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초 룰은 정착, 클리닝 타임 폐지는 실패작
  • 박동희 | 스포츠춘추 기자 ()
  • 승인 2010.04.20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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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야구위원회가 마련한 경기 시간 촉진 방안이 가져온 그라운드의 변화

2010 프로야구는 ‘관중 본위의 야구’를 지향한다. 쉽게 말하면 ‘흥행 대박’을 꿈꾼다. 그래서일까. 한국야구위원회(KBO)는 올 시즌에 프로야구 역대 최다인 ‘6백50만 관중 돌파’를 목표로 잡았다. 이를 위해 KBO는 시즌 전부터 갖가지 관중 몰이 방안을 세웠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12초 룰 적용과 스트라이크존 확대, 클리닝 타임 폐지를 포함한 경기 시간 촉진 방안(스피드업)이다.

▲ 올 시즌부터 스트라이크존이 넓어져 많은 투수들이 혜택을 누릴 전망이다. 사진은 LG 트윈스 오상민 투수. ⓒ연합뉴스

 ■ 투수에게 적용시킨 촉진 룰, 대세에 큰 지장 주지는 않을 듯

“오상민 고의 지연, OK?” 4월9일 잠실에서 열린 두산-LG전에서 나광남 구심이 갑자기 경기를 중단시켰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LG 구원투수 오상민을 가리켰다. 영문을 몰라 당황하던 오상민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올 시즌부터 주자가 있을 때 투수가 타자 타이밍을 뺏는 고의 지연을 할 경우 구심은 타임 선언 후 첫 번째는 주의, 두 번째는 경고, 세 번째는 보크로 판정한다. 세트 포지션에서 공을 잡고 지나치게 시간을 끈 오상민이야말로 ‘딱’ 그런 경우였다.” 나구심의 설명이다.

올 시즌부터 KBO는 경기를 빠르게 진행하기 위해 ‘주자가 없을 때 투수는 12초 안에 공을 던져야 한다’라는 촉진 룰을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투수가 ‘주자가 있을 때는 12초 룰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주자가 있을 때 투수는 12초 안에 투구하지 않아도 된다. 피 말리는 접전에 시간 제약이 있다면 투구 메커니즘이 흔들리는 것은 당연할 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마냥 시간을 끌어서도 안 된다. 나구심의 설명대로 타자 타이밍을 빼앗을 요량으로 투구를 지연하거나 주자 아웃을 목적으로 하지 않은 명목상 견제는 ‘고의 지연’에 해당할 수 있다.

시즌 전만 해도 12초 룰과 고의 지연은 투수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규칙으로 여겨졌다. 왜냐하면 투수들이 12초 롤 때문에 쫓기듯 투구할 것이라는 예상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우였다. 시즌 전 삼성 선발 장원삼은 “웬만해서는 투수들이 12초를 넘지 않을 것이다”라고 예상했다. 결국, 그의 예상이 맞았다. 이유가 있다. 투수 대부분은 ‘투구 박자가 느리면 느릴수록 타자들의 집중력이 강해지는 반면 야수들의 집중도는 떨어진다’라고 믿는다. 따라서 가능한 한 투구 박자를 빨리한다. 실례로 오상민은 다음 날 두산전에서도 투구 박자를 느리게 하다가 호되게 당했다. 두산 3번 타자 이성열과 지나치게 오랫동안 승부를 겨루는 바람에 집중력이 떨어진 야수들이 어이없는 실책을 연발한 것이다.

 

▲ 2007년 인천 문학구장에서 열린 KIA 대 SK 경기 클리닝 타임에 이만수 SK 수석코치가 ‘만원 관중’ 답례로 팬티 차림으로 그라운드를 돌았다. ⓒ연합뉴스
 ■ ‘경차도 지나갈’ 스트라이크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 뚫기보다 어렵다.’ 옛말치고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하지만, 요즘 야구계에서는 예외이다. 낙타뿐만 아니라 경차도 바늘구멍을 뚫을 기세이다. 바뀐 스트라이크존을 두고 하는 말이다. 수도권 팀의 한 선수는 “바늘구멍만큼이나 좁았던 스트라이크존이 ‘확’ 넓어졌다. 지금 기세라면 경차도 지나다닐 정도이다”라고 주장했다.

KBO는 2009시즌이 끝난 직후 스트라이크존을 재설정했다. 타자들의 적극적인 타격을 유도해 경기 시간을 단축하자는 의도였다. 그렇다면 바뀐 스트라이크존을 대하는 선수들의 반응은 어떨까. 타자들은 한결같이 “현 스트라이크존에 불만이 많다”라고 털어놓는다. 타자들은 기존 스트라이크존에서 좌우로 공 반 개씩을 넓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공 한 개 이상이 넓어졌다고 주장한다.

