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키즈’들, 여자축구 날개가 되다
  • 배진경 | 스포탈코리아 기자 ()
  • 승인 2010.08.03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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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20 여자 월드컵’에서 사상 최초 4강 진출 ‘기염’…개인 기술·전술·감독 지략 어우러져 이룬 결실

 

▲ 최인철 20세 이하(U-20) 여자 축구대표팀 감독 ⓒ연합뉴스

태극 소녀들도 날았다. 20세 이하(U-20) 여자 축구대표팀이 ‘2010 국제축구연맹(FIFA) U-20 여자 월드컵’에서 비록 결승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4강에 진출하는 쾌거를 달성했다. 한 달 전 남아공에서 ‘오빠’들이 처음으로 원정 월드컵 16강 진출의 역사를 만들어낸 흥을 이어받아 한 발짝 더 나아갔다. FIFA가 주관하는 대회에서 여자축구가 4강 이상의 열매를 만들어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남녀를 통틀어도 세 번째에 불과한 기록이다. 비록 세계 정상을 향한 길목에서 독일에 패했지만, 세계 수준에 근접한 실력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결과였다.

과거 한국 여자축구는 중국, 북한이 버티고 있는 동아시아의 벽조차 넘지 못했다. 그러나 세계 무대로 나선 이번 대회에서는 스위스(4-0 승), 가나(4-2 승), 멕시코(3-1 승)를 압도하거나 미국(0-1 패)과 대등한 경기를 펼치는 등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보였다. 이는 최근 국제 무대에서 두드러지고 있는 한국 축구의 진보와도 맥을 같이한다. 남자축구의 경우 지난해 U-20 대표팀과 17세 이하(U-17) 대표팀이 나란히 연령별 월드컵에서 8강에 진출하는 역사를 만들어냈다.

흥미로운 것은 남녀 모두 더 이상 투혼이나 정신력만을 미덕으로 내세우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지난 대회들을 복기해보면 뛰어난 개인 기술과 전술, 감독의 지략이 어우러진 승부들이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한국 축구가 세계 강호들과 실력으로 정면 승부를 걸 수 있을 만큼 성장한 동력은 무엇일까.

■ 여자축구 ‘제3 세대’의 등장

1990년대에 태동한 여자축구는 현재까지도 그 토양과 환경이 척박하다. 2002 월드컵 유치를 앞두고 명분을 만들기 위해 대표팀부터 급조한 탓이다. 필드하키, 역도 등 다른 종목 국가대표 출신들이 ‘업종’을 변경하고 활약했던 것이 1세대 풍경이다. 2세대는 선배들이 은퇴할 즈음인 1990년대 중반부터 볼을 잡은 이들로 구성되었다. 1세대보다 이른 나이인 중·고교 시절부터 볼을 잡기는 했지만 스피드와 조직력이 가미되었을 뿐 기술적인 투박함은 여전했다. 이들을 거치고 나서야 이번에 4강 신화를 만들어낸 3세대가 등장했다. 1990년대에 태어난 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볼을 잡기 시작했다. 골격이 형성되기 전 볼을 다루기 시작한 덕에 축구에 최적화된 몸이 만들어졌고, 기본기가 탄탄하다. 본능에 가까운 ‘감각’도 탁월하게 발달했다. 윤종석 SBS스포츠 해설위원은 “여자 선수들의 경우 중학생 때부터 골반이 넓어지기 시작하는데, 초등학생 때부터 볼을 잡은 이들은 축구하기에 좋은 골격이 만들어진다. 볼 트래핑이나 기술에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라고 설명했다. 이들은 대부분 축구를 ‘좋아해서’ 시작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생계 유지를 위해 운동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던 이전 세대와 구분되는 지점이다. 때문에 기술 습득에 대한 열의가 높고 응용 능력도 뛰어나다. 전술 이해도 빠른 편이다. 이번 대회에서 맹활약하며 ‘지메시(지단과 메시를 섞어놓은 듯한 플레이로 인해 붙여진 별명)’로 각광받은 지소연(19·한양여대)이 대표적인 선수이다. 지소연은 지도자들 사이에서 스피드·시야·슈팅·패스·기술 등에서 성인 남자 선수를 능가하는 능력을 갖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축구협회 전임 지도자인 김종건 전 여자대표팀 코치는 지소연에 대해 “한마디로 축구 선수의 기본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다”라고 극찬했다.

