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흥행작 있어도 ‘떠들썩’ 화제작은 없네
  • 라제기│한국일보 문화부 기자 ()
  • 승인 2011.06.20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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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국내 영화계 중간 평가 / <써니> <조선명탐정> 등 관객 몰이 성공했지만 ‘스타’ 없어서인지 파급력 미약

▲ ⓒ(주)미디어플렉스 제공

<써니>가 지난 6월14일 4백80만 관객을 돌파하며 올해 개봉한 영화 가운데 최고 흥행작 자리에 올랐다. 이렇다 할 스타 없이 영화의 힘으로 이루어낸 성과라는 평가이다. <과속 스캔들>에서 코미디와 음악을 절묘하게 배합했던 강형철 감독의 재능이 다시 한번 힘을 발휘했다는 분석도 뒤따른다. 흥행 1위에 등극했고, 5백만 관객이 눈앞이라 떠들썩하게 축배를 들 만도 하지만 대중의 반응은 그리 뜨겁지 않다. <써니>의 특정 대사가 대중의 입에 오르내리거나 주요 장면이 패러디되어 딱히 눈길을 모으지도 않는다. <써니>는 흥행작은 있어도 화제작은 없는 최근 충무로의 기이한 현실을 반영한다.

활기 잃은 충무로의 현실 반영

<써니>에게 추월당하며 2위로 주저앉은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도 신드롬 없는 흥행작이었다. 4백79만5천4백60명(영화진흥위원회 집계)이라는 만만치 않은 흥행 성과를 올렸지만 관객들의 뇌리에 강인한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다. 아무리 시간 죽이기용 영화라고 해도 많은 관객이 극장을 찾고서도 큰 반향이 없어 흥행작으로서는 이례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신드롬이 없다 보니 흥행의 파급력도 떨어졌다. 흥행의 불길이 다른 영화로까지 번지지 않은 것이다.

<써니>와 <조선명탐정>의 ‘조용한 흥행’은 활기 잃은 충무로를 대변한다. 요란스레 관객의 눈길을 낚아챈 영화는 정작 완성도가 떨어지고, 관객의 마음까지 움직이는 상업영화는 없는 것이 충무로의 오늘이다. ‘웰메이드’라는 포장으로 관객을 유혹했던 2000년대 중반의 모습과 대조적이다.

유난히 슬리퍼 히트(예상 밖 흥행작)가 많았던 올해 상반기의 흥행 기상도도 화제 없는 흥행 현상과 무관치 않다. <헬로우 고스트>(3백4만7천8백56명)와 <그대를 사랑합니다>(1백64만6천5백2명) 등이 장기 상영 전략을 바탕으로 예상을 뛰어넘는 흥행 성적을 올린 것도 충무로의 지리멸렬함을 대변한다. “볼 영화가 없어서 보았고 그것이 결국 흥행으로 이어졌다”라는 일부 관객의 극단적이면서도 냉소적인 반응은 한국 영화가 조금씩 매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요즘 한국 영화는 기획만 눈에 띄고 내용은 없다”라는 평론가의 비판도 제법 설득력 있게 들린다.

매력 넘치는 배우와 창의력 넘치는 영화 쏟아내야

충무로 영화들이 활기를 잃은 이유는 무엇일까. 대기업 계열의 대형 투자배급사가 영화판을 쥐락펴락하면서 한국 영화의 독창성과 창의력을 잃고 있다는 평가가 대세이다. 하지만 최근의 부진을 두고는 대형 투자배급사를 탓할 수만은 없을 듯하다. 한국 영화의 지지부진은 총체적이다.

활기를 잃어가는 충무로의 현실은 스타가 없는 데서도 기인했다. 강동원과 조인성, 조승우 등 티켓 파워를 지닌 배우들이 군에 입대하면서 생긴 공백이 관객들을 극장가로 유인하지 못한 영향도 크다. 여성 스타 키우기에 소홀해왔던 점도 무시할 수 없다. 김태희·전지현처럼 광고나 드라마 등으로 명성과 부를 쌓는 스타는 있지만, 정작 영화를 발판 삼아 스타 자리에 오른 여자 배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영화적 기대감을 부추기는 배우가 없는 현실은 한국 영화에 대한 대중의 호기심을 떨어뜨리고 있다. 강형철 감독을 제외하고 최근 한국 영화계가 이렇다 할 스타 감독을 수혈하지 못하고 있는 점도 악재이다.

부진의 늪을 탈출하는 방법은 단순하다. 매력적인 스타가 출연하고 창의력 넘치는 영화를 만들면 된다. 박찬욱·봉준호 같은 논쟁적인 감독이 파격적인 영화로 극장가를 찾아도 대중은 금세 시선을 쏟을 것이다. 문제는 지금 충무로가 그런 의지와 추진력을 지녔는가이다.



▲ ⓒ조제 제공

<은하해방전선>의 윤성호 감독이 세계육상선수권 대회가 열리는 대구를 배경으로, 장대높이뛰기에 관한 영화를 만들었다면? 설마 진짜 스포츠 영화를 상상한 사람이 있을까? <도약선생>은 스포츠를 빙자한 퀴어 로맨틱 코미디이다.

영화는 누군가의 꿈 장면으로 시작한다. 기모노를 입은 장대높이뛰기협회 회장님 왈, 장대높이뛰기에도 예술 점수를 도입해, 신체의 아름다움, 의상 등에 종합 점수를 매겨야 세계 기록의 벽을 넘을 수 있다고. 물론 헛소리이다. 이어지는 또 다른 이의 꿈 장면들. 영화는 윤성호 감독의 영화답게, 여러 인물들의 내레이션을 넣은 장면들을 산만하게 겹쳐나간다. 그러다 내러티브가 정돈된다. 우선 무슨 이유에서인지, 장대높이뛰기 선수를 키우겠다는 집념에 사로잡힌 코치(박혁권)가 있다. 우연히 그를 만나 훈련에 돌입한 원식(나수윤)은 자신을 차버린 여성에게 ‘크고, 높고, 늠름한 것’을 보여주려 한다. 여기에 과거 육상선수였으나, 지금은 ‘집안의 계급을 바꾸기 위해’ 아이돌이 되려는 재영(박희본)이 합류한다. 원식의 열정에 호기심을 느껴서다.

이들의 전인격적인 훈련 과정은 우스꽝스럽지만, 사뭇 진지하다. 이들의 도전이 무모하다고 느껴지면서도, 그 애처로운 집착이 우리네 사는 모습이라는 생각에 비웃기가 힘들다. 영화의 마지막, 원식의 무모한 도약으로 사태는 급정리된다. 그리고 코치가 무엇 때문에 그토록 장대높이뛰기에 집착했는지 밝혀진다. 그것은 장대에 대한 페티시즘 따위가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갈구하는 유토피아에 대한 신심 때문이다. 도착이라면 도착이요, 예술적 욕망이라면 예술적 욕망이라 할 이 신심! 그런데 따지고 보면, 결국 모든 집착은 다 유토피아를 향한 도착이 아니던가! <도약선생>은 상영 시간 60분 남짓한 초저예산 소품이지만, 윤성호 감독 특유의 아포리즘이 확실히 살아있는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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