국내 프로야구에서 최초로 개인 통산 1천2백개의 볼넷을 돌파한 삼성 양준혁은 자타가 공인하는 ‘선구안의 신(神)’이다. 심판들도 ‘양준혁 존’을 따로 둘 정도이다. 그런 양준혁도 바뀐 스트라이크존은 적응하기 어렵단다.

“심판마다, 이닝마다 수시로 스트라이크존이 바뀐다.” 양준혁이 털어놓는 고충이다. 양준혁은 “지금처럼 스트라이크존이 지나치게 넓으면 타자들이 치기 어렵다. 차라리 홈플레이트 자체를 넓히는 것이 낫다”라고 조언했다. 어디 양준혁뿐이겠는가. KBO 리그의 타자들이 똑같은 생각을 한다. 하지만, 양준혁이 제시하는 해결책은 다르다. 그는 심판을 비난하지 않는다. 시간을 기다릴 뿐이다. “스트라이크존은 심판마다 다르게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심판들이 자신의 스트라이크존을 한결같이 형성하는 것이다. 심판들이 얼마나 빨리 바뀐 스트라이크존에 적응하느냐에 따라 논란도 줄어들 것으로 본다.”

타자들의 불평과는 달리 투수들은 넓어진 스트라이크존을 적극적으로 환영한다. 장원삼은 “예전 같으면 볼이었을 공이 스트라이크로 판정 나고 있다. 볼 카운트 하나가 경기 자체를 바꿔놓을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틀린 말도 아니다. 지난해 장원삼은 볼카운트 ‘1스트라이크 2볼’에서 피안타율이 무려 6할이었다. 그러나 ‘2스트라이크 1볼’에서는 피안타율이 고작 2할3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야구계에서는 스트라이크존이 아무리 넓어져도 수혜는 제구가 좋은 A급 투수에게만 국한될 것으로 내다본다. 실제로도 그렇다. 각 팀의 1, 2선발급과 특급 마무리 투수들에게는 호재로 작용하고 있지만, 제구가 나빴던 그저 그런 투수들은 되레 공격적으로 나오는 타자들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있다. 누가 아니겠나. 바늘구멍이 톨게이트처럼 넓어져도 경차 운전자가 미숙하면 옆을 긁기 마련이다.

■ 5회 이후의 클리닝 타임 폐지… 부활 원하는 구단 많아

4월 초순이었다. 퓨쳐스리그(2군 리그)에서 희한한 장면이 벌어졌다. 주자 1, 2루에서 3루 선상을 타고 흐르는 2루타가 나왔는데 이를 페어 선언을 해야 할 3루심이 보이지 않았다. 양팀이 경기에 몰입하느라 깜빡했지만, 당시 구심은 흐르는 땀을 닦을 수 없었단다. 사연은 이렇다.

올 시즌 KBO는 경기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5회 이후 클리닝 타임을 폐지했다. 대신 3, 5, 7회가 끝날 때마다 간단히 구장을 정리하기로 했다. 문제는 클리닝 타임을 이용해 허겁지겁 화장실로 달려갔던 심판들이 이마저도 봉쇄되자 갈 길(?)을 잃었다는 것. 한 심판은 “경기 전에 생리 현상을 해결하지만, 설사 등 갑작스러운 변수가 닥치면 당해낼 재간이 없다. 당시 3루심이 화장실에 간 사이 경기가 진행되었고, 공교롭게 그쪽으로 타구가 갔다”라고 설명했다. 경기가 진행 중인 것을 알고 3루심은 깜짝 놀랐지만, 기지를 발휘해 자연스럽게 자기 자리로 찾아갔다고. 클리닝 타임 폐지로 고생하는 것은 심판만이 아니다. 방송 관계자들은 더하다. MBC ESPN의 한 베테랑 캐스터는 경기가 연장전에 들어서자 급히 화장실을 다녀왔다. 그러나 화장실이 붐비자 시간은 지체되었고 결국 허구연 해설위원이 혼자서 중계하는 웃지 못할 촌극을 연출했다.

많은 야구인과 구단 대부분은 클리닝 타임의 부활을 원한다. 특히나 구단이 그렇다. 한 구단 관계자는 “클리닝 타임은 경기 시간 촉진과는 전혀 무관하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관계자는 “클리닝 타임은 구장 정비 시간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관중을 위한 시간이다. 대개 관중은 이 시간을 활용해 간식을 사먹거나 화장실에 가고, 구단도 이때 다양한 이벤트를 펼친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니까 ‘스피드 업’이 궁극적으로 더 많은 관중을 불러 모으려는 마케팅의 일환이라면 진정한 마케팅 기회인 클리닝 타임의 폐지야말로 모순 가운데 모순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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