■ ‘2002 월드컵 유산’의 눈부신 성장

또 다른 관점으로 보면 지소연은 이른바 ‘2002 키즈’를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2002 한·일월드컵을 통해 축구를 좋아하기 시작했고, 온 나라가 축구에 ‘미치는’ 경험을 체화한 세대이다. 이들은 스타플레이어를 동경하거나 그 인물에 자신을 투사하며 성장했다. 롤 모델이 구체적이기 때문에 발전 속도도 빨랐다. 지소연은 은퇴한 프랑스 축구 스타 지네딘 지단을 좋아한다고 한다. 고교 시절까지 지단의 플레이를 동영상 등으로 반복해서 즐겨보았던 그녀는 “지단 아저씨의 플레이를 보는 것이 너무 재밌다. 그 플레이를 배우고 싶어서 혼자서 많이 연습해본다. 패스플레이를 닮고 싶다”라고 말하곤 했다. 이번 대회에서 지소연이 보여준 플레이는 지단의 그것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이 세대에 대한축구협회의 집중적인 투자가 이루어졌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당시 축구협회는 2002 한·일월드컵 잉여금을 유소년축구와 여자축구에 투자하면서 장기적인 육성 의지를 보였다. 여자축구에도 유소년 상비군제를 도입해 U-12, U-13, U-16 등 연령별 대표를 운영하기 시작했고, 전임 강사를 투입해 체계적인 지도와 관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만들었다. 지소연을 비롯해 이번 U-20 대표팀 4강 주역으로 활약한 이현영(여주대), 김나래(여주대), 정혜인(현대제철)이 모두 이 시스템의 수혜자이다. 연령별 대표를 거치면서 연계성을 가진 덕에 그 어느 때보다 탄탄한 팀워크를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길게는 10년 가까이 호흡을 맞춘 멤버들이다. 남자축구도 마찬가지다. 유소년 상비군제는 물론이고 유망주 해외 유학 프로그램 등을 통해 조기에 해외 프로 무대를 경험해 볼 수 있는 환경도 만들어졌다. 석현준(아약스), 남태희(발랑시엔), 손흥민(함부르크) 등 차세대 기대주로 주목받고 있는 이들 모두 유소년 상비군 출신이거나 해외 유학 프로그램을 지원받은 경우이다.

 

▲ 이번 대회에서 7골을 넣으며 눈부신 활약을 펼쳐 ‘지메시’라는 별칭을 얻은 지소연 선수가 독일과의 4강전에서 돌파를 시도하고 있다. ⓒ연합뉴스

공부하는 젊은 지도자들

선수들만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지도자들도 빠른 속도로 성장과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과거 대표팀의 지휘봉은 스타플레이어 출신들의 전유물이었다. 자신의 성공을 뒷받침한 경험과 감만 고집하다 선수단과 마찰을 빚는 경우가 왕왕 발생했다.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다. 현장 경험과 이론으로 무장한 지도자들이 전면에 나서 한국 축구의 ‘체질 개선’에 힘을 쏟고 있다. 자비를 들여 남미와 유럽 등을 돌면서 세계 축구의 조류를 민감하게 체크하고, 일정 기간 해외 연수를 떠나는 지도자들이 많아졌다. 선진 축구에 대한 갈증을 ‘배움’으로 해갈하는 한편, 한국 축구의 현실을 직시하고 그 수준 차를 좁히는 것에 진지한 고민을 거듭하는 이들이다.

U-20 대표팀의 최인철 감독은 특별한 사명감까지 안고 있는 인물이다. 불모지나 다름없는 여자축구의 발전을 위해서는 세계와의 수준 차를 좁혀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이를 위해 기술과 전술 같은 기본 외에 명확한 목표 의식과 비전을 제시하며 선수들을 자극했다. 여자 선수들의 심리를 세심하게 관리하는 것으로도 정평이 나 있다. 최인철 감독과 초·중·고 동문인 윤종석 해설위원은 “경기장에서는 카리스마 넘치는 감독이지만 밖에서는 아버지처럼 선수들을 자상하게 살핀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가 되는 법이다. 선수들의 장단점을 명확하게 알고 있는 최감독이 상대와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향상시켜주면서 세계 수준에 근접한 팀을 만들었다”라고 말했다. 위대한 지도자 한 명의 열정이 한국 축구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낸 동력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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