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셔츠’들은 왜 피를 뿌렸나
  • 조홍래 | 편집위원 ()
  • 승인 2010.03.23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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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반정부 시위대, 유혈 사태 예고하듯 극한 상황 ‘연출’…탁신 세력 고사시키려던 현 정부 ‘전전긍긍’

 

▲ 탁신 친나왓 전 태국 총리를 지지하는 ‘레드셔츠’가 3월14일 방콕 시내 랏차담넌 거리에서 반정부 집회를 열고 있다. ⓒEPA


지난 3월14일 일요일 10만명이 참가해 시작된 태국의 반정부 시위는 4일째인 17일 정부 청사와 총리 관저에 피를 뿌리는 극한 상황으로 치달았다. 탁신 친나왓 전 총리를 지지하는 시위대는 시위 참가자들의 자발적 수혈로 모은 약 1천ℓ의 피를 뿌리며 “우리의 피와 영혼으로 저주한다”라고 말했다.

이번 위기는 2006년 쿠데타로 실각한 탁신 전 총리를 지지하는 농민과 영세 상인들이 방콕의 도심에 모여 군부를 등에 업고 있는 아피싯 웨차치와 현 총리에게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실시할 것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이면서 촉발되었다. 시위대는 24시간 내에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실시하지 않으면 수일 내에 100만명이 참가하는 거국적 시위를 벌여 정부를 마비시키겠다는 최후 통첩을 보냈다. 이들은 또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불법 집권 세력을 피로 물들이는 시위를 무한정 계속하겠다고 경고했다.

정부는 시위대의 요구를 거부했다. 완전 무장한 5만명의 군·경은 주요 정부 청사와 시내 요소를 경비했다. 일부 군부대에 대한 수류탄 투척으로 부상자가 생기기는 했으나 유혈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부 청사의 하얀 문에 뿌려진 피는 이 사태가 유혈로 갈 수 있음을 예고했다. 친 탁신 세력인 ‘독재저항 민주주의 연합전선’(UDD) 대변인은 평화적 시위를 통해 독재자들이 탈취한 권력을 되찾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정부는 시위대의 요구는 거부하면서도 그들의 소리는 경청하겠다며 자중하는 모습이다. 임기를 2년 남긴 아피싯 총리는 현 의회의 임기가 종료되는 내년 말에는 총선을 실시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번 시위는 다음 총선에서 탁신을 권좌에 복귀시키기 위한 포석으로 보인다.

태국의 정치 위기는 5년 전 가난한 농민과 부유한 도시 엘리트 간 충돌로 시작되어 연례 행사처럼 되풀이된다. 태국의 갈등은 이념과 종족 문제는 개입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태국만의 특징을 내포하고 있다. 분쟁의 심저에는 빈부 격차로 생긴 상대적 박탈감이 자리하고 있다. 1997년 IMF 위기의 진원지가 되었던 태국은 꾸준한 경제 성장을 통해 1인당 국민 소득이 8천 달러에 이른다. 동남아 2위의 경제 부국으로 성장했다. 얼핏 보면 축하할 일이지만 이것이 불행의 씨앗이 되었다. 농민들은 성장의 과실이 도시 엘리트들에게 집중되고 농촌에는 아무것도 돌아온 것이 없다고 분개한다.

위기의 중심에는 언제나 탁신이 있다. 2001년부터 5년간 집권한 그는 집권 연장을 위해 농민들의 울분을 십분 활용했다. 그는 선거 때마다 농촌 지역 유권자의 몰표로 두 번이나 승리했다. 온갖 부패와 비리에 연루된 그가 가난한 농민의 우상이 된 것은 이율배반이다. 하지만 그가 농민들의 복지 향상을 위해 괄목할 노력을 한 것 또한 사실이다. 농민들은 부의 공정한 분배 외에도 정치 권력의 균점을 요구한다. 간단히 말해 태국의 위기는 부와 권력 분배를 둘러싼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나라의 정치 대립은 일명 ‘붉은 셔츠’와 ‘노란 셔츠’의 대결로 불리기도 한다. 농민들은 시위 때 붉은 셔츠를 입고, 도시 부유층은 노란 셔츠를 입기 때문이다.

