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 같은 선악 대결 언제까지 봐야 하나
  • 하재근 | 대중문화평론가 ()
  • 승인 2010.08.23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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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드라마들, 작품성 고려 안 한 듯 극단적 대립 구도만 재생산해

 

▲ ⓒKBS 제공

요즘 주중 미니시리즈의 기본 구도가 천편일률적이다. 단순한 선악 구도나 막장 드라마적인 극단적 대립 구도, 혹은 1980년대 스타일의 냉전적 캐릭터를 묘사하는 것들로 점철되어 있다. 이렇게 단순한 구도만을 재생산하는 구조에서 한국 드라마의 질적 발전이나, ‘존경받는 한류’는 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먼저 시청률이 무려 40%를 훌쩍 넘은 <제빵왕 김탁구>를 보자. 이 드라마는 아무리 성인용이라고 해도 너무하다 싶은 극단적인 대립을 보여준다. 주인공 김탁구(윤시윤)는 ‘착한 사람이 승리한다’는 신념을 가진 순백의 인물이다. 그는 타인의 모든 잘못을 끌어안는다. 심지어 자신의 어머니를 사라지게 하고 자신의 10년을 앗아간 사람조차 순식간에 용서하고, 자신을 납치한 사람에게 복수하지 않으며, 자신의 눈을 멀게 했던 사람에게조차 웃음으로 대한다. 현실에 있지 않을 것처럼 극단적으로 착한 캐릭터이다.

반면에 악인은 비현실적으로 악랄하다. 서인숙(전인화)의 경우 표독함과 사악함, 뻔뻔함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폭력배까지 동원해 신유경(유진)을 능멸하고, 살인을 사주하며, 시어머니의 죽음을 방조할 정도로 냉혈적 인물이다. 

한실장(정성모)도 살인보다 더 악랄한 ‘강간 사주’를 통해 그 악명을 떨쳤다. 그의 악행은 드라마를 무법천지로 만든다. 마치 <아내의 유혹> 같은 작품에서 범법 행위가 밥 먹듯이 이루어지는 것과 비슷한 양상이다. 구마준(주원)은 상대를 돈으로 옭아매며 거짓을 일삼는 사악함을 보여준다.
<제빵왕 김탁구>에서는 이렇게 100% 착한 주인공과 100% 악한이 대립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한동안 월화드라마 시청률 1위였던 <동이>의 구도도 단순하다. 사악한 장희빈과 너무나 착한 동이의 대립이다. 애초에 <동이>는 사악한 장희빈이 아닌 새로운 장희빈을 보여주겠다고 했었다. 이병훈 PD의 전작인 <이산>이 리더십과 당쟁을 수준 높게 묘사했었기 때문에, 이번 <동이>에 대한 기대도 컸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연 <동이>는 <이산>보다도 훨씬 후퇴한 단순 구도를 보여주었다. 착한 주인공이 사악한 악당에 맞서 싸운다는 단순한 설정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새로울 것이라던 장희빈은 전형적인 악녀를 벗어나지 못했다. 시기심, 질투, 권력 의지 외에 아무런 미덕도 없는 캐릭터였다.

<동이>는 당쟁도 ‘나쁜 장희빈’ ‘착한 왕비’를 사이에 둔 권력 다툼 정도로 그렸다. 당쟁을 국가관과 정치관의 차이에서 비롯된 대립으로 그렸던
<이산>에서, 선악만 있는 동화의 세계로 퇴행한 것이다. 악인들은 악함 말고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하고, 선한 편도 착함 외에 이렇다 할 깊이를 보여주지 못한다.

최근 <동이>를 따라잡은 <자이언트>도 마찬가지다. 악의 화신 정보석과 정의의 사나이 이범수의 단순한 대립이다. 정보석은 일체의 선함이나 인간적 정서가 거세된 기계처럼 그려진다. 반면에 이범수는 인간적 뜨거움 그 자체이다. 너무나도 선명하고 단순한 대립이다.

요사이 새로 시작된 <나는 전설이다>도 그렇다. 주인공인 김정은은 동생과 친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착한 성격이다. 반면에 악역인 김승수는 인간적인 감정이 거의 없어 보이는 인물이다.

100% 착한 주인공과 100% 악한이 맞서 싸우는 설정…‘한류’에도 부정적 전망 안겨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주중 미니시리즈에서 선악 구도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 이것은 상업적 성공을 위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단순한 선악 구도가 대중에게 가장 친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은 작품들이 있었다. <선덕여왕> <추노> <파스타> <지붕 뚫고 하이킥> 등은 단순한 선악 구도에서 벗어나 찬사를 받았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흥행에서도 성공했다. 이것은 우리 대중이 꼭 선악 구도만을 원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대중은 잘 만든 작품이라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작진들도 좀 더 다양한 구도의 작품들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지금처럼 주중 미니시리즈에서마저 1차원적인 단순 구도가 반복되면 한국 드라마는 날로 획일화되고 질도 떨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처럼 이룩한 우리 드라마의 국제적 경쟁력도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다.

한류 드라마가 각국에서 인기를 끌고는 있지만 작품성에 대한 찬사가 나오는 경우는 드물다. 단지 상품성·대중성만을 인정받고 있을 뿐이다. 과거 홍콩 영화는 최고의 상품성을 인정받았었다. 하지만 작품성은 없었고, 흥행의 열기가 어느 사이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반면에 할리우드 영상물은 상품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인정받으며 문화적 패권을 누린다. 한류도 오래 가려면 ‘인기’에 더해 ‘존경’까지 받아야 한다. 그러려면 작품의 다양성과 질적 우수성이 필수이다. 방송사들의 책임감이 필요하다. 단순 구도에만 의지한 흥행은 장기적으로 우리 모두에게 독이 될 수 있다.  
 

▲ ⓒKBS
요사이 미니시리즈들 중 양대 구미호, 즉 <구미호 : 여우누이뎐>과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만이 선악 구도에서 벗어나 있다. 그것은 구미호에 대한 새로운 시각 때문이다.

구미호는 나쁜 괴물이다. 하지만 최근 드라마는 구미호를 나쁜 괴물이 아닌 불쌍하거나 특이한 존재로 그리고 있다. 그들은 인간과 다른 타자라서 인간과 충돌하기도 하고, 인간을 동경하기도 한다. 이 사이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가 펼쳐지게 된다.

 

이렇게 전통적인 괴물인 구미호를 인간과 병립하는 타자로 인정하고, 인간과 그들 간의 상호 작용에 집중하는 트렌드가 구미호 드라마를 선악 구도에서 벗어나게 한 것이다. 구미호까지 괴물에서 구원한 마당에, 멀쩡한 인간을 괴물로 그리는 선악 구도 열풍에는 문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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