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판 위에 전설 새기고 날아오른 세기의 요정들
  • 신명철 | 인스포츠 편집위원 ()
  • 승인 2010.02.23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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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여자 싱글 피겨스케이팅 스타 / 올림픽 3연속 우승 소냐 헤니·실력과 미모 겸비한 카타리나 비트 돋보여
▲ 1968년 올림픽의 금메달리스트 페기 플레밍은 2000년대 들어서도 여전히 스타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연합뉴스
 

피겨스케이팅의 역사는 의외로 길다. 동계올림픽이 열리기도 전인 1908년 런던 하계대회와 1920년 앤트워프 하계대회 때 남녀 싱글 종목이 치러졌다. 역사가 깊은 만큼 은반을 누빈 스타플레이어들의 면면도 화려하기만 하다. 여자 피겨스케이팅 사상 전무후무한 올림픽 3연속 우승에 빛나는 소냐 헤니부터 매혹의 스케이터 카타리나 비트에 이르기까지.  

소냐 헤니, 완벽한 연기 보여준 실력파 스케이터

1908년 런던 하계대회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 우승자는 맷지 사이어스(영국), 1920년 앤트워프 하계대회 같은 종목의 금메달리스트는 마그다 줄린 모로이(스웨덴)이다. 1924년 샤모니에서 열린 제1회 동계올림픽의 같은 종목 정상에 오른 선수는 오스트리아의 허마 자보 플랭크이다. 이들을 기억하는 스포츠팬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1928년 생모리츠, 1932년 레이크플래시드, 1936년 가르미시파르텐키르헨 등 3개 대회 연속 금메달의 주인공인 소냐 헤니는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기억하는 이가 많다. 올림픽뿐만이 아니다.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1927년부터 1936년까지 10연속 우승했다. 은퇴한 뒤 영화배우로 활동할 때는 할리우드에서 가장 많은 출연료를 받는 인기 스타였다.

1912년생인 헤니는 세계 정상에 올랐을 때 나이가 15세에 불과했다. 사이클 선수였던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고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헤니는 어렸을 때부터 스키, 테니스, 수영 등 여러 종목에서 재능을 보였다. 아홉 살 때 노르웨이 선수권대회에서 우승했다. 피겨스케이팅에 입문할 때 헤니의 아버지는 러시아의 세계적인 발레리나 타마라 카르사비나 등 최고 수준의 개인 코치를 고용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라는 말이 있지만, 헤니는 공식 경기에서 단 한 번도 엉덩방아를 찧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완벽한 연기를 했다.

헤니는 경기복으로 미니스커트를 입은 첫 번째 선수로 기록되어 있다. 피겨스케이팅에 댄스를 가미한 헤니의 눈부신 연기로 인해 피겨스케이팅은 동계올림픽의 꽃으로 자리를 잡았다. 현대 피겨스케이팅의 틀을 헤니가 만든 것이다.

소냐 헤니와 비슷한 행보 보여준 페기 플레밍 

1993년 AP통신은 미국에서 인기 있는 스포츠맨 랭킹을 발표했다. 1위는 1984년 로스앤젤레스 대회에서 비동유럽 선수로는 처음으로 올림픽 여자 체조 개인종합 우승을 차지한 매리 루 르튼, 2위는 1976년 인스부르크 대회에서 미국 선수로는 세 번째로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도로시 해밀, 3위는 역시 피겨스케이팅 선수인 페기 플레밍이었다. 플레밍은 마이클 조던(농구), 조 몬태나(미식축구), 웨인 그레츠키(아이스하키), 놀란 라이언(야구) 등 명단에 오른 8백여 명의 유명 선수들을 제쳤다. 

