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인 사찰 ‘배후’를 못 밝히나, 안 밝히나
  • 정락인 (freedom@sisapress.com)
  • 승인 2010.09.06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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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몸통’ 못 찾고 ‘깃털’들만 구속했다는 비난받아…정치권, ‘이인규-이영호-박영준-이상득’ 라인 주목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민간인 불법 사찰 배후는 누구일까. 검찰 수사가 종착점에 다다랐지만 사찰을 지시한 ‘윗선’은 여전히 안갯속이다. 이렇게 주변만 맴돈 지가 벌써 두 달째이다. 안 찾는 것인가, 아니면 못 찾는 것인가. 도대체 배후에는 누가 있기에 그런 것일까. 사건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검찰이 민간인 불법 사찰 수사에 착수한 것은 지난 7월5일이다. 6월21일에 열린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민주당 신건·이성남 의원은 “국무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이 이명박 대통령의 비방 동영상을 개인 블로그에 올린 일반 시민을 불법 사찰했다”라고 폭로했다. 5일 후에는 MBC <PD수첩>이 ‘대한민국 정부는 왜 나를 사찰했나?’ 편에서 김종익 전 KB한마음 대표의 사찰 의혹을 집중 조명했다.  

▲ 참여연대 회원들이 지난 7월7일 서울 종로구 정부종합청사 창성동 별관 앞에서 민간인 불법 사찰 사건과 관련해 조속한 진상 규명과 정부·여당이 국정조사를 수용할 것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시사저널 윤성호

총리실은 자체 조사를 거쳐 이인규 전 공직윤리지원관 등 4명을 직권 남용 등의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수사를 의뢰했다. 검찰은 ‘민간인 불법 사찰 특별수사팀’(팀장 오정돈 부장검사)을 구성했다. 그리고 7월9일에는 사상 처음으로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을 전격 압수수색했다. 검찰 수사가 속도를 내는 듯이 보였으나 컴퓨터 하드디스크 등 증거 자료들이 파손된 뒤였다. 지원관실은 또 자료를 삭제한 후 하드디스크를 외부로 빼돌렸고, 민간 전문가에게 맡겨 영구적으로 복구가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조직적으로 증거를 인멸한 것이다. 검찰은 민간 업체까지 동원해 복구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컴퓨터 보안업체의 한 간부는 “지원관실의 컴퓨터 데이터 삭제는 여러 가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선 검찰의 첨단 장비로도 복원이 안 되는 프로그램과 장비가 있다는 것을 외부에 알려준 일이 되었다. 향후 다른 범죄 피해자들도 이것을 답습할 가능성이 크다. 지원관실의 데이터 삭제에는 ‘이레이저’와 ‘디가우저’ 프로그램이 사용되었는데, 일반인들도 인터넷에서 데이터 삭제 프로그램을 얼마든지 구할 수가 있다”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검찰의 늑장 수사가 ‘증거 인멸’의 빌미를 주었다는 시각도 있다. 실제 검찰이 수사에 착수한 후 공직윤리지원관실 압수수색까지 걸린 기간은 4일이다. 이 기간은 핵심 증거를 없앨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검찰은 그동안 이인규 지원관 등 4명을 구속했지만 ‘몸통’은 찾지 못한 채 ‘깃털’만 건드리고 있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수사 늦어진 데 대해 “증거 인멸할 시간 벌어준 것 아니냐”

이 사건의 핵심은 ‘배후’를 밝히는 일이다. 하지만 검찰은 배후를 가늠할 수 있는 정황을 찾지 못하고 있다. 사찰 지시를 내린 사람이 누구이며 어디까지 개입했는지 말만 무성할 뿐이다. 실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사정 기관 출신의 한 민주당 의원 측근은 “민간인인 또 다른 한 기업인도 총리실의 사찰을 받았다. 그의 사찰은 세무와 관련된 소송을 진행하면서 불거져 나왔다. 하지만 이 사실이 알려지면 회사가 타격을 입을 것 같아 공개되는 것을 원하지 않고 있다”라고 전했다. 그는 또 “그들(공직윤리지원관실)이 소속 기관을 숨기거나 가명을 사용하면서 사찰에 나선 것을 보았을 때 피해자가 더 있을 것이다. 공직윤리지원관실에 대한 검찰 수사가 늦어진 것도 컴퓨터 하드디스크 삭제 등 증거를 인멸할 시간을 벌어준 것이 아니겠느냐. 이런 상황에서 검찰이 윗선을 밝힐 수도 없고, 밝히려는 의지도 없을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사건 초기 정치권과 언론은 일제히 박영준 당시 총리실 국무차장(현 지식경제부 2차관)을 배후로 지목했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공직윤리지원관실은 총리실 산하에 있지만 직제에는 드러나 있지 않았다. 사실상 총리실 내의 ‘비밀 조직’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휘 라인을 보면 공직윤리지원관실은 국무차장 산하로 되어 있었다. 박차관의 직접적인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셈이다. 이들의 조직과 운영 등은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공직윤리지원관실은 또 불법 사찰을 하면서 ‘가명’을 사용했다. 김종익 전 KB한마음 대표를 사찰할 당시에도 가명을 쓴 사실이 검찰 수사 과정에서 드러났다. 무늬만 국가 기관이었던 것이다.

