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놀다간 중·장년들, 예능판을 확 바꿨네
  • 정덕현│대중문화평론가 ()
  • 승인 2011.01.24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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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러와> ‘세시봉 특집’ 성공 이후 출연진 연령대 급상승

 

▲ MBC ⓒMBC 제공

개발 시대로 상정되는 1970년대는 문화적으로 암울한 시기였다. 그래도 청춘들의 턱턱 막힌 숨을 뚫어주는 공간이 있었으니, 그곳이 바로 ‘세시봉’이다. 약간의 입장료를 내면 하루종일 음악을 들으며 세상의 시름을 잠시 잊을 수 있던 곳. 음악감상실이자 살롱 같은 청춘들의 문화 아지트. 당대 세시봉을 이끌던 가수는 조영남, 윤형주, 송창식, 김세환 같은 인물들이다. 그런데 이제는 빛바랜 추억이 되어가는 이 ‘세시봉’이라는 이름이 갑자기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놀러와>라는 토크쇼에서였다. ‘세시봉 특집’으로 마련된 토크쇼에서 이들은 세월의 연륜이 녹아든 거침없는 토크로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이로써 <놀러와>는 최고의 시청률을 거둔 것은 물론이고, 엄청난 호평을 얻었다. 그리고 이 성공은 예능에서 중년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도대체 ‘세시봉 친구들’이 출연한 <놀러와>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던 걸까.

‘세시봉 특집’이 성공한 데에는 그저 복고와 향수로 치부할 수 없는 분명한 요인이 존재했다. 그 첫 번째는 이들의 거침없는 입담이다. 사실 중년들이 하는 토크는 다소 강하다 하더라도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다. 그네들이 갖고 있는 연륜과 경륜이 그 강한 토크 속에서도 어느 정도 묻어나기 때문이다. 강한 토크이지만 듣다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삶의 무게감. 이것은 기존 토크쇼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매번 똑같은 아이돌이나 개그맨 혹은 늘 보던 얼굴이 등장해 치부라도 드러내며 자극적인 이야기를 터뜨리는 것과는 전혀 다른 ‘들을 만한 이야기’가 거기에는 있었다. 어찌 보면 토크쇼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것, 하지만 작금의 토크쇼에서는 잘 찾아보기 힘든 것 말이다.

그리고 이 거침없는 이야기 위에 얹어진 노래는 한밤의 토크쇼에 어떤 정서적인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조영남을 과녁으로 윤형주와 송창식, 김세환이 마구 화살을 쏟아부었지만, 그런 다소 독한 말에도 허허 웃다가 갑자기 누군가 즉흥적으로 노래를 하게 되면 일제히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악기를 들고 화음을 맞추는 장면은 오히려 감동을 주었다. 이들의 거침없는 이야기는 하모니와 연결되면서 이제는 마치 제 몸처럼 편안해진 이들의 관계로 탈바꿈했다. 화음이 깃든 아날로그적인 음악은 듣고 있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세대를 넘어서 누구나 공감하게 되는 그 시간을 이 중년 아저씨들의 마법 같은 하모니가 만들어낸 것이다.

‘세시봉 특집’을 통해 여기 출연했던 조영남,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은 모두 새롭게 재조명되었다. 특히 ‘세시봉 특집’으로 조명받은 조영남은 토크쇼 게스트의 블루칩이 되었다. 그는 <밤이면 밤마다> 2회에 이경실과 함께 출연했고, 역시 ‘세시봉’ 효과로 이장희가 <무릎 팍 도사>에 출연했을 때 동반 출연했다. 올해에도 <놀러와>는 아직 출연하지는 않았지만 보고 싶은 ‘세시봉’ 친구들(예를 들어 김민기, 서유석, 양희은, 김도향, 어니언스 등)의 특집을 준비한다는 소문이 들려온다.

지난해부터 ‘중년의 재발견’ 시작돼

기획 섭외로 승부수를 띄우는 <놀러와>는 이 성공을 통해서 중·장년층을 의식하는 모양새이다. 그 후에 출연한 게스트를 보면, ‘성우 특집’에 출연한 배한성, 양지운, 박일 등과 ‘트로트 특집’에 출연한 남진, 송대관, ‘나쁜 아저씨 특집’에 출연한 최정우, 김학철, 김병옥, 손병호, 윤제문, 임형준 그리고 ‘바쁜 아저씨 특집’에 출연한 이한위, 정보석, 조재현 등등. 섭외에서 그 연령대가 상당히 높아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동안 예능에 잘 출연하지 않았던 중년들을 카테고리화함으로써 추억도 되살리고, 늘 보아왔던 얼굴들의 식상함을 벗어나려는 의도이다.

