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사학 ‘쌍벽’의 파워 잇다
  • 이춘삼 | 편집위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0.09.27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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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획 시리즈 - 한국의 신 인맥 지도 | 게이오 대학 vs 와세다 대학

게이오(慶應義塾) 대학과 와세다(早稻田) 대학은 일본 사학의 양대 산맥으로 일컬어진다. 이 글에서는 편의상 설립 연도를 기준으로 게이오 대학을 앞에 언급하기로 한다. 또한 두 학교에서 수학한 한국 학생 가운데는 학부부터 다닌 경우가 있는가 하면 석·박사 과정으로 들어간 사람도 있고, 최고경영자 과정이나 방문 연구원(visiting scholar), 일반 연수로 다녀오는 등 다양한 형태가 있으므로 구분 없이 함께 소개하기로 한다.

게이오 대학은 메이지 유신 시대의 사상가이자 교육가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1858년 설립해 재작년에 개교 1백50주년을 맞았다. 후쿠자와 설립자는 그의 저서 <학문의 권장>에서 ‘하늘 아래에는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 그러나 현자우자(賢者愚者), 부자빈자, 신분이 높은 자와 낮은 자가 생긴다. 이는 배우느냐 안 배우느냐의 차이에 달렸다’라고 역설했다.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의 숙훈(塾訓)은 ‘독립 자존’이다. 후쿠자와는 일본 화폐의 최고액권인 1만 엔짜리 지폐에 초상이 실린 인물이다. 게이오 대학에 ‘선생’은 후쿠자와 한 사람뿐이다. 설립 초기에는 교수 이름 뒤에 ‘선생’ 대신 ‘군(君)’이라는 칭호를 썼다. 이는 ‘선생’은 후쿠자와 유키치뿐이라는 인식에 기인한 것이다.

같은 재단 내에 경응의숙 뉴욕학원 등 각급 학교를 두고 있는데, 그중 하나인 경응의숙 유치사(幼稚舍)는 우리의 초등학교 개념으로 1874년에 문을 열었다. 여기에 들어가면 게이오 중학교, 게이오 고등학교를 거쳐 게이오 대학까지 올라가게 된다. 유치사(일본어로 ‘요치샤’)는 도쿄 대학에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 해서 5~6세때부터 과외를 시킨다. 게이오의 학풍은 대체로 도시적·귀족적이라고 한다. 이른바 ‘게이오 보이’는 좋은 신랑감으로 꼽히기도 하는데 우리나라의 연세대 분위기가 이에 비견되기도 한다.

고이즈미 준이치로·하시모토 류타로 전 총리와 오자와 이치로 전 민주당 간사장이 게이오 대학 출신이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게이오 대학을 거친 인물로서 노백린 한성임시정부 군무부 총장,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쓴 염상섭 소설가, 김도연 전 의원이 있다.

한국과 게이오 대학의 인연은 구한말인 1881년에 맺어졌다. 당시 일본 신사유람단으로 파견된 유길준·윤치호 등이 계속 일본에 머무르며 게이오 대학에서 수학했다. 이것이 조선말 해외 유학의 출발이었다. 이후 1883년 당시 개화파 지도자였던 김옥균의 알선으로 서재필 등 60여 명의 유학생이 게이오 대학에 들어갔는데, 1894년 갑오경장 와중에 유학생 숫자는 2백명가량으로 늘어난다.

게이오 대학 한국 동창회는 1936년에 출범해 장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당시 대학 2학년생이었던 민병도씨(후에 한국은행 총재 역임)가 주도했다. 동창회는 일본인 국내 주재원 모임인 ‘서울 미타카이(三田會 : 三田은 도쿄의 게이오 대학 캠퍼스가 있는 지역 이름)’와 함께 매년 신년회, 춘계 야유회, 송년회 등의 친교 모임을 통해 우의를 다지고 정보 교류는 물론 비즈니스에서도 서로 힘을 보태고 있다. 현직 회장은 이일규 홀리데이인서울호텔 회장이 맡고 있다.

게이오 대학에서 연수한 언론인들 많아

게이오 대학 신문연구소는 현직 언론인에게 문호를 개방해 한국에서 많은 현역 기자가 방문 연구원 자격으로 이곳을 다녀왔고, 주일 특파원으로 부임하기 직전 학습하는 코스로 여겨지기도 했다. 이도형 한국논단 발행인, 박병윤 전 한국일보 대표이사 사장, 마실언 전 스포츠조선 전무, 문창재 전 한국일보 논설위원실장, 남영진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이사장, 방문신 SBS 정치부장, 이충일 조선일보 편집위원 말고도 많은 기자가 들른 곳이다.

