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성숙한 음악 세계로 안내합니다”
  • 김진령 (jy@sisapress.com)
  • 승인 2011.08.03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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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령국제음악제 감독 맡은 정명화·정경화 교수 / “기절할 만큼 아름다운 곳에서 즐거운 감상을…”

▲ 정경화 축제 기간 중 강릉, 원주, 춘천 등에서 일반 시민들이 좀 더 즐길 수 있도록 연주회를 늘렸다. 우리가 기획한 음악제 프로그램이 구현되는 것은 적어도 3년쯤 되어야 틀을 잡을 것이다. ⓒ시사저널 임준선

8월13일까지 열리는 대관령국제음악제가 지난 7월24일 문을 열었다. 이 음악제의 성격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유명 연주자의 콘서트이고, 다른 하나는 여름 음악 캠프이다. 이번 대관령음악제에 참가한 학생의 25%는 외국 학생들이다. 외국에서 클래식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한국으로 온다는 것은 대관령음악제가 한국을 대표하는 여름음악제로 자리 잡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올해부터 이 음악제의 선장은 정명화(67·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첼로)-정경화(63·줄리어드 음대 교수·바이올린) 자매이다.

각자 세계적인 지명도를 가지고 있는 연주자인 두 자매는 국내 네트워크와 국제 네트워크를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며 대관령음악제를 끌어가고 있다. 특히 정경화 교수는 2005년 부상을 당한 이후 완전히 연주 활동을 접었지만 부상으로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진 동안 전집이 재발매되는 등 오히려 ‘전설’이 되었다.

정명화 교수는 “2년 전까지는 어머니(이원숙씨, 지난 5월 한국에서 작고)도 뉴욕에 계셨고, 딸도 그쪽에 살고 있어서 1년에 두 번 정도는 뉴욕에 갔었다. 하지만 연주도 함께하고 몇 달 동안 이렇게 함께 있는 것은 근 20년 만에 처음이다”라고 말했다. 정경화 교수는 인터뷰 장소인 알펜시아홀 2층의 리허설룸 밖으로 보이는 스키 점프대 허리에 걸린 구름을 가리키면서 “참 아름다운 곳이다. 기절초풍할 만큼 아름답다”라고 말했다. ‘이곳에 온 것이 이번이 처음이냐’라고 묻자 “밖에는 알리지 않았지만 지난해 12월, 지난 2월에도 왔었다”라고 말했다. 대관령음악제 개막을 앞두고 분주한 두 거장을 개막 직전에 만났다.

각자 취향이 달라 감독으로서 호흡 맞추기 어렵지 않나?

현대 음악 빼고는 다 연결이 되어 있다.(정경화) 내가 먼저 의견을 내면 동생이 의견을 붙이고 순서를 논의하는 식으로 밸런스를 맞췄다. 몇 달 전부터 동생이 우리 집에 와 있어서 의견을 맞추는 데 어려움이 없다.(정명화)

정경화 교수는 부상 뒤 오랜만에 외부 활동에 나서는데.

연주에는 단련이 필요하다. 예술적으로 보면 음악을 하던 것이 옛날과 전혀 바뀐 것이 없다. 다만 내가 혼동하고 착각하는 때가 있다. 잘 조절해야 하는데. 다시 연주를 시작하면서 음악이 너무너무 좋다. 내가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살살 컨디션을 올리려고 한다. 언니는 몸 관리도 잘하고 한 번도 스톱 없이 연주 활동을 계속했다. 잔향이 넓게 퍼지면서 오래가는 첼로와 너무 비슷하다. 나는 쥐고 흔들고 불꽃처럼 타오르는 바이올린을 닮았고. 세월이 흘러도 성격이 변하기는 했는데 바뀌지는 않더라. 이번 가을부터 연주 무대에 다시 설 것이다. 협연, 독주, 실내악 등 계획을 조심스럽게 세우고 있다.(정경화)

정명화+정경화+정명훈(피아노)의 정트리오도 복원되나?

연주 계획이 있다.(정경화) 다른 피아니스트와 함께하는 경험도 특별하다. 이번에 동생과 케빈 케너(피아니스트)와 트리오 무대를 꾸미는데, 연습을 할 때 그렇게 좋을 수 없다. 케빈도 자기를 어떻게 알고 불렀느냐며 신기해한다. 인연이란 게 있다. 대관령음악제에 온 자체가 인연이고.(정명화)

정명화 감독은 연주자로 대관령음악제에 7년간 참여했는데, 감독이 된 뒤의 계획은?