또 하나는 이영호 당시 청와대 고용노동비서관의 연루 의혹이다. 검찰 수사 과정에서 이인규 지원관은 직제상 보고 라인이 아닌 이영호 비서관에게 ‘비선 보고’를 한 의혹이 제기되었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청와대의 지시로 움직인 총리실과는 별개의 조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박영준 차관, 이영호 전 비서관, 이인규 전 지원관의 인맥 관계가 남달랐다. 이 전 지원관과 이 전 비서관은 포항 출신들의 모임인 ‘영포회’ 회원이었고, 둘 다 박차관의 인맥으로 분류된 인물이었다. 특히 이영호 전 비서관은 지난 대선 때 박차관이 주도한 선진국민연대에서 활동했고, 대선 승리 후에는 인수위에 참여한 후 청와대에 들어갔다.

박차관을 중심으로 이영호 전 비서관과 이인규 전 지원관이 이러한 친분 관계로 엮여 있었던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박영준 차관이 민간인 사찰의 배후이거나 배후와 연결된 징검다리가 아니냐는 의혹을 받았던 것이다. 물론 박차관은 그동안 “나는 공직윤리지원관실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라며 억울함을 호소해왔다. 지금까지는 박차관이 직접 연루된 증거는 나오지 않고 있다. 구속된 이인규 전 지원관 등도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앞으로 핵심 증거가 나오지 않는 이상 ‘박영준 배후설’은 말 그대로 ‘설’로 끝날 공산이 크다.

▲ 한나라당 소장파 의원들이 민간인 불법 사찰 배후로 지목한 이상득 의원. ⓒ시사저널 이종현

야당, “특검 도입” 주장…중요 증거물 사라져 수사에 한계 있을 듯

그러나 검찰 수사와는 별개로 정치권에서의 ‘배후 논란’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당 수도권 소장파로 불리는 정두언·정태근·남경필 의원 등이 연일 포문을 열고 있다. 그동안 정두언·남경필 의원은 실명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민간인 사찰 배후로 ‘이상득 의원’을 암시하는 발언을 여러 번 했다. 그러다가 9월1일에 열린 한나라당 연찬회에서 정태근 의원이 이상득 의원의 실명을 직접 거론하며 ‘몸통’으로 지목했다. 정의원은 “이상득 의원이 청와대와 국가정보원에 의해 사찰이 이루어진 것을 알고 있었다”라고 주장했다. 정의원은 ‘고발’까지 언급하며 관련자들의 문책을 요구했다. 정두언·남경필 의원도 지원 사격에 나서 윗선을 밝히지 못하는 수사를 비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상득 의원을 민간인 사찰의 몸통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럴 만한 개연성과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기 때문이다.

검찰측은 “아직 수사가 중단되지 않았다. 누구에 의해 사찰이 이루어졌으며, 하드디스크 파기를 지시한 ‘윗선’이 있는지를 계속 수사하겠다”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인규 전 지원관과 진경락 전 기획총괄과장이 구속되면서 사실상 사건이 일단락된 것으로 보는 시각이 대체적이다.

검찰 수사가 답보 상태에 있는 가운데 민주당 등 야당은 ‘특별검사제 도입’을 주장하고 있다. 지난 8월12일 검찰의 ‘민간인 사찰’ 중간 수사 발표가 끝난 뒤 민주당 민주정책연구원이 성인 남녀 8백2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국민의 68.7%는 “국회 차원의 특검이나 국정조사가 필요하다”라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원책 변호사는 “총리실의 민간인 사찰은 총리조차 몰랐던 사안이다. 정부 조직 안에서 특정 세력들이 상하 관계 속에서 조직적으로 저지른 일이다. 이미 중요 증거물이 없어진 상황에서 검찰의 수사에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만약 윗선이 있다면 살아 있는 권력일 텐데 누가 함부로 건들려고 하겠나. 대통령이 직접 조사 지시를 내리지 않는 이상 특검을 해도 윗선을 밝히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시사저널 임준선

지금까지 민간인 불법 사찰로  인해 구속된 사람은 세 명이다. 이인규 전 공직윤리지원관(아래 사진 오른쪽)과 김충곤 전 점검1팀장 그리고 진경락 전 기획총괄 과장이다. 이지원관과 김 전 팀장은 김종익 전 KB한마음 대표를 불법 사찰하고 원청업체인 국민은행을 통해 그의 대표이사직 사임과 지분 양도를 강요한 혐의이다. 두 사람은 또 민간인과 민간 회사를 내사한 사실이 드러나 형법상 강요 외에 직권 남용 권리 행사 방해, 업무 방해, 방실 수색 등의 혐의도 적용되었다.

진경락 전 기획총괄과장은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무단 반출해 민간인 사찰 자료를 삭제한 혐의로 구속되었다. 진과장은 검찰 수사에 대비해 지원관실에서 사찰 관련 문건이 담긴 하드디스크를 몰래 들고 나와 외부 업체에 자료 삭제 작업을 맡긴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은 진 전 과장이 불법 사찰한 사실을 숨기려고 의도적으로 관련 자료를 파기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누군가 윗선에서 민간인 사찰 개입 여부를 은폐하려고 조직적으로 파기를 지시했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조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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