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니 못 믿겠고 안 주자니 굶주리고
  • 한면택│워싱턴 통신원 ()
  • 승인 2011.06.15 0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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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대북 식량 지원, 북한 정권 전용 우려 탓에 ‘딜레마’

굶주리는 북한 주민들을 위해 식량을 제공할 것인가, 아니면 계속 모른 체할 것인가. 미국이 딜레마를 겪고 있다. 미국 정부는 현재 북한에 북한인권특사와 식량평가단까지 파견해 대북 식량 지원을 재개하는 수순을 밟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북한 정권이 전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고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은 지금 북한에 식량을 지원하면 군용은 물론 내년 강성대국 행사용으로 전용할 가능성이 크다고 의심하고 있다. 이것을 막는 방법을 강구한 후에나 대북 식량 지원에 나설 것임을 내비치고 있다.  

세계식량기구(WFP)는 지난 3월 북한 주민 6백만명이 굶주리고 있다고 평가했다. 북한 주민 전체의 4분의 1이 또다시 배고픔, 기아에 빠져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로 하여금 굶주림을 일단 모면케 하려면 3억 달러어치의 식량 40만t을 지원해야 할 것으로 WFP는 밝혔다. WFP는 이미 4월부터 대북 식량 제공을 재개했다. 미국과 유럽연합 등도 대북 식량 지원을 재개할 채비를 하고 있다.

로버트 킹 북한인권특사를 포함한 미국 정부 대표단은 2년만에 처음으로 5월24일부터 28일까지 북한을 방문해 현지 식량 사정을 평가하고 돌아왔다. 여기에 미국의 대외 원조를 담당하는 국무부 산하 대외원조처(USAID) 소속 존 브로스 해외재난 지원 담당 부처장보 등 식량평가팀은 6월2일까지 북한에 남아 식량 사정과 모니터링 문제를 파악하고 미국으로 귀환했다.

6백만명 굶주려 시급한 실정 

▲ 2008년 6월29일 북한 남포항에서 미국이 보낸 원조 식량을 하역하고 있다. ⓒEPA 연합

하지만 미국으로서 북한에 대한 식량 지원은 딜레마이다. 굶주리는 북한 주민들에 대한 식량 지원을 외면할 수도 없고, 지원을 하면 북한 정권의 전용할 것이 걱정되기 때문이다.

미국은 북한 주민 6백만명이나 굶주리고 있어 식량 지원이 시급하다는 WFP의 호소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정권은 미워도 굶주리는 주민들을 돕는 인도적 지원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미국 정부는 공개적으로는 여전히 북한이 지원 식량을 전용할 가능성이 있다며 우려를 표명하고 속도를 늦추고 있다.

미국의 싱크탱크인 피터슨 국제경제연구소 마커스 놀랜드 부소장은 대북 식량 지원은 미국에게 인질 사태와 같은 상황이라고 비유했다. 인질 사태에서는 인질들과 구조대의 인명 피해를 무릅쓰고라도 구출 작전을 감행하는 사례가 많다. 인질 구출에 나섰다가 실패했을 때 받을 역풍보다는 구출 작전을 아예 벌이지 않았다가 잘못되었을 때 받을 후폭풍이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대북 식량 지원도 비슷하다. 전용을 우려해 북한 주민의 굶주림을 외면했다가 아사 사태라는 비극을 초래하면 미국도 더 큰 정치적 대가를 치를 것이라는 해석이다. 그래서인지 미국 정부는 2009년 8월에 중단했던 대북 식량 지원을 재개하려는 수순을 밟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럼에도 최종 결정을 하는 데에는 뜸을 들이고 있다. 식량 지원을 재개하더라도 빨라야 6월 말, 늦으면 7월 초에나 결정할 것으로 예고하고 있다.

WFP도 북한의 식량 부족 사태는 6월 이후에 심각해질 것이라고 평가해 거기에 맞추려는 시도로 보인다. 특히 전용 방지책을 충분히 마련한 다음에 지원에 나서고 인도적 차원의 식량 지원일 뿐 북한 정권의 장단에 맞추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로 해석되고 있다.

