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동남권 국제공항 선정을 백지화함에 따라 부산권과 경북·대구권이 동시에 반발하고 있다. 일부 한나라당 의원들은 이명박 대통령의 탈당을 요구하고 있어 정치적 여파도 보통이 아니다.
야당은 이명박 대통령이 세종시 건설과 과학벨트 공약을 부도 낸 데 이어 동남권 공항 공약도 부도를 냈다면서 공세를 퍼붓고 있다. 박근혜 전 대표는 동남권 공항이 그간의 약속 사항이었다면서 추진되어야 한다는 원론적 입장을 표명해서 이를 둘러싼 논란이 어디까지 확산될지 알 수 없다.
필자는 각종 공약을 부도 내면서도 공약도 아닌 ‘4대강’에 몰두하는 이명박 정권은 한마디로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워낙에 하는 말마다 거짓말이고, 말 바꾸는 것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정권이다 보니 “MB 말은 서푼 가치도 없다”라는 명진 스님의 말씀이 명언으로 다가온다. 대통령에 당선되기 위해, 지킬 생각도 없고 지킬 수도 없는 온갖 공약을 퍼부은 사람도 문제이지만, 그런 달콤한 공약의 유혹에 빠져 그 사람에게 표를 던진 유권자들도 한심하기는 매일반이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대통령 선거 때마다 대규모 토건 사업이 공약으로 등장했고, 그런 공약을 내건 후보가 당선되었음을 알게 된다. 많은 유권자가 토건 사업을 공약으로 내건 후보를 선거에서 지지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작금의 이 문제는 누구를 탓할 것이 아니라 정치권과 국민 전체가 반성해야 할 사안이라고 하겠다.
1987년 대선 때 노태우 후보는 전라북도 표를 기대하고 새만금 간척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집권 민정당은 대선뿐 아니라 뒤이은 총선에서도 전라북도에서 참패했다. 그러자 당시 경제 부처 관료들이 새만금 간척이 사업성이 없다면서 노태우 대통령에게 재고를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권력 기반이 취약한 노태우 대통령은 공약 취소에 따른 파문이 두려워서 그대로 사업을 추진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 이후 사정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천문학적 국민 세금을 퍼붓고 있는 새만금 공사는 끝이 없고, 새로 생겨날 땅의 용도는 아직도 오리무중 상태에 있다. 환경은 환경대로 망치고 국민 세금은 세금대로 끝없이 들어가는 ‘새만금’이라는 비극의 뿌리는 ‘공약’이었다.
1992년 대통령 선거에 집권당의 공약으로 등장한 경부고속철도도 결과는 비슷하다. 경부고속철은 처음 예산의 몇 배가 들었고, 공사 기간도 계획을 훨씬 넘겨서 처음부터 ‘적자 철도’가 되고 말았다. 그 후에도 고속도로가 몇 개씩이나 새로 생겨서 경부고속철이 버스보다 그다지 빠를 것도 없다.
고속버스는 수원, 안산, 성남 등 수도권 각지에서 출발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어서 국민 혈세를 퍼부은 고속철이 과연 필요했는지도 의문이다. 그 후에도 선거 때마다 공약 사업으로 등장한 지방 공항, 경전철, 지역 거점 도시 등 모든 것이 그러했다. 정치인들은 중앙 정부의 돈을 끌어오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는데, 그럴싸한 국익을 앞세운 토건 사업이 가장 좋은 구실이었다.
2007년 대선에 이명박 후보가 내세운 한반도 대운하 공약은 토건 공약의 금자탑이었다. “강바닥에서 파낸 모래와 자갈을 팔아 수십조 원 사업비를 만들어서 배가 다니는 운하를 건설하겠다”라는 이 황당한 ‘사기극’은 ‘촛불 시위’ 덕분에 없던 것이 되나 했더니 ‘4대강’ 사업이라는 괴물로 변신해서 단군 이래 최악의 환경 파괴가 지금도 진행 중이다.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동남권 국제공항도 과연 사업 타당성을 면밀하고 냉정하게 분석해보았는지 알 수 없다. 새만금, 경부고속철, 양양 공항, 인천공항 전철도 타당성이 있다는 분석에 근거해서 사업을 시작한 것이니 정부가 발표하는 사업 타당성 결과를 믿기보다는 “남자도 아이를 낳는다”라는 거짓말을 믿겠다.
