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딸들, 면세점에서 한판 붙었다
  • 이석 (ls@sisapress.com)
  • 승인 2010.03.09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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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호텔신라, 각각 AK면세점과 파라다이스면세점 인수 추진…둘 다 성공하면 ‘2강 체제’ 굳어져

 

▲ 이부진 호텔신라·삼성에버랜드 전무(맨 왼쪽)와 신영자 롯데면세점 사장(오른쪽). ⓒ연합뉴스


재벌가 딸들이 3조원 규모의 면세점 시장을 차지하기 위해 격돌하고 있다. 시장 1, 2위 업체인 롯데면세점과 호텔신라는 각각 AK면세점과 파라다이스면세점 인수를 추진하면서 ‘덩치 경쟁’에 나섰다. 이번 인수가 성공하면 국내 면세점 시장은 사실상 롯데와 호텔신라 ‘2강 체제’로 굳어지게 된다. 여기에 인천공항 입국장 면세점 설치를 위한 법률 개정안이 현재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인천공항공사의 분석에 따르면, 입국장 면세점이 문을 열게 되면 시장 규모가 최소 5백억원 이상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롯데, 호텔신라 등 면세점업계는 법안 통과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하지만 대한항공을 비롯해 국내에 취항하는 60개 항공사는 기내 면세점을 운영하고 있다. 입국장 면세점이 개장하면 매출 감소가 불가피한 탓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 세 곳 모두 오너 일가의 딸들이 수장직을 맡았다. 장녀이며, 대외적으로 경영 능력을 인정받는 점도 비슷하다. 롯데면세점은 신격호 회장의 장녀인 신영자 롯데면세점 사장(롯데쇼핑 사장 겸직)이 이끌고 있다. 호텔신라 면세점 사업은 최근 경영 능력을 인정받은 이부진 전무(삼성에버랜드 전무 겸직)가 주도하고 있다. 대한항공 기내 면세점 사업부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맏딸인 조현아 전무가 담당하고 있다. 회사 간 경쟁을 넘어 재벌가 딸들의 대리전으로 흘러가는 양상이다.

현재까지는 ‘맏언니’인 신영자 사장이 가장 우세하다. 롯데는 지난 1980년 처음으로 면세점 사업을 시작했다. 현재 전국적으로 여덟 개 지점망과 4백여 종의 유명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다. 일찍부터 사업에 뛰어든 탓에 시장 점유율이 50%에 육박한다. 2위인 호텔신라(27%·업계 추정치)에 두 배 가까운 점유율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AK면세점(점유율 8%)까지 인수할 경우, 점유율은 더욱 높아지게 된다. 신사장은 일찍부터 면세점 사업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난해 4월에는 ‘만년 부사장’에서 사장으로 승진도 했다. 비슷한 시기 롯데쇼핑 등기이사에도 2년 만에 복귀했다. 그러자 롯데그룹의 승계 구도에 변화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롯데그룹측은 “예우 차원의 승진이었다”라고 해명했다. 롯데면세점 관계자도 “면세점 사업은 최영수 대표이사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라면서 경영권 문제와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하지만 롯데그룹에서 쌓아온 신사장의 37년 내공은 무시할 수 없다. 신사장은 지난 1973년 롯데호텔 이사로 경영을 시작했다. 이후 롯데백화점과 호텔의 성장을 주도해 온 주인공이다. 특히 MD(상품 구성) 쪽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영업이사와 상품본부장으로 오래 근무해 온 만큼 영업이나 MD 쪽의 지식이 뛰어나다. 최영수 대표와 역할을 분담할 경우 시너지 효과가 나올 수 있다”라고 말했다. 향후 롯데면세점과 관련한 신사장의 역할이 주목되는 이유이다.

