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노병’
  • 조홍래 | 편집위원 ()
  • 승인 2010.06.15 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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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병 중인 것으로 알려진 카스트로, 쿠바 기관지에 천안함 사건 관련 글 올려 추측 난무

 

▲ 6월4일 쿠바 가수 실비오 로드리게스가 카네기 홀에서 공연을 마친 뒤 관객의 박수에 화답해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AP연합

열네 살짜리 쿠바 소년이 1940년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다. 10달러짜리 지폐 한 장을 선물하라는 내용이었다. 이유는 각하를 존경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소년이 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인 피델 카스트로였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달러가 상징하는 부를 동경하며 혁명의 꿈을 키웠다. 드디어 1959년 32세의 나이에 친미 바스티스타 정권을 전복하고, 혁명에 성공해 49년을 집권했다. 1926년 8월생이니 올해 84세이다.

그는 쿠바사회주의공화국 창립을 선포하면서 “나는 권력에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인민의 복지를 위한 혁명을 완수하는 데 매진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오늘날 쿠바는 근로자 평균 임금이 16.70달러로 세계 최빈국에 속한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시도한 수차례의 암살 시도에서도 살아남은 카스트로도 세월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던지 2006년  ‘과도한 스트레스’로 위암에 걸렸다. 그는 성명을 통해, 복잡한 수술을 받고 몇 주간 휴식이 필요해 동생 라울 카스트로에게 잠정적으로 권력을 이양한다고 말했다. 성급한 서방 언론은 사실상 카스트로 시대의 종언을 예고했다.

그러나 그의 시대는 그로부터 2년 더 지속되었다. 2008년 2월 카스트로는 국가평의회 의장직을 동생에게 물려주고 정식으로 권좌에서 물러났다. 반백 년의 권좌에 대한 미련 때문인지 공산당 제1서기직은 유지했다. 세계는 마침내 카스트로의 퇴장을 확인하고 그를 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피그만 침공, 쿠바 미사일 위기를 조성하면서 집요하게 친소 반미 노선을 추구했었다. 그의 퇴장을 가장 반긴 것은 역설적으로 미국보다는 쿠바 국민이었다. 그가 하야하던 날 쿠바의 수도 하바나는 ‘쿠바 해방’의 축제장이 되었다. 이 무렵에 그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야 했다.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보다 잊으려는 사람이 훨씬 많은 세상이 왔다. 그가 신주처럼 신봉한 소련 사회주의는 붕괴되고, 유일 강대국 미국이 지배하는 21세기 다극 시대가 도래했다. 쿠바는 고립되고, 혁명의 열기는 식었다. 역사의 탁류와 함께 카스트로도 세인의 관심 밖으로 사라졌다.

그랬던 그가 다시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북한과의 오랜 유대 때문인지는 몰라도 천안함 사건을 두고 북한을 두둔하고 미국을 비난하는 주장을 했다. 천안함 침몰은 미군 특공대가 한반도 긴장을 고조시키고 일본 오키나와 미군 기지를 유지하기 위해 꾸민 음모라는 것이다. 그는 쿠바 공산당 기관지에 ‘제국과 거짓’이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글을 통해 이렇게 주장했다. 그가 직접 글을 작성했는지, 아니면 건재를 과시하기 위한 프로파간다(선동)인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그 배경을 두고 여러 가지 추측이 난무한다. 불치병에 걸려 죽어가면서도 끝내 미국을 비난한 어조로 보아서는 카스트로 냄새가 나지만, 그의 건강 회복을 확인하는 어떤 의학적 보도도 없다.   