그런데 이 ‘세시봉 효과’가 말해주는 의미는 단지 세시봉 친구들에게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데 있다. 지난해 예능에서 가장 큰 변화 가운데 하나를 꼽는다면 아마도 ‘중년 남자의 재발견’이 될 것이다. 지난해 <남자의 자격>이 촉발시킨 이 중년 남자, 즉 아저씨의 부활은 이경규가 방송 연예대상을 타는 것으로 확실한 징표를 남겼고, 우리는 때로는 안쓰럽고, 때로는 귀엽기까지 한 아저씨들을 재발견하게 되었다. 물론 이런 변화는 아예 본격적으로 중년 남자를 예능의 한가운데에 세운 이경규뿐만 아니라, 강호동이나 유재석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강호동의 초창기 <1박2일>은 야생과 복불복으로 점철되어 젊은 층의 호응을 먼저 이끌어냈던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유재석의 <무한도전>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2010년도까지 이어오면서 이들 리얼 버라이어티쇼는 중·장년층까지를 끌어들이려는 노력을 보였다. <1박2일>은 여행이라는 아이템이 가진 다차원적인 의미를 찾기 시작했고(최근 방영된 외국인 노동자 특집은 확실히 의미가 돋보인 기획이었다), <무한도전> 역시 가진 힘만큼의 사회적 책무를 저버리지 않는 기획(예를 들어 뉴욕 전광판에 한국을 홍보하는 것 같은)으로 소구층을 넓혀나갔다. 즉, 중년이 어느새 예능 속으로 깊게 들어와 있었다는 얘기이다. 이것은 <남자의 자격>에 상을 안겨준 KBS는 물론이고, <무한도전>이 아니라 <놀러와>와 <세바퀴>에 상을 준 MBC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이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중년의 부활은, 신생 예능으로 <추억이 빛나는 밤에> 같은 아예 중년을 타깃으로 삼은 프로그램이 생겼다는 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추억이 빛나는 밤에>의 첫 번째 게스트로 출연한 노주현과 이영하는 이 대결 구도의 토크쇼를 통해 30년 절친만이 가능할 법한 토크를 끄집어냈다. 노주현이 찍었던 속옷 광고를 보고 이영하가 “형님은 팬티 광고까지 찍었슈?” 하고 놀리자, 노주현은 “너는 찍지도 못했잖아. 근데 너는 팬티만 입고 여배우랑 영화 잘 찍더라” 하고 되받아치는 식이다. 또 “작품을 통해 만난 여배우 사이에 어떤 감정이 생길 수밖에 없다”라고 말하는 이영하의 이야기는 다소 자극적이지만 오히려 진솔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세시봉 효과’가 상징하는 것처럼, 지금 예능 프로그램들은 중년이라는 새로운 금광을 발견하고는 어떤 형식으로 그것을 담아내야 젊은 층에게까지 소통할 수 있는지를 고민 중이다. 이렇게 된 데는 아마도 중년이 점점 대중문화의 주 소비층으로 부상하고 있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현재의 토크쇼가 리얼 토크쇼 이후에 막말과 폭로로 얼룩진 자극의 늪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솔직한 얘기와 노래 등으로 감성적으로 공감하면서도, 그 안에서 어떤 삶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는 그런 토크쇼를 대중들은 요구하고 있다. 어딘지 뒷방 취급받던 중년에 대한 재조명은 바로 이들이 대중문화의 중심으로서 충분한 자격을 얻고 있다는 것을 에둘러 말해준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이 땅의 중년들에게 던지는 희망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세시봉’이 어떤 곳이었기에…

‘세시봉’은 한마디로 음악감상실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단지 이 호칭 하나만으로 정의되기 어려운 것은, 그 틀을 벗어나는 다양한 젊은이의 문화 이벤트를 그곳이 주도했기 때문이다. 커피 한 잔으로 팝음악에 빠져들 수 있었던 그곳에서는 대학생의 밤, 신인가수 선발대회, 시인 만세, 스타와의 만남 등등의 행사가 줄을 이었다. 이 무대에 서는 가수 대부분은 아마추어였는데, 서울 음대생으로서 트로트를 불러 주목받은 조영남이나, 오페라를 불러 환호를 받았던 송창식, 시낭송을 하던 이장희 그리고 ‘세시봉 트리오’로 송창식과 함께 시작한 윤형주 같은 가수가 그들이었다. 이들은 나중에 모두 프로로 데뷔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들은 대부분 외국 번안곡을 불렀지만, 후에 한대수가 자작곡을 들고 나오면서 그 영향을 받아 스스로 곡을 만들기 시작했다. ‘심지다방’이 ‘오비스캐빈’으로 명동에 다시 탄생하면서 세시봉을 이어 포크의 계보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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