일단은 축제 기간 중 강릉, 원주, 춘천 등에서 일반 시민들이 좀 더 즐길 수 있도록 연주회를 늘렸다(이 프로그램을 통해 최근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2등상을 수상한 손열음이 고향 원주 무대에 섰다). 우리가 기획한 음악제 프로그램이 구현되는 것은 적어도 3년쯤 되어야 틀을 잡을 것이다.(정경화)

음악가에게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음악이 깊어진다. 젊었을 때는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소리를 만들 때 조금 더 팍 지르지 않았나 싶다. 어떤 작품은 나이가 들면서 더 좋아지는 작품도 있다.(정명화)

음악성은 심어줄 수 없다. 타고나야 한다. 문제는 그것을 어디 가서 훈련하고 단련해야 하느냐의 문제이다. 나이를 먹으면 같은 소리를 연주해도 여유가 생긴다. 여유가 생기니까 숨 쉬는 것이 달라진다. 물론 정열적인 대목을 연주할 때는 느긋하게 할 수 없다.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몸이 변하는 것이지.(정경화)

정경화 교수의 레코딩은 지금도 인기를 얻고 있는데 다시 녹음하고 싶은 음반이 있나?

이제는 시간이 많지 않다. 원하는 대로 된 것은 없지만. (뜸을 들이고)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할 수 있으면 한 번 더 하고 싶다. 명훈이 지휘로 함께하면 참 좋을 것 같다. 명훈이는 대단하다. 그레이트 마에스트로이다. 서울시향도 5년 만에 좋아지고 우리가 감사해야 한다. 문제는 몸이다. 솔직히 말해서 다시 커리어를 리바이벌한다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께 (언니와) 합을 다시 맞추는데 기가 막히게 느낌이 좋았다. (정명화가 동생을 가리키며 ) 성격이 많이 느긋해졌다.

(정경화에게) 부상이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

▲ 정명화 ⓒ시사저널 임준선

어느 날 종교방송을 듣는데 ‘당신들은 매일 죽어가고 있다’라고 말하더라. 깜짝 놀랐다. 죽음이라는 것을 항상 부정적으로 생각했는데. 내가 지금 3분의 2를 살았다고 생각하면 남은 삶이 굉장히 귀하게 생각된다. 너무 귀하니까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살고 싶다. 내가 후회를 정말 안 하는 스타일이다.

며칠 전, 함께 활동했던 프로듀서를 몇십 년 만에 만났다. 내가 ‘그때는 너무 안달쟁이였다’라고 말했더니 그가 “그런 소리는 믿지도 않는다”라고 말하더라. 그래서 내가 “적어도 지금은 쓸데없는 걱정은 안 한다”라고 말해주었다.(웃음) 내가 걱정하는 것은 주어진 시간에 얼마만큼 음악을 더 즐기고 주위에 전해주느냐이다. 그것이 기적이고 중요하다. 어제도, 내일도 없다. 지금이 중요하다.

(동생의 이야기를 듣던 정명화가 이야기를 받았다.)

몇 년 전부터 드보르작의 협주곡을 연주할 때마다 이것이 내 마지막이 아닌가 해서 더 귀하게 생각하고 했다. 물론 그 뒤에도 여러 번 연주했지만 할 때마다 귀하게 여겨진다.

복귀하기 어려웠나?

치료할 생각을 안 했다. 내가 인생을 너무 정열적으로 살았다. 그러다 딱 스톱이 되니까 ‘하나님 뜻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앉아서 두리번두리번거리며 ‘나한테 원하시는 것이 뭘까’라는 생각만 했다.

1971년 영국 런던에서 데뷔한 뒤 갑자기 맹장이 터졌다. 일주일 뒤에 연주회가 있는데. 의사들 10명이 의논을 했다. 아홉 명이 먼저 수술을 하자고 했지만 엄마가 수를 내 한약을 먹고 만성맹장을 달래서 연주를 계속했다. 그때는 (연주 경력이) 막 올라가는 타이밍이니까 그 불길을 못 끄고, 안 끈 것이다. 지금은 내가 껐다, 켰다 한다.(웃음)

동생의 이야기를 듣던 정명화 교수가 “(동생이) 꺼졌다고 하는데 리허설 때 보면 완전히 그대로이다”라고 하자 동생이 “언니랑 같이 일하는 것이 너무 좋고 음악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라고 덧붙였다. 언니는 동생이 이야기를 하면 간간히 짚어줄 뿐 막고 나서지 않았다. 넉넉히 품고(정명화), 불꽃처럼 타오르는(정경화) 두 자매의 협주가 계속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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