오랜 기간 주일 특파원을 지낸 이도형 발행인은 19세기 말부터 1910년까지 일본과 한국에서 일어난 일을 있었던 그대로 대비시키는 글을 한국논단에 연재하고 있다. 한·일 강제 병합 100년을 맞은 올해 말까지 계속될 그의 글이 전하는 메시지는 ‘구한말의 모욕을 다시 당하지 않으려면 그때를 잘 알고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것이다. 선우정 조선일보 산업부 차장은 고 선우휘 조선일보 주필의 외아들로 도쿄 특파원을 지내면서 일본을 심층 분석하는 기사를 남겼다.

관계에 몸담고 있던 사람들이 게이오 대학에서 연구 활동을 한 경우도 드물지 않다. 정성진 전 법무부장관, 김석우 전 통일원 차관, 김종열 주투르크메니스탄 대사, 사부성 한국국제교류재단 교류이사, 이석연 전 법제처장, 조중표 전 국무총리실장, 추규호 주영국 대사 등이 게이오 대학 캠퍼스를 밟았다. 윤덕민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는 체신부장관을 지낸 고 윤흥정 예비역 육군 중장의 3남이다.

게이오 대학 비즈니스 스쿨(정식 명칭은 게이오 대학 대학원 경영관리연구과)은 국내 대기업의 2세 경영인들이 수학하는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서울대 경영학과를 나와 게이오 대학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은 최성원 광동제약 사장은 전설적인 세일즈맨으로 유명한 최수부 광동제약 회장의 아들이다. 김재철 동원산업 회장의 장남인 김남구 한국투자금융지주 대표는 게이오에서 MBA 공부를 했고, 전두환 전 대통령의 차남 전재용씨도 게이오 MBA 출신이다. 유민수 스위치코퍼레이션 대표는 아버지가 유상옥 코리아나화장품 대표이사 회장이고 형이 유학수 코리아나화장품 부사장이다.

▲ 와세다 대학 한국 동문회는 와세다 설립 100주년이 된 해를 기념해 한국 에밀레종을 축소한 종을 기증해 한국의 얼을 와세다 교정에 심으려 했으나 종각이 없어서 방치되어 있다. 와세다 대학 오쿠마 공원 안에 한종각(가운데)을 세워 2004년 3월17일 처음 타종했다. ⓒ와세다대학한국교우회 제공

와세다 대학은 1882년 재야 정치 지도자였던 오쿠마 시게노부(大重信)가 ‘도쿄 전문학교’라는 이름으로 세웠고, 1902년 설립자의 고향인 와세다 마을에서 이름을 따 와세다 대학으로 개칭되었다. 교훈은 ‘학문의 독립’이다. 가이후 도시키, 다케시다 노보루, 모리 요시로, 오부치 게이조, 후쿠다 야스오 등 많은 일본 총리를 배출했고 현대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도 이곳에서 수학했다.

와세다 대학 한국 교우회는 8·15 광복 후인 1947년 9월20일 창덕궁 비원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신익희 선생(제2대 국회의장)을 초대 회장으로 모셨다. 한국의 해외 유학생 동창회 중 오랜 역사와 규모를 자랑하며 2대 최두선 전 총리, 3대 김상만 전 고려중앙학원 이사장, 4대 이상돈 전 국회의원을 거쳐 현재의 5대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에 이른다. 조회장은 와세다 대학 한국교우장학재단 이사장을 겸하고 있다. 와세다 대학 한국 교우회는 홈페이지를 개설해 모교 소개와 입학 안내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일본 명문 사립대의 윗자리에 우뚝 선 와세다 대학은 일본 대기업들이 신입사원을 선발할 때 가장 선호한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보편타당한 인재’를 길러내는 곳으로 주목받아 왔다. 구미의 기술력이 도입되기 전까지 국내 산업계에서는 일본과의 교류에 힘썼기 때문에 재계의 유력 인사들 가운데 와세다 출신들이 상당히 많다.

거물급 재계 총수들 중에도 와세다 대학 출신 다수

우선 고 이병철 전 삼성 회장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대를 이어 와세다에서 수학했다. 또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 이동찬 코오롱그룹 명예회장,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도 와세다 출신이다. 고 이병철 회장은 1930년 경제학과에 유학했다가 세계 대공황의 소용돌이를 겪으며 학업을 중퇴하고 귀국해 사업을 시작했다.