세금으로 닦은 활주로에서 고추 말리는 실태
이명박 정부가 “동남권 국제공항 후보지 중 어느 곳도 입지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라고 발표하면서 ‘환경 훼손’을 그 이유 중의 하나로 든 데 대해서는 웃지 않을 수 없다. 도무지 언제부터 이명박 정부가 환경을 그렇게 걱정했는지 지나가는 뭐가 웃을 일이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는 밀양과 가덕도 중 어느 곳을 선정해도 반발에 시달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차일피일 시간을 끌어오다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게 되자 적절한 입지가 없다는 이유를 댄 것으로 보인다. 영남권 표를 굳히기 위해서 앞뒤 재지 않고 공약으로 내걸었는데, 경북·대구와 부산이 이토록 첨예하게 대립할지는 미리 계산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사업성이 없다든가 환경 훼손이 심하다고 하는 이유는 뻔뻔한 핑계에 불과하다.
“선거에 이기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못할 것이 없다”라는 정치인들의 저속한 멘탈리티, 국책 사업을 빙자해서 돈을 끌어오는 것이 지역 발전이라고 믿고 있는 저급한 정치 풍토가 빚어낸 합작품이 이런 토건 공약이다. 정치인들이 선거 때마다 공약을 남발해서 국비로 건설한 토건 프로젝트가 한둘이 아닌데, 그 결과는 너무 참담하다.
활주로에서 고추를 말린다는 지방 공항, 하루에 차가 100대도 다니지 않는다는 다리, 국제대회 한 번 치르고 나서 아무짝에도 쓸모없게 된 경기장과 스키 슬로프, 운하를 건설하고 운하에 다닐 수 있는 선박을 구하고 그 선박에 싣고 다닐 화물을 구걸하러 다니는 등 웃을 수도 없는 ‘블랙 코미디’가 우리 주변에 허다하다.
뉴욕 시민들은 세월의 연륜이 드러나다 못해 낡고 불편하기만 한 유서 깊은 지하철을 불편하더라도 참고 탄다. 뉴욕 시민들이라고 우리나라 지하철처럼 깨끗하고 넓은 역사에 에어컨을 돌리는 지하철을 타고 싶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러나 뉴욕 시민들은 시 예산은 제한되어 있고, 쾌적한 전철을 타기 위해서는 대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안다.
멕시코는 코퍼 캐년을 돌아가는 관광열차 외에는 철도를 모두 없애버렸다. 넓은 나라에 철도를 운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정부가 철도를 아예 포기한 것이다. 그 대신 민영 버스회사가 멕시코 전역을 거미줄처럼 연결하고 있어 교통은 전혀 불편함이 없다.
칠레 또한 마찬가지다. 국토가 북에서 남으로 긴 칠레는 원래 철도가 있었지만 운영이 어려워서 포기해버렸다. 정부는 타는 사람도 별로 없는 철도를 보수하고 운영하는 데 국민 세금을 퍼붓기보다는 도로를 확장하는 데 그치고 민영 버스가 자율적으로 전국 곳곳을 운행하도록 한 것이다. 버스회사들은 수요가 많은 노선에는 버스를 많이 투입하고 수요가 없는 곳은 적게 투입한다.
멕시코와 칠레의 사례는 “모든 것을 정부가 국민 세금을 들여서 해결해야 한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한심한 정치인들과 유권자들이 참조할 만하다. 무엇보다 우리는 세금을 들여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건설하거나 만들기 전에 과연 그것이 그렇게 정말 필요한지를 생각하고, 가급적이면 이미 있는 자원과 시설을 최적으로 사용하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자동차로 세 시간도 걸리지 않는 곳에 국민 세금으로 공항을 새로 건설하고 활주로에서는 고추도 말리고 무말랭이도 말리는 나라가 어떻게 이렇게 멀쩡한지가 가끔은 이해가 안 된다. 혹시 국가 차원의 거대한 분식회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