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극장가, ‘스릴러 홍수’ 경보
  • 라제기 | 한국일보 문화부 기자 ()
  • 승인 2010.07.06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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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월 개봉되는 한국 영화들의 대부분 차지…지나친 쏠림 현상에 ‘제 살 깎아 먹기’ 우려

아마 올여름 한국 영화를 찾는 관객들은 손에 땀 좀 쥐게 될 듯하다. 1년 가운데 가장 큰 대목인 7~8월 극장가의 한국 영화가 거의 모두 스릴러이기 때문이다. 김명민이 주연한 <파괴된 사나이>
(1일 개봉)를 시작으로 <이끼>(15일)와 <악마를 보았다> <심야의 FM> 등이 줄이어 개봉한다. 공포 스릴러 간판을 내건 <고사 두 번째 이야기: 교생 실습>도 끼어 있다. 여름하면 공포영화를 떠올린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스릴러가 여름 극장가의 새 실력자로 자리 잡은 것이다. 각자 개성 어린 연출로 대박을 자신하지만, 관객들 입장에서는 골라 보는 재미가 줄어든 셈이다. 충무로 일각에서는 스릴러에 대한 지나친 쏠림 현상을 두고 ‘제 살 깎아 먹기’라는 지적도 나온다.

 

 

■ 넘치는 스릴러, 각양각색 호객 | <파괴된 사나이>가 선봉에 섰으나 영화팬들의 관심은 <이끼>와 <악마를 보았다>에 우선 쏠린다. 충무로 최고의 흥행술사 강우석 감독의 <이끼>는 동명 인기 만화를 스크린에 옮겨 기대감을 더 높여준다. 폐쇄적인 마을을 찾은 한 남자와 마을 사람들의 핏빛 갈등이 서스펜스를 만들어낸다. 유머와 긴장감을 뒤섞으며 힘 있게 이야기를 밀어붙이는 강감독의 뚝심이 관객들에게 적지 않은 재미를 줄 듯하다. 정재영·박해일·유해진·김상호·유선·유준상 등 외모보다 연기를 앞세운 배우들이 내뿜는 기도 만만치 않다.

<악마를 보았다>는 이병헌과 최민식의 조합만으로도 관객의 눈길을 채간다. 연쇄 살인마와 애인을 잃은 한 남자의 광기 어린 대결을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김지운 감독이 그려낸다. 최민식은 <친절한 금자씨> 이후 5년 만에 주류 상업영화에 출연한다. “표현 강도가 그 어느 한국 영화보다 세다”라는 소문이 충무로에 파다하다.

수애와 유지태가 주연한 <심야의 FM>은 라디오 생방송 프로그램을 이끌면서 어느 남자에게 인질로 잡힌 가족을 구해야 하는 여성 DJ의 사투를 담는다. 미술감독 출신이며 영화계 팔방미인으로 통하는 김상만 감독(<걸스카우트>)이 현장을 지휘했다. 유지태의 악마적인 면모가 흥행 포인트가 될 듯하다.

<고사 두 번째 이야기: 교생 실습>은 안방 극장에서 주목받은 황정음과 윤시윤의 스크린 나들이가 화제를 모으고 있지만, 전편의 성과를 재현할지는 미지수이다.

■ 관객은 골라보는 재미 줄어 | 비단 여름만 스릴러 천국이 아니다. 최근 충무로는 스릴러 공화국이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스릴러를 편애하고 있다. 지난 겨울 <용서는 없다>와 <평행이론> 등에 이어 <베스트셀러>와 <반가운 살인자> <하녀> 등의 스릴러가 봄 극장가를 장악했다. 여자배우가 구직난에 시달린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 정도로 충무로는 남성적 장르인 스릴러에 매진하고 있다. 다양한 장르의 한국 영화들을 즐기고 싶은 관객 입장에서는 달갑지만은 않은 현상이다.

