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연정 실패하면 ‘하야’하려 했다”
  • 김지영 (young@sisapress.com)
  • 승인 2011.05.29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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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희상 의원이 말하는 ‘내가 본 노무현’ / “노 전 대통령, 민주당 분당-열린우리당 창당 바라지 않았다”

ⓒ시사저널 유장훈

지난 5월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2주기를 맞은 김해 봉하마을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추도식장에 참석한 인사들은 모두 노란 비옷을 입은 채 전직 대통령을 추모하며 깊은 상념에 잠겨들었다. 그 맨 앞줄에 문희상 민주당 의원이 있었다. 그는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민주당 후보의 대선기획단장을 맡았고, 노무현 정부에서 초대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다. 이후에도 대통령 정치특보와 여당인 열린우리당 의장으로서 노대통령과 지근거리에 있었다. 그는 당시 굵직굵직한 정국 현안과 관련해 노대통령의 속내를 가까운 위치에서 들었고, 깊은 대화를 나누었던 인사이다. 문의원은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그동안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일화를 하나씩 끄집어냈다. 그는 때로는 깊은 상념에 잠겼고, 때로는 감정이 북받친 듯 눈가와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나기도 했다.

■ 강금실 법무부장관 임명의 상징성

2003년 2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강금실 법무부장관과 김두관 행정자치부장관, 이창동 문화관광부장관 등 파격 인사를 단행했다. 특히 김각영 검찰총장보다 사시 기수가 11회나 후배인 강금실 변호사를 법무부장관에 임명한 것은 파격을 넘어 충격이었다. 그러자 검찰 내에서 집단 반발이 일었다. 급기야 3월9일 노대통령은 헌정 사상 처음으로 ‘전국 평검사와의 대화’를 열어 검찰 개혁 문제를 놓고 평검사들과 설전을 벌이는 기이한 장면을 연출했다. 노대통령은 이날 “검찰 수뇌부를 신뢰하지 않는다”라는 속내를 그대로 표출했다. 그러자 곧바로 김각영 총장이 사표를 던졌다. 이에 대해 문의원은 “나는 처음부터 ‘검사와의 대화’를 말렸다.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당시 검찰 일각에서 ‘검난(檢難)이 일어날 수 있다’는 보고가 있어서, 내가 ‘안 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했다. 그랬더니 대통령이 말씀하시기를 ‘검찰 개혁의 상징으로 강금실 장관이 필요합니다. 이 시대의 특권을 없애야 하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나의 이상입니다. 검찰 개혁을 할 수 있는데도, 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검찰 개혁이 내가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개혁인데, 강장관 기용 그 자체로 검찰 개혁의 50%가 해결됩니다. 그것은 강금실의 상징성 때문에 그렇습니다’라고 얘기했다. ‘강장관이 여자이고, 사시 기수가 낮고, 소외된 사람을 대변하는 민변 출신이면서 장관직을 감당할 만큼 똑똑하고 통찰력이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셨다”라고 말했다. 검찰 개혁에 대한 당시 노대통령의 의지가 얼마나 강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 2003년 분당 사태 때 대통령의 진심

2003년 민주당 분당 사태에 대한 논란은 지금도 분분하다. 노대통령의 ‘밀지’로 이른바 민주당 쇄신파가 탈당해 열린우리당을 창당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노 전 대통령이 내심 분당을 바랐고, 결국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반면 “노대통령은 분당을 반대했다”라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그렇다면 분당 사태가 벌어질 당시 ‘노심’은 무엇이었을까. 노 전 대통령의 자서전 <운명이다>에는 ‘많은 사람들이 내가 민주당을 분당시키고 열린우리당을 만들었다고 비난했다.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지역주의 타파, 깨끗한 정치, 정당 민주주의 실현을 내건 열린우리당의 가치와 지향이 옳다고 보아서 그 신당을 지지했을 뿐이다. 내가 그런 정당을 원한 것은 분명하지만, 열린우리당 창당 주역들이 대통령의 지시나 배후 조종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문의원은 “많은 사람이 지금도 ‘노대통령이 분당을 원했다’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그때 노대통령은 분당을 원하지 않았다. 노대통령은 당시 천정배·신기남·정동영 등 당내 원칙주의자들이 주장한 ‘정당을 상향제로 바꾸어야 한다’라는 취지에는 기본적으로 공감했다. 정당에 관심이 많았고, 정당을 정당답게 하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그렇다고 분당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대통령이 정당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얘기했기 때문에 분당을 하느니 마느니 미주알고주알 말하는 것이 당시 청와대에서는 금기였다. 정무수석도 그에 관해 할 일이 없었고, 나는 더 그랬다. 그렇게 어물어물하는 사이에 분당이 진행되었고, 걷잡을 수가 없었다. 나도 그랬지만 노대통령도 나를 만날 때마다 ‘분당을 하면 안 된다’라고 얘기한 것은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 주위 반대에도 ‘대연정’에 집착

