종 인터넷 폐인 문화와 신조어가 쏟아져나오면서 시작된 디시인사이드의 대중문화 영향력은 이제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이런 구도가 가능한 것은 관심사별로 세분화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디시인사이드의 갤러리 수는 1천100개가 넘는다. 운영자들은 도배된 댓글을 삭제하는 정도의 최소한의 개입만 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 사이트가 역동적이고 활발하게 운영되는 비결로 평가된다.

그렇다면 마니아와 덕후는 어떻게 다를까? 첫 번째, 덕후는 ‘컬렉터’(collector)라는 점이다. 무조건 모은다. 많이 모으기 위해 외장 하드도 산다. 감독 버전으로 드라마의 DVD 한정판이 출시되면 재빠르게 구입하고, 아이폰 같은 새로운 기계가 나오면 새벽같이 몰려들어 사는 이들은 모두 컬렉터의 특징을 지닌 덕후들이다. 두 번째는 2차 창작을 한다는 것이다. 동영상·움짤 등을 만들고 팬픽(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 등을 주인공으로 해서 쓴 소설)도 쓴다. 연덕후(김연아 덕후)인 ‘승냥이’가 대표적이다. 사진 찍고, 그림 그리고, 동영상을 만든다. 디시인사이드가 덕후의 성지로 불리는 이유이다.

이곳에서 인터넷 용어의 대부분이 만들어진다. 이런 것을 볼 때 덕후를 판단하는 기준은 마니아 차원을 넘어선 애정도와 관련 자료를 어느 정도 소장했는가 하는 것과, 2차 창작 여부 정도이다. 수준에 따라 덕후 용어도 달라진다. 오덕후가 되기 전을 삼덕후(삼덕), 오덕을 넘어서면 십덕후(씹덕)라고 한다.

2010년 주목되는 소비자층으로 부각되기도

ⓒ일러스트 이경국

올해 스물네 살의 추선혜씨는 소덕후와 2PM 덕후이다. ‘덕후질’을 위해 인터넷을 많이 이용하기 때문에 자신의 직업을 네티즌이라고 말하고 다닌다. 소덕후는 흔히 ‘소녀시대 덕후’를 말하지만, 다음 커뮤니티인 ‘소울드레서’ 회원 사이에서는 ‘소드 덕후’로 통한다.

추씨가 덕후를 옹호하는 이유는 덕후들이 콘텐츠 리더로 당당히 활동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오타쿠들이 ‘그들만의 세상’을 구축했던 것과는 달리 덕후들은 당당하게 자신의 관심사를 표현한다. 지난해 한 신문사에서 실시한 ‘덕후왕 선발대회’에 자신을 덕후라고 칭하는 수많은 사람이 응모한 것은 음지에 있던 덕후가 양지로 나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당당히 자신이 덕후임을 밝히고 디시 갤러리 등을 통해 다양한 활동을 하는 것이 덕후들의 특징이다. 이들의 문화가 2차, 3차 커뮤니티로 옮아가고 일종의 유행으로 자리 잡는 것을 보면 덕후는 단순히 쓸데없이 시간을 소비하는 ‘잉여 인간’이 아니다. 그래서 추씨는 외친다. “우리는 단순한 잉여가 아니다. 세상에 기여하고 있다.”

잉여를 넘어선 덕후의 힘은 곳곳에서 감지된다. 한 화장품 회사는 2010년 새 소비자층으로 ‘친절한 오덕후족(族)’을 선정했다. 한 분야에 놀라운 전문성을 보이는 ‘덕후적’ 소비자층이 온라인을 통해 화장품에 대한 전문 지식을 선보이며 오피니언 리더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일본에서도 이미 ‘오타쿠의 힘’이 사회 전반에 드러나고 있다. 일본 추리소설 역시 오타쿠 기질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스토리의 디테일이 강하고 다양한 소재로 독자들을 매료시킨 일본 추리소설의 힘은, 한 번 잡으면 끝까지 파고드는 오타쿠적 집착이 뒷받침한 것이다.

덕후는, 오타쿠의 부정적인 부분은 빼고 열정과 전문성을 입었다. 여러 분야에서, 여러 종류의 덕후들이 늘어나고 이들이 즐겁고 창의적인 문화를 생산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은 ‘덕후들의 시대’이다. 마르지 않는 상상력과 집중력으로 덕후들은 앞으로 계속 진화할 것이다.


아이돌 그룹과 인기 드라마 뒤에 그들이 있다

덕후의 원조는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일본 문화 오타쿠들이다. 하지만 요즘 대세는 누가 뭐래도 ‘아이돌 덕후’이다. ‘소덕후(소녀시대 덕후)’, ‘원덕후(원더걸스 덕후)’ 등 아이돌 광팬들이 덕후로 불리고 있다.

소녀시대가 광고 모델로 활동 중인 한 치킨 전문점에서는 달력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연말을 맞아 치킨을 주문하면 달력을 주는 것이지만, 소덕후들 사이에서는 “소시 달력을 사니 치킨을 주더라”라는 말로 회자된다. 드라마 폐인도 덕후 대열에 가세했다. 조기 종영했던 MBC 드라마 <탐나는 도다>는 시청률 부진에도 덕후 팬들을 양산했다. 이 드라마의 광팬이었던 정보미씨(25)는 “드라마가 좋아 DVD도 구입했다”라고 말했다.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수많은 패러디와 캐릭터를 낳은 MBC의 <선덕여왕> 역시 덕후 팬들의 지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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