여러 실력자가 탄생한 언양이 출생지인 신격호 회장의 경우에는 울산농림고를 졸업한 뒤 박봉의 월급쟁이 생활을 접고 20대 초반에 일본으로 건너가 신문과 우유 배달 등 닥치는 대로 잡일을 하며 와세다 대학 이학부 화공과를 마쳤다. 그는 대학을 졸업할 즈음 일본인 친구의 권유로 껌 만드는 일을 시작하며 제과업에 착안했다. 1967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본국에 투자를 본격화하면서 제과와 유통, 레저를 묶는 대기업의 초석을 닦았다. 아흔에 가까운 고령임에도 아직까지 일선 경영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지난 9월20일 모교인 와세다 대학으로부터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삼성을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켰고,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국제 사회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서다. 그는 1965년 정치경제학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이건희 회장이나 조석래 회장의 자녀는 모두 아버지와는 다르게 게이오 대학을 다녔다. 이건희 회장의 장남인 이재용 부사장이 게이오 대학에서 경영관리연구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딸 이서현 제일모직 전무가 미국 파슨스 디자인스쿨을 마친 후 게이오 대학에서 어학 연수를 했다.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의 장남인 조현준 효성 부사장은 게이오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와세다 대학은 한국의 고려대와 인연이 깊다. 양교는 정례적인 교류 사업을 통해 친선 우의를 다져나가고 있으며 친분 또한 두텁다. 그런 관계로 고려대 관련 인사들에게 와세다 대학은 명예박사 학위를 폭넓게 수여하고 있다. 어윤대 KB금융지주 회장이나 이기수 고려대 총장, 구두회 예스코 명예회장, 김정배 고려중앙학원 이사장이 와세다 명예박사 수여자이다.

와세다 대학 출신 중에서 특히 눈에 띄는 인물로 강상중 도쿄 대학 교수, 문선명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총재(전 통일교 교주), 박종구 삼구 대표이사 회장(제26·27대 고려대 교우회장), 백석주 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육군 대장)이 있는데 백대장은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처럼 와세다 대학을 마친 후 육사를 거쳐 군문에 들어선 경우이다.

강상중 도쿄 대학 교수는 규슈 구마모토 현 출신의 재일동포 2세이다. ‘나가노 데쯔오’ 대신 ‘강상중’이라는 이름으로 도쿄 대학 교수가 된 그는, 일본 우파 그룹에 맞서 재일동포들의 권익을 대변해 ‘싸우는 리버럴리스트’로 불린다. 경상도 출신인 그의 부모는 1931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대학 재학 시절 한국을 찾은 뒤 일본 이름을 버리고 본명을 쓰기 시작했다. 강교수는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한 뒤 정치학 박사 과정을 마쳤다. 서독에서 유학하면서 독일식 합리주의를 정치 철학으로 삼았다. 인권과 소수자를 보호하는 데 앞장서는 진보 성향의 학자이지만 이념과 당파에 치우침 없이 중도를 걸었다. 

김종량 한양대 총장은 김연준 창학자의 아들로서 연세대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콜럼비아 대학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세계 여러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와세다 대학 명예교육학 박사이다. 한양대 사범대학 교수를 시작으로 여러 보직을 거쳐 1993년 제8대 한양대 총장에 취임한 이래 현 12대까지 17년간 5연임하며, 학교를 조용한 가운데 알차게 이끌어가고 있다는 평을 듣는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끌려간 조선 도공의 후예인 심수관 일가는 규슈 가고시마 히오키에 거주하며 조선 도공의 맥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그 후예인 사쯔마야키 제14대 심수관과 15대 심수관(본명 심일휘)이 각기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와 교육학부를 마쳤다.

임창욱 대상그룹 회장은 한양대 화공과를 거쳐 와세다 대학 대학원을 수료했고, 동생인 임성욱 세원그룹 회장은 연세대를 졸업하고 게이오 대학에서 경영관리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작고한 와세다 동문 중에는 고하 송진우 선생, 김성수 고려대 설립자, 반공 검사 오제도씨, 윤치영 전 내무부장관, 권오병 전 문교부장관, 권중돈 전 국방부장관, 황낙주 전 국회의장, 유진산 전 국회의원, 무애 양주동 박사, 사학자 이병도·이기백 선생이 있다. 문인으로는 안수길·이은상·김광섭·유주현·이병주·황순원 선생이 있다. 또, 이동욱 전 동아일보 회장, 유건호 전 조선일보 부사장, 김상홍 전 삼양사 명예회장, 유특한 전 유유산업 명예회장, 신덕균 전 동방유량 회장, 국쾌남 전 대한극장 사장 등도 와세다에서 유학했다.

와세다 대학과 게이오 대학에서는 현재 연세대와 고려대 사이에 열리는 축제인 연고전(고연전)의 모델이 된 소케이센(早慶戰)이 정기적으로 열려왔다. 이 소케이센은 1903년에 처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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