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변조되고 날인도 없었다
  • 이태진 | 서울대 명예교수·한국사 ()
  • 승인 2010.05.25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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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진 교수 기고 ‘한·일 병합 조약이 왜 무효인가’[上] / 국왕·대신들에 군사적 위협 가해 강제하기도

 

▲ ‘합방’이 되자 일본인들은 재빨리 경복궁 근정전에 일장기를 내걸고 주인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 뉴스뱅크

올해는 한·일 병합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지난 1910년 대한제국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병합된 이후 36년간 치욕스러운 식민 통치를 받아야 했다. 1945년 광복이 되었지만 식민 지배가 남긴 상처는 여전히 한·일 양국에 깊은 앙금으로 남아 있다. 지난 5월11일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와 와다 하루키 도쿄 대학 명예교수 등 한·일 양국의 지식인 2백14명은 ‘한·일 병합 조약은 무효이다’라는 내용의 공동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정작 우리들 가운데도 ‘왜 조약이 무효인가’에 대해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시사저널>은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의 기고를 통해 일제의 한국 강제 병합 조약이 왜 무효인지를 두 차례에 걸쳐 알아본다.

 

▲ ‘조일수호조규’에 대한 조선 국왕의 비준서. ‘대조선국 주상’이라는 직함을 쓰고 그 아래 날인했다. 러일전쟁 후 한국의 국권을 빼앗은 조약들도 이런 형태의 비준서가 있어야 했다. ⓒ일본 외교사료관 소장

 ① 조약 관계 수립 초기의 ‘온전한’ 조약들

국제법상 조약(Treaty)은 두 나라의 국가 원수가 각기 협상 대표를 선정해 그에게 전권위임장을 수여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즉, 위임장을 소지한 두 나라 대표는 합의한 장소에서 만나 서로 위임장을 보인 다음, 협상에 들어가 합의 결과를 조약문으로 작성해 각기의 직명, 이름을 쓰고 사인 또는 날인하는 순서를 밟는다. 그 다음에 국가 원수가 그 조약문을 받아보고 잘못된 것이 없다고 판단되면 비준서를 발부해 효력을 발생시킨다. 1648년 웨스트팔리아 조약에서 시작된 이러한 절차와 형식은 지금까지 국제 사회에서 그대로 준수되고 있다. 국교가 수립된 나라 사이에는 행정적 편의를 위해 주재 공사(legation)와 외무대신의 책임 아래 국가 원수의 비준서 발부를 생략하는 약식 조약(Agreement, Arrangement)을 체결할 수 있었다. 단, 이는 국권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의 사안에 한했다.  

▲ 1882년 8월7일자 임오군란 피해에 대한 조선 국왕의 사죄 국서의 어새 날인 부분. ⓒ 일본 외교사료관 소장
한국과 일본은 1876년 2월 ‘조일수호조규’의 체결로 조약에 의한 근대적 국교 관계를 맺었다. 흔히 강화도 조약으로 불리는 이 조약이 불평등 조약으로 알려진 것은 잘못이다. 이 조약 체결 당시 조선측은 일본측이 가져온 초안에 대해 최혜국 조관을 제외할 것을 요구하고, 나머지 12개 중 9개 조에 걸쳐 문안 수정과 용어 변경을 요구할 정도로 능동적이었다. 고종은 아버지 대원군과는 달리 개국·개화의 뜻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조약은 물론 양국 황제의 비준서 발부로서 효력을 발휘했다.<사진 1> 불평등 관계는 6년 뒤 대원군이 임오군란을 일으켰을 때, 일본측이 교관 피살과 공사관 소실에 대한 책임을 조선 정부에 물어 압박을 가하면서 생겼다. 이때 최혜국 조관이 들어가고 관세 자주권도 잃게 되었다.  

임오군란 후 일본은 제물포조약(1882), 세칙(稅則)에 관한 조약(1883) 그리고 갑신정변 후에는 한성조약(1886) 등의 체결을 요구했다. 이 조약들은 정식 조약의 요건을 모두 갖추었다. 제물포조약, 한성조약 등은 일본이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하여 사죄·사과의 뜻을 담은 조선 국왕의 국서(國書)로서 비준서에 대신했다.<사진 2>    

1880년대 일본과의 조약 관계는 이처럼 어느 것도 요건을 미달한 것이 없었다. 오히려 일본측이 요건 충족을 더 강하게 요구했다. 한성조약 체결 때 조선 대표(김홍집)가 위임장을 잊고 회담장에 오자 일본 대표(井上馨)는 이를 가져올 때까지 협상에 임하지 않았다. 일본의 이러한 ‘준법’ 태도는 한반도에 대한 청국의 절대적인 영향을 조금씩 밀어내는 외교 전략의 성과에 대한 법적 근거를 확실하게 해두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 정부 또한 외국과 체결한 조약의 충실한 이행을 추구했다. 각 조약들의 내용을 분류한 편람 형식의 <약장합편(約章合編)>을 여러 차례 편찬 간행해 실무자들이 이용하도록 했다. 이는 약소국으로서 조약 관계를 통해 독립국으로서의 입지를 확보해가려는 ‘성실 외교’의 모습으로, 일본과는 목적이 전혀 달랐다.