부와 권력의 분배 둘러싼 농민과 도시 엘리트 간 투쟁

▲ 3월15일 아피싯 태국 총리(가운데)가 반정부 시위대의 공격을 피해 측근들의 보호를 받으며 걸어가고 있다. ⓒEPA

이번 위기의 씨앗은 지난 2월에 뿌려졌다. 태국 최고법원은 지난 2월26일 탁신의 재산 23억 달러 가운데 14억 달러를 몰수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가 총리 재임 중 권력을 이용해 자신이 소유한 통신회사에 특혜를 주었고, 가족 명의로 재산을 은닉해 탈세를 했다는 것이다. 탁신을 지지하는 세력은 즉각 반발했다. 2006년 쿠데타 후 해외로 망명한 탁신은 녹화된 성명을 통해 이 판결을 정치 탄압으로 규정하고 농민 세력에게 반정부 투쟁에 나서라고 촉구했다. 탁신은 재임 중 농민들의 의료비를 경감하고 저리 대출을 제공해 농민들의 인심을 얻었다. 농민들은 그를 은인으로 여긴다. 농민의 고충을 알아줄 사람은 탁신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탁신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른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아피싯 정부는 농민을 자극하는 실수를 범했다. 무식한 농민이나 고등 교육을 받은 도시의 엘리트가 선거에서 동등한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은 불공평하다며 이른바 엘리트들에게 더 많은 투표권을 주는 방향으로 헌법을 개정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것이 농민들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당시 즉각 대규모 시위가 일어날 줄 알았으나 탁신 세력은 3월 중순을 D-데이로 잡고 그동안 철저하게 준비해왔다. 해외에 망명 중인 탁신과의 협의가 필요했고, 시위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10만명의 시위를 조직하는 데는 대략 10억원 정도의 비용이 든다. 이 비용은 물론 탁신이 제공한다.

이번 시위는 탁신 세력을 고사시키려는 현 정부의 실책으로 촉발된 측면이 강하다. 그러나 2008년 8월의 시위는 탁신측이 유발했다. 그는 쿠데타로 퇴진하기 9개월 전 자기 소유의 통신회사 신(Shin)을 싱가포르 기업에 매각하고 세금은 한 푼도 내지 않았다. 그러자 도시 엘리트들이 들고 일어났다. 시위가 정치 위기로 비화하자 군부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러나 탁신 정부를 전복한 군부는 뒤이어 실시된 총선에는 개입하지 않았다. 총선에서는 탁신 당이 승리했다. 도시 부유층은 이를 용인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해 8월부터 반 탁신 시위를 시작해 11월까지 3개월 동안 계속했다. 시위대는 총리 공관 주변에 텐트촌을 세우고 정부 해산을 요구했다. 11월 하순에는 방콕의 두 공항을 2주간 점령해 수많은 여행자에게 고통을 주었다. 그해 12월 법원이 탁신 세력의 부정 선거 혐의를 인정하고 당의 해체를 선고한 후에야 시위는 끝났다. 이어 법원이 탁신을 기소해 2년 징역을 선고하자 탁신은 해외에서 암암리에 반 정부 시위를 준비했다. 

태국 정치 위기의 책임을 따진다면 탁신을 지지하는 농민이나 도시 엘리트의 지지를 받는 현 정부나 모두 면책이 될 수 없는 피장파장의 입장이다. 금요일 시위 당시 일부 방콕 시민들은 감정이 격한 상태에서 어떤 색깔의 셔츠도 입지 말자고 서로에게 당부했다. 이를 보고 태국 시민들이 이성을 찾고 있다고 판단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태국의 고질적 분열이 쉽게, 또는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체념이 대다수 국민을 지배하고 있다. 영어신문 네이션(Nation)의 한 칼럼니스트는 절망조로 한탄했다. “언제라도 충돌은 일어날 수 있다. 어떤 타협도 현재로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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