이부진 전무의 추격도 만만치 않다. 이전무는 지난 2001년 호텔신라 기획팀에 입사했다. 이후 호텔 개혁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특히 호텔 부대사업에 불과했던 면세점 사업에 뛰어들어 성과를 올렸다. 7년여 만에 매출이 네 배 이상 증가했다. 지난 2002년 2천3백억원에 불과하던 면세점 매출은 지난해 9천8백억원으로 늘어났다. 시장 점유율도 13.3%에서 27.8%로 두 배 이상 올라갔다. 아직은 롯데에 미치지 못하지만, 호텔신라의 매출 중 80%가 면세점 사업일 정도로 매출 구조가 바뀌었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이부진 전무는) 평소 소탈한 성격이지만 업무만큼은 지독할 정도로 철두철미하다”라고 말한다. 궁금한 점이 있으면 새벽에도 담당자에게 이메일을 보내 확인할 정도라고 한다. 이를 바탕으로 최근 매장 상품을 일본인 취향에 맞게 바꾸었다. 결과는 고무적이었다. 장우종 호텔신라 홍보팀장은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엔화 가치가 급등하면서 국내에 일본 특수가 일었다. 일본 관광객에 맞게 상품을 재배치해 상당한 매출 상승 효과를 보았다”라고 설명했다. 지난 2008년 인천공항 면세점에 입점한 것도 주효했다. 호텔신라는 지난 2001년 공항 면세점 입찰에 참여했다가 포기한 적이 있다. 2008년에는 이전무가 직접 TF(태스크포스)를 결성해 공항 면세점 입찰에 참여했다는 후문이다. 최근에는 파라다이스면세점(점유율 5%) 인수까지 노리면서 롯데의 아성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대규모 국제 행사 앞둬 새 면세점 생겨날 여지도 커져   

▲ 글로벌 금융 위기에도 불구하고 면세점 업계는 ‘일본 특수’ 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연합뉴스

이같은 구도로 볼 때 신영자 사장과 이부진 전무를 축으로 한 면세점 시장의 재편은 향후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AK면세점과 파라다이스면세점이 양쪽에 인수될 경우, 사실상 견제 세력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시장에서는 4위 업체인 한국관광공사의 인천공항 면세점 ‘조기 철수설’마저 나돌고 있다. 이와 관련해 강중석 관광공사 면세사업단장은 “최근 적자 규모가 커지면서 기획재정부에 인천공항 면세점을 조기에 정리하겠다는 뜻을 전달한 것이 사실이다. 4월 초 결론이 나올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결론이야 어떻게 나오든 관광공사의 면세점 사업은 철수가 불가피하다. 지난 2008년 8월, 1차 공기업 선진화 방안에 따라 비핵심 사업은 2012년 말까지 정리할 예정이다. 시기가 문제일 뿐 퇴출은 불가피하다. 이 경우 남아 있는 곳은 동화면세점과 워커힐면세점, 단 두 곳뿐이라는 점에서 롯데와 호텔신라의 독주는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시장 ‘지각 변동’의 키를 쥐고 있는 곳은 공정거래위원회(약칭 공정위)와 관세청이다. 롯데는 현재 공정위에 AK면세점 인수를 위한 기업결합 사전 심사를 요청한 상태이다. 롯데가 AK면세점을 인수하게 되면 시장 1위 업체의 점유율 50%를 넘어서게 된다. 호텔신라의 파라다이스면세점 인수 역시 불투명하다. 관세청이 위임한 면세점 사업권은 파라다이스그룹에 한정되어 있다. 파라다이스그룹이 면세점 사업을 호텔신라에 넘길 경우 사업권이 취소될 수 있는 상황이다. 관세청과 공정위측은 “현재 검토 중이다”라면서 구체적인 언급을 자제하고 있다. 하지만 두 기관의 결정은 ‘메가톤급’의 파괴력을 지닌다. 두 곳 모두에게 인수 승인이 떨어질 경우에는 변화가 없겠지만, 한 곳만 승인이 나면 시장 구도는 또 한 번 격랑에 휩쓸릴 수도 있다.