▲ 2003년 4월23일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문희상 비서실장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있다. ⓒ시사저널 자료

노대통령은 2003년 4월2일, 국회 시정 연설에서 “특정 정당이 특정 지역에서 3분의 2 이상의 의석을 차지할 수 없도록 선거법을 개정한다면 17대 국회에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는 정당 또는 정치 연합에게 내각의 구성 권한을 이양하겠다”라고 말했다. 이른바, ‘대연정’을 내비친 것이다. 문의원은 그 연설에 대해 “어디까지나 지역주의 타파를 전제로 한 제안이었다”라고 말했다.

정치권에서는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2005년 8월 KBS <국민과의 대화>에서 대연정을 공식적으로 제안했다. 하지만 여야 정치권 모두가 반발했다. 이에 대해 노 전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권력과 정치를 보는 국민의 시선과 의식이 나와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깊이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뼈아픈 실책이 아닐 수 없었다’라고 후회하기도 했다.

당시 열린우리당 의장이었던 문의원은 당시의 정황을 이렇게 전했다. “대연정이 쟁점일 때, 청와대에서 면담 제의가 왔다. 나는 대통령에게 ‘그쪽(한나라당)에서 받는다고 합니까? 그걸 그쪽에서 왜 받겠습니까? 잘못하면 이상해집니다’라며 대연정을 반대했다. 그러자 대통령께서 ‘손해 날 것은 없잖아요’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열린우리당) 당내 반발 때문에 큰일 납니다’라고 얘기했더니, 대통령께서 ‘탈당’과 ‘하야’를 동시에 거론하셨다. 대연정이 안 되면 여당을 탈당하든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는 것이었다. 너무 화가 났었다. 내가 당 의장인데 탈당 얘기를 하셔서 죽을 맛이었다. 게다가 하야까지 생각하고 계셨던 것이다.”

■ 유인태 수석이 대통령에게 혼쭐 난 사연

노 전 대통령은 이미 알려진 대로 독서를 좋아했고, 토론하기를 무척이나 즐겼다. 문의원은 “책 보고 감명 깊은 것이 있으면 토론하기를 좋아했던 양반이다. 수석비서관 회의 자체도 토론회장이었다. 당시 김태유 정보과학기술보좌관과 김희상 국방보좌관 등이 많은 이야기를 한 두 사람이었다. 나도 그렇지만 그 두 사람 모두 경복고 출신이다. 그러자 노대통령이 ‘경복고에서는 역사를 가르치는 탁월한 선생님이 있었나 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라고 전했다. 그는 “그런데 유인태 청와대 정무수석은 이런 대통령의 토론 문화에 좀 불만이 있었던 모양이다. 한번은 토론회장에서 유수석이 대통령에게 고사를 인용하면서 ‘책을 많이 읽는 대통령보다 책을 많이 읽는 참모를 많이 두는 대통령이 더 낫습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때 대통령께서 아주 정색을 하고 유수석을 질책해서 그 자리의 분위기가 아주 머쓱해졌던 기억이 있다. 아마 유수석도 이례적인 대통령의 진노에 뜨끔했을 것이다. 그 정도로 대통령은 책을 좋아하셨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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