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자축구, 아직도 어두운 밤…”
  • 김진령 (jy@sisapress.com)
  • 승인 2010.10.04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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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축구 1세대’ 임은주 아시아축구연맹 심판위원 인터뷰 / “선수·지도자 빼고는 모두 반성해야”

 

ⓒ시사저널 전영기

여자축구에 기적이 일어났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고,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았는데 한국 시간으로 9월26일 이른 아침, 대한민국의 17세 이하 여자축구팀 선수들은 스스로에게만 의지해 세계 정상에 올랐다. 17세 이하 대표팀 선수들을 ‘비인기 종목의 선머슴 애’로 인식하던 대다수 국민은 이제 그들을 ‘영웅’으로 부르며 폭풍 같은 관심을 쏟아내고 있다. 문제는 이런 ‘관심’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국 여자축구 대표팀 창단 멤버이자, 국내 최초의 여성 국제심판으로 여자축구 1세대의 간판인 임은주 아시아축구연맹 심판위원으로부터 ‘아직도 어둠 속을 걷고 있는’ 한국 여자축구 이야기를 들었다.

▶U20에 이어 U17까지 여자축구가 상승세를 타고 있다.

암흑 속을 걷다가 갑자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맨땅에 헤딩한 선수와 지도자의 공이다. 협회나 축구계 어른들은 창피한 줄 알아야 한다. 지금 한국 여자축구는 초·중·고와 대학, 실업 선수까지 다 합쳐도 1천4백명에 불과하다. 이들이 기적을 이룬 것 외에는 아무것도 준비된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갑자기 U17 대표팀 세대만 폭발적으로 기량이 성장한 이유가 있나?

잠재력의 폭발이다. 이 친구들은 2002년 월드컵 세대이다. 월드컵을 보고 축구가 좋아서 입문한 친구들이다. 외국 프로리그 시청도 쉽게 하고, 해외 명문팀 방한도 잦고 그러면서 유명 선수의 플레이도 실시간으로 접하며 축구에 빠져든 세대이다. 게다가 요즘은 지도자들이 개인의 능력을 강조하면서 아이들의 개성을 키워주니까 개인의 능력이 맥시멈으로 커진 듯하다.

▶갑자기 우승한 비결이 있나? 

나에게도 많이 물어본다. 우승하게 된 비결이 무엇이냐고. 열악한 여자축구 상황에서 비결이 따로 있을 수 없다. 선수들의 열의와 지도자의 헌신, 이것 빼고는 없다. 성적이 안 좋을 때는 서로 책임을 떠넘기기 바쁘더니 갑자기 기적 같은 성적이 나니까 이 말 저 말 하면서 등장하는 이들이 많다. 지금 선수와 지도자를 뺀 나머지는 반성과 격려를 할 시간이다.

▶그래도 협회에서 훈련을 하고 준비를 하게 도와준 것 아닌가?

물론 축구협회도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아시아연맹의 지원 덕이 크다. 언제 국내에서 여자축구를 위해 해외팀 초청 경기라도 열어줘본 적이 있나? 없다. 반면 아시아연맹에서는 17세팀과 20세팀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해주었다. 한국·중국·일본·호주 등 아시아 여자축구 강국끼리 경기를 통해서 경쟁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짰다. 우리 팀이 해외 경험을 쌓을 수 있었던 것도 이미 강팀으로 올라서 있는 중국과 일본, 북한과 해외 경기를 해본 경험 덕이다.

▶이번 우승으로 여자축구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일회성 관심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때문에 여자대표팀이 연속적으로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이 필요하다. 17세팀의 성적이 20세팀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대표팀 성적으로 이어지는…. 당장은 오는 11월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좋은 성적을 올려 축구 붐을 지속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여자축구의 상황이 얼마만큼 열악한가?