2011년 대구에서 열리는 세계육상선수권대회와 2012년 여수해양엑스포를 앞두고 면세점 신설 규정이 대폭 완화된 점도 주목된다. 정부는 그동안 시내에 면세점이 새로 문을 여는 것을 엄격하게 제한해왔다. 면세점을 이용하는 고객 대부분이 내국인이라는 비판은 정부가 운신할 수 있는 폭을 좁게 만들었다. 면세점이 외화 벌이와 외국인 관광객에 대한 서비스 차원이라는 당초 취지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대규모 국제 행사 개최를 앞두고 규제를 대폭 완화했다. 이에 따라 새 면세점이 생겨날 수 있는 여지는 커졌다. 여수나 대구의 경우, 별도로 신규 특허를 허용할 계획이다. 롯데나 호텔신라가 매장을 얼마나 확보하느냐에 따라 시장 또한 요동을 칠 것으로 예상된다. 때문에 벌써부터 업계에서는 확장을 위한 물밑 암투가 치열하다. 익명을 요구한 업계의 한 관계자는 “최종적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회사 차원에서 공식적인 움직임은 없다. 하지만 물밑으로 정보를 캐려는 로비전이 뜨겁게 전개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입국장 면세점, 막혔던 문 뚫릴까

면세점업계를 둘러싼 이슈는 현재 이뿐만이 아니다. 국회에 계류 중인 입국장 면세점 설치를 위한 ‘관세법 일부 개정안’ 역시 업계 구도를 뒤흔들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물론 이 법안이 통과될지는 현재까지 미지수이다. 법안을 발의한 이명규 한나라당 의원(기획재정위원회 소속)은 “내국인의 면세품 판매가 출국장에서만 이루어지면서 외화 유출의 요인이 되고 있다”라고 법안을 발의한 취지를 설명했다. 현재 싱가포르, 홍콩, 호주, 캐나다 등 전세계적으로 22개 국가가 입국장 면세점을 운영하는 점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관세청의 반발이 만만치가 않다. 현행법상 입국장 면세점을 설치하기 위해서는 관세법을 바꾸어야 한다. 관세청은 “입국장에 면세점을 설치하면 혼란이 가중되고, 국가 보안이 위협받을 수 있다”라면서 반대 입장을 명확히 했다.  

양측의 충돌은 이해관계가 있는 면세점업계나 공항공사, 항공업계로 확대되고 있다. 입국장 면세점이 생기면 롯데나 호텔신라는 추가로 시장을 확보하게 된다. 공항공사 역시 1백50억원 규모의 임대료를 추가로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기내 면세점을 운영하는 항공사의 경우 매출 타격이 불가피하다. 일례로 대한항공의 기내 면세점 매출은 지난해 말 2천여 억원(편도 1천억원)을 기록했다.

입국장 면세점이 문을 열면 매출 감소로 이어지기 때문에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특히 대한항공 기내 면세점 사업부는 현재 조양호 회장의 장녀 조현아 전무가 담당하고 있다. 조전무는 대한항공 기내식 서비스를 명품화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비빔밥과 비빔국수를 내놓아 기내식 분야의 오스카상으로 불리는 ‘머큐리상’을 잇달아 수상했다. 때문에 상황에 따라서는 조전무 역시 이른바 ‘딸들의 전쟁’에 휩쓸릴 수도 있다.  

대한항공측은 조전무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에 곤혹스러운 표정이다. 회사 관계자는 “전체 매출이 10조원 규모이다. 이 중 기내 면세점 시장은 2천억원 규모에 불과한 만큼 비교 자체가 잘못되었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업계에서는 대한항공이 입국장 면세점에 뛰어들 가능성을 내비친다. 기내 면세점 매출이 하락한 상황에서 가만히 지켜볼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면세점업계의 한 관계자는 “일단 입찰이 진행되면 대한항공이 뛰어들 가능성이 크다. 기내 면세점과 연계할 수 있다는 점도 대한항공에는 이익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라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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