스릴러가 충무로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계 관계자들의 분석은 엇갈리지만 ‘<추격자> 효과’를 꼽는 이들이 적지 않다. 2008년 5백만 관객을 불러 모은 <추격자>의 흥행 성공이 큰 자극이 되었다는 분석이다. <추격자>가 평단의 지지를 받은 점도 스릴러 붐의 한 요인이 되었다. 한 영화제작사 대표는 “스릴러는 상대적으로 적은 제작비가 들어가는 장르이다. 수익률이 높고 완성도도 있는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기대가 스릴러 영화를 양산하게 만들었다”라고 주장했다.

자극적이기 마련인 스릴러의 장르적 특성도 무시할 수 없다는 의견도 있다. 밍밍한 휴먼 스토리보다 납치, 살인 등의 강한 양념을 친 스릴러가 요즘 세태에 더욱 잘 들어맞는다는 것이다. 시나리오 속에 묻혀 빠른 시간에 옥석을 가려내야 하는 투자자 입장에서도 스릴러는 단번에 눈에 띄는 장르이다.

한 제작사 대표는 “시나리오를 1차 검토할 때 긴장감을 유발하거나 반전이 있는 내용에 관심이 갈 수 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영화평론가 정지욱씨는 “최근 스릴러 붐은 한국 영화계의 편식 현상을 다시 보여주는 것이다. 스릴러라는 장르를 이용해 불필요하게 선정적인 장면을 보여주는 것도 문제이다”라고 비판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연재되었던 인기 웹툰 <이끼>가 강우석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원작 <이끼>는 폐쇄된 마을의 권력 관계를 그린 스릴러로, 영화화가 알려진 초기부터 캐스팅에 관심이 모아졌다.   

 

캐스팅은 합격점이다. 아버지의 죽음에 의혹을 품고 마을의 비밀을 파고드는 류해국 역할은 원작자도 염두에 두고 그렸다는 박해일이 맡아 냉철하면서도 편집증적인 성격을 잘 표현해냈다. 속을 알 수 없는 음흉함과 수완을 지닌 이장 역할에는 정재영이 캐스팅되어 의외라는 우려를 불식하고 호연을 펼쳤다. 젊은 배우가 70대 노인 역할을 소화한 연기자의 공력도 대단하지만, 섬세한 분장술도 한몫했다. 조연들의 연기도 고루 좋다. 특히 2시간40분이라는 긴 상영 시간 내내 유지되는 긴장감에 조금씩 숨통을 틔우는 유머와 ‘미친 연기’의 진수를 보여준 유해진의 연기는 인상적이다.

영화는 원작의 음습한 느낌이 줄고, 직선적이고 대중적이다. 강우석 감독 특유의 강-강-강으로만 ‘샤우팅’되는 연출도 여전하다. 그 결과 선악의 경계가 뚜렷해지고, 페이소스는 약화되었다. 특히 베트남 전쟁의 살육을 속죄하고자 종교적 초월을 꿈꾸었으나 세속의 죄와 손잡게 된 아버지가 그저 억울하게 이용당한 성자(聖者)로 그려진 것과, 냉소적인 박검사가 정의롭기만 한 인물로 각색된 것은 원작의 깊이를 반감시킨다. 에필로그를 통해 부각시킨 여성 인물의 역할도 할리우드적 반전을 연상시킬 뿐, 영화의 리얼리티를 훼손한다. 원작의 마지막 컷은 마을 풍경을 광화문 일대의 항공 사진과 겹쳐놓음으로써 마을의 권력 작동 방식이 대한민국 전체에 해당되는 알레고리임을 시사하지만, 영화의 결말은 ‘뛰는 놈 위에 나는 X’으로 의미가 축소 봉합되기도 한다.

영화는 흥행하겠지만, ‘떡검-대한민국’에서 ‘정의로운 검사’의 활약을 관객 중 몇 퍼센트나 믿을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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