카스트로의 건강에 관한 뉴스가 봇물을 이룬 것은 2007년 초였다. 베네수엘라의 위고 차베스는 그해 4월13일 AP통신과의 회견에서 카스트로가 건강을 거의 완전히 회복했다고 말했다. 그 무렵 쿠바 외무장관과 마침 쿠바를 방문한 중국 정치국원도 카스트로의 건강이 호전되었다고 전했다. 당 기관지는 카스트로가 외빈을 접견하는 사진을 게재하면서 상태가 이전보다 많이 좋아졌다는 설명을 곁들였다. 이 소식을 들은 부시 대통령은 “주님은 언젠가 카스트로를 데려갈 것이다”라고 말했다. 카스트로는 발끈했다. “부시의 암살 음모에서 살아남은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나는 신의 가호를 받는 몸이다”라고 응수했다.

2009년 1월 카스트로는 쿠바 국민들에게, 자신에 관한 뉴스가 없거나 건강이 악화되었다는 얘기가 들려도 절대 동요하지 말 것이며,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카스트로의 발언이나 그의 건강에 관한 뉴스는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이후 그가 뉴스를 탄 것은 천안함 발언이 처음이다.

 

▲ 쿠바의 항구 도시 시엔푸에고스에 있는 카밀로 시엔푸에고스 정유공장 입구에 카스트로의 대형 초상화가 걸려 있다. ⓒNEW YORK TIMES

 쿠바의 정세도 많이 바뀌어 카스트로 발언의 ‘배경’에 관심

카스트로의 건재 여부에 관계없이 쿠바는 변하고 있다. 동생 라울은 조심스러운 개혁을 예고했다. 여러 면에서 정부의 통제와 규제를 완화했다. 그러나 라울의 광신적 사회주의 노선을 아는 사람들은 과연 쿠바가 달라질까 의심한다. 한 시민은 ‘쿠바의 정치는 맹인을 관전자로 하는 스포츠 경기’라고 비유했다. 정부는 최근 일부 정치범들을 자택 부근에 있는 교도소로 이감했다고 교회 인사들이 전했다. 집과 교도소가 너무 멀어 면회가 힘들다는 가족들의 청원을 수용했다는 것이다. 정치범의 석방이 아니라 집에서 가까운 교도소로 옮겼다는 사실이 대단한 인권 신장 조치로 인식될 정도로 쿠바는 인권 사각지대에 있다. 대다수 반체제 인사들은 이 정도의 ‘은전’에도 감읍하는 분위기이다. 쿠바에는 현재 약 76명의 정치범들이 수용되어 있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쿠바에 전향적으로 접근했다. 50년 이상 계속되어온 일부 경제 제재를 완화했다. 또한, 쿠바 혁명을 가장 열광적으로 찬양한 싱어송라이터 실비오 로드리게스가 6월 중 미국 공연을 하도록 비자를 발급했다. 쿠바 연예인, 그것도 친카스트로 노선의 반미 가수가 미국 비자를 받기는 30년 만의 일이다. 지난해에는 미국 공연을 위해 비자를 신청했다가 오바마 행정부에 의해 거절당하자 오바마를 비난하는 글을 쿠바 국영 미디어에 배포하기도 했다. 미국 국무부는 당시 비자 거부는 신청 기간이 너무 촉박했기 때문이라고 해명했으나 로드리게스는 인종 차별이라고 비난했다.

카스트로가 맹주 노릇을 독점하던 중남미의 정치 지형도 상전벽해가 되었다. 베네수엘라와 브라질이 남미 외교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쿠바의 위상과 영향력은 소멸되었다. 역사의 탁류 속에 카스트로의 영화도 휩쓸려갔다. 왜 이 시점에서 카스트로가 언론에 등장했는지는 미지수이다. 흥미로운 것은 베네수엘라의 차베스가 제2의 카스트로를 꿈꾸면서 자신이 미국 제국주의에 맞서겠다고 나선 점이다. 최근 중남미에서는 ‘베네쿠바’(Venecuba)라는 신조어가 나왔다. 베네수엘라와 쿠바의 사회주의가 접목된 강력한 사회주의 연대를 만들어 미국 자본주의에 대항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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