 

▲ ‘대조선 대일본 양국 맹약’. 군주의 비준서가 없는 강제 조약의 최초 사례이다. ⓒ일본 외교사료관 소장

② 청일전쟁 이후 달라지기 시작한 일본의 태도

일본은 1880년대 후반에 징병제를 확대 시행하면서 국가 예산의 7할을 군비 확장에 투입하기 시작했다. 청국과 결전을 벌여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제거하고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려는 포석이었다. 1894년 6월 초, 동학 농민군 진압을 구실로 청·일 양국의 군대가 조선에 동시 출병했다. 청군이 동학 농민군의 활동지와 가까운 아산만에 상륙한 반면, 일본군 1개 여단 8천여 병력은 인천을 거쳐 서울로 진입했다. 농민군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조선의 내정 개혁을 촉구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는 명백한 내정 간섭이자 주권 위협의 사태였다. 이 난입에 대해 군주와 정부는 강력히 항의했지만 막무가내였다.

일본군은 7월23일 새벽 0시30분에 1개 대대를 경복궁에 무단 진입시켜 왕을 감금하다시피 했다. 그리고 이틀 뒤 충남 성환 근처에 있는 청군을 공격해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일본군의 경복궁 침입은 1880년대 중·후반에 부산에서 서울, 서울에서 의주까지 시설한 전신선을 장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그 관리 총책인 조선 군주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경복궁 바로 앞에 있는 전신국을 장악했다. 첨단 통신 시설의 장악은 일본군이 승리하는 데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일본측은 이 침략의 만행을 은폐하기 위해 친일 내각을 구성해 국왕 몰래 외부대신과 ‘잠정합동조관’ ‘대조선 대일본 동맹’이라는 조약들을 체결했다.
<사진 3> 이것들은 군사적 협조에 관한 것으로 국권에 저촉되는 것이 분명한데도 약식을 취해 군주가 개입하는 것을 막았다. 약식 조약으로 조선의 국권을 위협하는 사태는 이때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왕비 살해라는 극악한 만행이 바로 뒤를 이었다.

일본 대본영(大本營)은 전쟁이 끝난 후 삼국 간섭으로 요동반도를 내놓게 되자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만은 고수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전신선 관리를 위한 1개 대대 병력 잔류를 결정했다. 이에 대해 조선 군주 고종은 완전 철수를 강하게 요구했다. 이에 대본영은 왕비를 살해하는 것으로 위협을 가했다. 이 만행은 대원군을 앞세워 새벽 4시까지 종결 지워 대원군이 한 것처럼 꾸며졌던 것인데, 시간 계획에 차질이 생겨 한 시간 반이나 늦게 동이 튼 뒤에 이루어지면서 일본인들이 주범이라는 것이 드러나 일본 정부는 궁지에 몰렸다.

 

▲ 러일전쟁과 동시에 강요된 ‘의정서’의 첫 장과 끝장. 앞부분에 위임 사실이 언급되고 마지막에 양국 대표의 서명 날인이 보인다. 비준서 없는 약식 조약이었다. ⓒ일본 외교사료관 소장

 

러일전쟁과 함께 벌어진 국권 탈취 사기극 

왕비 살해의 만행이 국제 사회에 폭로된 뒤, 일본은 한반도에서 손을 빼고 유일한 전리품인 타이완에 대한 식민 체제 구축에 집중했다. 고종은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난 틈을 타 경복궁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을 임시 거처로 삼고 국정 주도권을 회복해 대한제국을 출범시켰다. 청국이 패전으로 물러나고, 일본마저 움츠러든 상황은 대한제국에게 하나의 기회였다. 이때 미국 워싱턴D.C.를 모델로 한 서울 도시 개조 사업이 이루어져 서울 거리에 전차가 달렸다. 프랑스와 벨기에의 자본과 기술을 유치해 서북철도(서울~의주) 부설 공사가 시작되고, 지폐 발행을 위한 중앙은행 설립에 필요한 투자도 이들로부터 약속받았다.

 

영국이 1899년 금 본위제로 바꾼 뒤, 한국은 금광 개발에 많은 이점이 있어 유럽 자본가들의 관심을 끌었다. 대한제국의 근대화 사업은 일본 공사가 본국 정부에 한국의 변화를 보고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고종 황제는 영세중립국을 목표로 중립국 벨기에의 외교관들로부터 자문을 받으면서 적십자사 등 각종 국제 기구 가입을 서둘렀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방치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타이완 식민지 체제 구축 중에 러시아와 전쟁을 하기 위한 군비 확장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일본군의 최선발대가 이번에도 인천을 거쳐 서울로 진입했다. 10년 전에 미수에 그친 한국의 보호국화가 이 전쟁의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서울에 진입한 1개 사단 병력은 한국 주차군이라는 이름으로 상주하면서 조약 강제를 지원했다. 국권 관련 조약들은 시종 이 주차군의 무력 시위 아래 강요되었다.