희망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번에 좋은 성적을 낸 17세 대표팀이 향후 3~4년간 잘 자랄 수 있도록 협회의 시스템이 뒷받침해준다면 다음 20세 월드컵에서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고, 2015년 세계여자월드컵도 기대할 수 있다. 지금 세계의 여러 나라는 17세 대회에서 우승한 우리를 궁금해한다. 우리 안에 뭐가 있나? 이런 척박한 환경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 이제라도 시스템을 정비하고 제대로 된 준비를 해야 한다.

 

▲ 임은주 국제심판이 서울 홍익대학교 내 운동장에서 포즈를 취했다. ⓒ시사저널 전영기

▶향후 우리 여자대표팀의 성적을 기대해볼 만한가?

북한팀이 우리의 반면교사이다. 북한팀은 우리보다 앞서서 17세팀이 우승도 하고 이번에도 4위를 하는 등 좋은 성적을 냈지만 북한 여자 성인팀을 세계 최고라고 말할 수 없다. 왜 청소년팀은 끊임없이 좋은 성적을 내는데 성인팀은 성적을 못 낼까? 그것이 우리의 숙제이다. 그들이 보여준 그런 과정을 우리는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17세팀에서 20세팀으로, 대표팀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좋은 지도자가 선수들의 기량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선수 발굴도 중요하지만 선수 양성과 그를 위한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

▶엘리트 스포츠 양성 제도와 어린 선수들의 학업 병행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는데.

공부하는 선수를 키우자고 하는데 현실성에서 의문이 든다. 운동량은 줄이지 않으면서 운동선수가 낮에 다른 아이와 똑같이 수업에 집중할 수 있나? 지금 위에서 선수 합숙소를 없애라고 하니까 지도자는 사비를 들여서 학교 밖에다 숙소를 만들고 있다. 이런 현상은 기형적이다. 더 많은 돈이 들어가고 학부모는 돈을 더 내야 하고, 실질적으로 학생 선수의 합숙소 생활은 계속되고…. 엘리트 스포츠 시스템에 대해 근본적인 고민을 해야 한다. 이웃 일본에서는 엘리트 시스템을 버리고 사회체육으로 전환했다가 다시 엘리트 시스템으로 돌아오고 있다. 엘리트 시스템과 일반 사회체육 시스템을 조화시키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누구든 원하는 스포츠를 할 수 있고, 잘하면 국가대표 선수가 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언제 축구에 입문했나?

내가 고등학교·대학 때는 필드하키 선수였다. 이화여대 대학원에 진학하던 1990년 5월에 베이징 아시안게임을 대비해 국가대표 여자팀이 창단되었다. 그해 하반기에 이화여대와 숙명여대에 대학팀이 생기고 서울대 동호회 팀, 강일여고 팀이 창단되었다. 당시 실업팀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국가대표 생활로 축구 활동을 했다. 이대에서는 1년 정도만 선수로 뛰고 바로 코치가 되었다. 당시 감독님이 그만두는 바람에….

▶최초 여성 국제심판인데.

심판 생활은 1994년부터 했다. 심판이 되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학생들에게 정확한 경기 규칙을 가르치려고 심판 교육을 신청했다. 그것이 여자 최초의 심판 교육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여자축구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에 한국 여자축구팀이 참여했고 그해 미국에서 여자월드컵이 열렸는데, 이를 텔레비전에서 중계하면서 많은 사람이 여자축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이 여자축구도 남자축구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스포츠의 성별 장벽이 사라졌고,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이 바뀌기 시작했다. 

▶특별히 한국 여성이 축구를 잘할 만한 이유가 있나?

핸드볼이나 배구, 농구 등 구기 종목을 보라. 여자팀의 국제 경기 성적이 더 좋다. 그만큼 대한민국 여성 스포츠인의 체력이나 정신력, 지능은 국제적인 경쟁력이 있다. 

▶축구가 직업인가?

내 생계형 직업은 사업이다. 스포츠가 아닌 쪽이다. 축구는 아시아연맹 일에 관여하면서 하는, 일종의 취미 생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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