미국이 대북 식량 지원 재개에 뜸을 들이고 있는 주된 이유는 무엇일까. 지원 식량이 전용될 우려가 여전하기 때문이다. 마크 토너 국무부 부대변인은 미국 정부는 북한에 보내는 지원 식량이 군부 등 다른 곳으로 전용될 가능성을 여전히 우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토너 부대변인은 “우리의 우려 중 하나는 지원 식량이 전용되거나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미국은 전에는 지원 식량이 북한 군부로 전용되는 것을 우려했으나 이번에는 북한 정권이 내세우는 2012년 강성대국 행사용으로 사용될 가능성을 걱정하고 있다.

실제로 미국의 중진 상원의원들은 지금 북한에 식량을 제공하면 김정일 정권이 강성대국 행사용으로 전용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지적했다.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를 지낸 존 매케인 상원의원과 민주당 부통령 후보를 역임한 조셉 리버만 상원의원 등은 “북한의 갑작스런 식량 지원 요청은 인도적 상황의 악화에 기인한 것이라기보다 강성대국의 해로 꼽은 2012년에 맞춰 김정일 정권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한 시도인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이들 중진 의원은 또 “김정일 정권이 국제 사회에 식량 지원을 요청하면서도 올해 상거래를 통한 식량 수입을 40%나 줄인 반면 집권층을 위한 사치품 수입이나 핵 또는 탄도미사일 프로그램에 대한 투자는 줄이지 않았다”라고 지적했다.

‘군용이나 강성대국 행사용’ 전용 막을 해법

김정일 정권은 김일성 주석 탄생 100주년이 되는 2012년을 강성대국으로 만들 것이라고 공언해왔는데, 국제 사회의 지원 식량을 비축하고 있다가 내년 행사용으로 쓸 가능성이 크다는 우려이다. 그럴 경우 미국은 김정일 정권의 체제 선전에 식량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웃음거리가 될 수 있다.

미국이 북한의 전용을 막을 해법으로 생각해낸 방안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북한에게 식량을 지원하더라도 장기 저장이 가능한 쌀 대신 영양 식품을 제공하는 방안이다. 둘째, 일괄적 대규모 제공이 아니라 소규모로 분할해 지원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식량평가팀을 이끌고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로버트 킹 미국 북한인권특사는 지난 2일 미국 하원 외교위원회 청문회에서 미국이 북한에 대한 식량 지원 방침을 결정하더라도 북한이 지원 식량을 전용하지 못하도록 저지하는 방안을 마련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미국은 북한에 쌀은 주지 않을 것이며 군용으로의 전용이 극히 어려운 영양 프로그램을 제공하게 될 것이라고 킹 특사는 밝혔다. 미국은 또 대북 지원 식량이 전용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한꺼번에 대규모의 식량을 지원하지는 않는다는 입장이다. 

▲ 지난해 11월3일 북한의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이 평양의 만수대의사당에서 방북 중인 조셋 시런 유엔 세계식량계획(WFP) 사무총장과 만나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와 관련해 미국의 전문가들은 미국이 대북 식량 지원을 재개하더라도 북한 정권이 내년 김일성 탄생 100주년이자 강성대국 약속의 해에 원조 식량을 전용해 쓰지 못하도록 장기 저장이 가능한 쌀을 제공하지 않는 대신 옥수수, 콩 등을 지원하게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특히 굶주리는 북한 아동들에게 필요한 저장 영양 식품들을 가장 많이 제공하게 될 것으로 미국의 전문가들은 관측하고 있다. 저장 영양 식품들로는 옥수수, 콩과 영양소들을 혼합한 브렌디드 식품들과 분유 등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저장 영양 식품들은 김정일 정권이 강성대국 행사용으로 전용하더라도 미국 등 해외 지원품으로 쉽게 판별할 수 있어 북한 주민들에게 생색 내기 효과를 볼 수 없을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또 한꺼번에 지원 식량을 선적하지 않고 북한 주민들에게 제대로 분배되고 있는지 등을 파악하며 매달 보내는 방식을 취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다. 미국 국무부 대외원조처 처장을 지낸 앤드류 나시오스는 미국이 이번에 대북 식량 지원에 나서면 지원 식량이 북한 주민들에게 제대로 분배되는지 실적에 따라 매달 분할 선적하는 방식을 취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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