러일전쟁 후, 일본은 한국에 5개 조약을 강요하면서 국권을 하나씩 앗아갔다. ①의정서(1904. 2.23) ②제1차 일·한 협약(1904. 8.22) ③제2차 일·한 협약(을사조약, 1905. 11.17) ④일·한 협약(1907. 7.24) ⑤한국 병합 조약(1910. 8. 22, 29) 등이다. 이 조약들 가운데 한국 황제의 비준서를 갖춘 것은 하나도 없다. 국권 관련 사항을 국가 원수의 의사 표명인 비준서가 없이 약식으로 취급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위법 행위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 정부는 강제로 이루어진 조약을 서구 열강에 알리는 과정에서 문서 변조 행위를 일삼았다. 일본은 개전과 동시에 ①을 내놓았다. 한반도의 여러 곳을 군사 기지로 사용하겠다는 것이었다. 한국 정부로서는 싫지만 제3조에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구절이 들어 있어 부득이 이를 허용했다. 8월 하순에는 일본 정부가 추천하는 재정고문, 외교고문을 받아들이라는 내용의 ②를 내놓았다. 이 협정은 ‘제1차 일·한 협약’이라고 불리지만, 실은 각서(memorandum)로서 제시된 것이었다. 제3항에는 한국 정부가 타국과 외교 관계를 가지게 될 때는 사전에 도쿄의 일본 정부와 상의해야 한다는 외교 간섭 조항까지 들어 있었다.

 

▲ ‘제1차 일·한 협약’으로 불리는 각서. 제목도 없고 대표 위임에 관한 언급도 보이지 않는다. ⓒ일본 외교사료관 소장

 

<사진 5>에서 보듯이 이 문건은 약식 조약에서도 반드시 밝히는 대표 선정과 위임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세 가지 요구 사항만 나열한 것이 내용의 전부였다. 이 문서는 조약의 형식을 취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국어본이 없다. 일본어로 작성된 것이 일본 외교사료관에만 소장되어 있다.

 

▲ ‘제1차 일·한 협약’의 영어 번역본. 원문에 없는 제목(Agreement)이 들어가 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②를 협조국인 영국·미국 정부에 알리기 위해 영어번역본을 만들면서 머리에 ‘Agreement’라는 단어를 집어넣었다.<사진 6> (* 당시는 영어 번역본 작성이 필수가 아니었다) 각서에 불과한 것을 조약으로 둔갑시키려 한 것이다. 각서는 ‘약속’ 사항이 당사국 간의 문제에 그치는 반면, 조약은 약식이라도 제3국과의 외교 관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영국, 미국 정부는 실제로 이 ‘Agreement’에 근거해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배타적 지배권을 묵인하는 제2차 영·일 동맹, 카스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했다. 국권 탈취를 노린 사기극이었다.      

 문서 변조 행위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05년 9월에 러일전쟁을 종결짓는 강화회의가 미국 포츠머스에서 열렸다. 그리고 일본 정부는 11월17일에 한국 정부에 대해 ③을 내놓았다. 한국의 외교권을 완전히 빼앗아 보호국으로 만들기 위한 조약이었다.

 

▲ 보호 조약인 ‘제2차 일·한 협약’ 첫 장과 끝장. 제목이 들어갈 첫 줄이 비어 있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이 조약문에는 제목이 들어갈 첫 줄이 비어 있다.<사진 7> 한국을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뜨린 조약이 제목이 없는 부실 문서라면 누가 믿겠는가? 영어 번역본에는 이 빈자리가 ‘Convention’이라는 단어로 채워졌다.<사진 8> 이 단어는 Treaty와 함께 정식 조약에 사용되는, 특히 보호 조약에 많이 쓰이는 용어였다. 한국의 황제와 대신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생긴 하자를 감추기 위해 또 문서 변조를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 ‘제2차 일·한 협약’의 영어 번역본. 원문에 없는 제목(Convention)이 들어가 있다.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위해 미국·영국으로부터 7억 엔에 달하는 거액의 차관을 얻고 있었다. 부실 조약의 결함이 노출되면 ‘문명국’의 반열에서 떨어져나와 채무국으로서 겪을 고초가 더 클 것이 뻔했다. 저들은 사후에 이런 결함을 은폐하기 위해 조약의 이름에 제1차, 제2차라는 차수를 붙이기도 했다. ‘제2차 일·한 협약’을 둘러싼 일본의 범법 행위는 이것이 모두가 아니었다. 국왕과 대신들에 대한 군사적 위협에 고종 황제 협상 지시설 유포 등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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