플레밍은 1968년 그레노블 대회 우승 외에 세계선수권대회에서 1966년부터 3연속 우승했다. 성적만 놓고 보면 미국인들에게 큰 인기를 누릴 것 같지 않다. 그러나 플레밍은 특별한 기록을 갖고 있다. 그레노블 대회에서 손에 쥔 금메달은 미국 선수단이 이 대회에서 획득한 유일한 금메달이었다. 미국인들이 그때 기쁨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플레밍은 미녀 스케이터의 1세대쯤 된다. 은퇴한 뒤 영화 <하얀 연인들>에 출연하고 20년 넘게 ‘ABC 스포츠’의 해설자로 활약했다. 미국 골다공증재단 대변인 등 활발한 사회 활동을 하고 있기도 하다. 또, 1998년 유방암 선고를 받았던 플레밍은 자신이 운영하는 포도주 제조회사에서 나오는 수입의 일부를 유방암 연구 사업에 기부하고 있다. 선배인 소냐 헤니가 피겨스케이팅에 댄스적인 요소를 가미했다면 플레밍은 비교적 큰 동작의 다이내믹한 연기로 피겨스케이팅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카타리나 비트, 은반을 휘어잡은 매혹의 스케이터  

▲ 2008년 2월에 열린 카타리나 비트의 고별 공연. ⓒ연합뉴스

김연아가 나타나기 전까지 국내 스포츠팬들이 알고 있는 여자 피겨스케이팅 선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렇지만 중·장년 팬은 물론 신세대 팬까지 알고 있는 선수가 있다. 카타리나 비트이다. 비트의 연기는 한마디로 압도적이다.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연기에서 힘과 열정이 묻어났다. 비트의 전성기는 한국이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때와 맞물린다. 비트가 올림픽에서 2연속 우승한 1984년 사라예보, 1988년 캘거리 대회와 같은 해에 각각 하계대회인 로스앤젤레스 대회와 서울 대회가 열렸다. 특히 캘거리 대회는 쇼트트랙·스피드스케이팅이 시범 종목이기는 했지만, 한국에 처음으로 동계올림픽 메달을 안긴 대회이기 때문에 상당수의 국내 스포츠팬이 비트의 연기를 TV로나마 실시간으로 볼 수 있었다.

 

1965년 옛 동독에서 태어난 비트는 체육에 소질을 지닌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교를 다녔다. 성장을 거듭한 비트는 1983년 유럽선수권자가 되었고, 이듬해 열린 사라예보 대회에서 1983년 세계선수권자인 로잘린 서머스(미국)와 치열한 접전을 벌인 끝에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1984년, 1985년 연속으로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비트는 1986년 세계선수권을 미국의 데비 토마스에게 내주었다. 그러나 1987년 세계선수권을 되찾은 비트는, 1988년 캘거리 대회에서 토마스와 ‘카르멘의 전쟁’으로 불린 숙명의 일전을 벌인다. 두 선수 모두 비제의 가곡 <카르멘>을 프리스케이팅 곡으로 선정해 그같은 별칭이 붙었다. 비트는 최상의 연기를 펼치지는 못했지만, 토마스가 예정된 5차례의 트리플 점프에서 3차례나 실수를 하는 바람에 소냐 헤니에 이어 두 번째로 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에서 챔피언 자리를 지킨 선수가 되었다.

1988년 동독 선수로는 이례적으로 프로로 전향한 비트는 캘거리 대회 남자 싱글 우승자인 브라이언 보이타노(미국)와 함께 ‘비트와 보이타노’ 아이스쇼로 뉴욕 매디슨 스퀘어가든 공연에서 매진을 기록하는 등 선풍을 일으켰다. 비트의 연기는 화려하면서 격정적이었으며 점프와 스핀, 스텝과 스파이럴 등 모든 기술을 고르게 구사했다. 1994년 릴리함메르 대회 때 복귀해 동독 시절과 같은 메달에 대한 부담 없이 자유로운 기분으로 7위를 차지한 비트는 1995년 세계피겨스케이팅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008년 2월과 3월에 걸쳐 고별 투어를 마친 비트는 화려한 외모로 특히 남성 팬들의 인기를 독차지한 피겨스케이팅 선수로 영원히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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