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고 닦아 ‘원 소스 멀티 유즈’까지
  • 김진령 (jy@sisapress.com)
  • 승인 2011.09.27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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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규 ㈜손오공 대표 / 주물공장에서 익힌 손재주로 완구 생산…만화영화·게임으로 영역 확장

▲ “사업을 하면서 망가진 경험도 있다. 지금은 성공에 더 자신 있다. 다 겪어봤으니까. 긍정적으로 해라. 어차피 힘든 것인데 어렵게 생각하면 더 힘들어진다. 가볍게 생각하고 끌고 가는 것이 좋다. 나는 성취감이나 지적 호기심이 강하다. 개발하고 싶은 욕구가 있으면 그쪽으로 간다.” ⓒ시사저널 임준선

<하얀 마음 백구>나 <탑블레이드> <장금이의 꿈> 같은 만화 영화를 모르더라도 동네 문방구 앞에 쪼그려 앉은 꼬마들이 열중하던 장난감 자판기, 끈끈이, 발광 요요, 팽이를 현대화한 메탈블레이드 같은 것 중 한두 개는 반드시 기억에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만든 이는 최신규(56)라는 사람이다. 그가 세운 손오공이라는 완구회사는 이 실적을 바탕으로 코스닥에 등록된 기업이다.

손오공의 최신규 대표이사가 그동안 만들어낸 장난감은 2천개가 넘는다. 장난감이 대부분 스토리를 갖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는 엄청난 스토리텔러이자 기획자인 셈이다. 하지만 그는 무학이다. 초등학교 3학년만 마치고 거리의 아이가 되었다. 집안이 어려웠고 아버지도 안 계셨다. 그가 살던 1960년대 중·후반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이나 당산동 지역은 철공소 정도만 있던 가난한 동네였다. 배움에도 허기지고 실제로도 배가 고팠던 그가 유일하게 드나들 수 있었던 곳은 만화가게였다. ‘돈도 없었다면서 만화방은 어떻게 갔느냐’라고 묻자 그는 “그때도 만화를 좋아했는데 돈이 없으니 딱지치기와 구슬치기를 해서 모은 딱지와 구슬을 가게에서 돈으로 바꿔 만화를 보았다”라고 말했다.

그 많은 장난감을 만든 상상력의 원천이 궁금했다. 그는 “돈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고 뭘 사지도 못하던 시절, 외롭고 그런 경험을 많이 해서인지 마음속에 해보고 싶은 것이 많았다. 남들은 힘들다고 하지만 나는 이런 것들을 만들고 그러는 것이 너무 좋다”라고 말했다. 배가 고파서 아카시아꽃을 따먹으며 허기를 달래던 초등학생이 절실히 원했던 것을, 그는 평생에 걸쳐서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손재주는 생계형 노동에서 길을 찾아냈다. 열세 살 때 그는 문래동의 금방에 들어가 주물 기술을 익혔다. 고사리손의 ‘공돌이’가 된 것이다. 기계를 주무르고 물건을 만드는 일의 시작이었다. 보충역으로 문래동 주물공장에서 일할 때 그가 만든 탄창이 월남으로 16만개나 수출되었다. 문래동 주물공장 어름에서 그는 기계를 배우고 뭐든 척척 만들어내는 손재주를 갖고 있는 자신을 확인했다. 그리고 1974년 형과 동업해 협성공업사라는 회사를 차렸다. 주력 품목은 수도꼭지. ‘특가랑’이라고 부르는 내구성이 강한 제품을 내놓아 1970년대 후반에 제법 돈을 모았다.

그가 장난감 쪽으로 들어온 것은 손오공벤딩머신 때문이다. 탁구공만 한 작은 공에 선물이 들어 있는 뽑기 기계이다. 이 물건을 만들 사람을 찾던 제작자가 그의 소문을 듣고 물어물어 찾아왔다. 협성에서 나온 그는 그 기계를 만들어서 납품해주다 직접 영업까지 하기 시작했다. 1984년 무렵이었다. 이것이 대박을 쳤다. 전국에 3만대가 넘게 깔렸다. 100원 동전을 넣고 하는 기계라 하루에 1천만원씩 동전이 들어왔다. 동전 수거를 하던 차의 ‘쇼바’가 나가고 사무실에서 동전 푸대를 베고 잘 정도였다.

손오공벤딩머신에 들어가는 장난감 중에는 끈끈이라는 것이 있다. 끈끈하게 늘어지는 성분이 유해하다고 해서 사회 문제가 되었는데, 그는 이 유해 성분을 없앤 끈끈이를 만들어냈다. 자판기 알에 들어가는 장난감도 계속 필요했다. 그는 그것을 모두 만들어냈고, 계속 히트 아이템이 나왔다. 1986년 서울화학이라는 손오공의 전신이 만들어졌다. 초등학교를 중퇴한 주물공장의 어린이 노동자가 어엿한 사장님이 된 것이다.

‘타고난 기획자’의 끼 바탕으로 도전 계속

그가 객단가 1천원 미만 상품에서 3만원대의 비싼 장난감으로 넘어온 것은 1992년 일본의 다카라 사와 계약을 맺고 그레이트다간 시리즈를 만들면서부터였다. 일본 로봇 완구는 TV 방영 만화에 등장하는 캐릭터가 완구로 만들어져 엄청난 판매로 이어지는 구조이다.

주물업자가 저가의 완구 생산업체에서 고가의 완구 생산업체로의 변신에 성공하게 된 이유 중에는 그가 타고난 기획자라는 점도 한몫했다. 그가 단순히 일본 캐릭터의 라이선스만 반복해 수입했다면 국내 완구 시장에서 손오공의 지위는 지금과 달랐을 것이고, 경쟁이 더 치열했을 것이다.

최대표는 1995년 일본 만화영화 <라젠카> 제작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2000년 <하얀 마음 백구>라는 만화영화를 직접 제작하고, 팽이 광풍을 불러온 <탑블레이드>나 <메탈블레이드>를 일본 제작자와 공동 제작해 한국인 감독을 기용하는 등 캐릭터의 원천 권리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장난감 제조업자가 아닌 콘텐츠 생산자가 된 것이다. 요즘에는 타이완과 홍콩 등 동남아에서 <탑블레이드>가 방영되면서 현지에서 위탁 생산한 탑블레이드가 인기를 끌고 있다. 손오공에는 로열티가 계속 송금되어 오고 있다. 이에서 보듯 손오공은 직접 생산보다는 기획과 개발에 치중하고 있다. 물론 지금도 ㈜손오공의 수입 대부분은 장난감을 팔아서 번 돈이다. 만화영화를 만드는 데에는 많은 돈이 들고 회수 기간도 6년 정도 걸리지만 큰돈이 되지는 않는다. 대신 캐릭터를 이용한 장난감 제조 판매 사업은 손오공벤딩머신 시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돈을 벌어주었다. 탑블레이드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 때는 매출이 1천억원대를 넘어갈 정도였다. 그러면서 그에게 콘텐츠 1세대라는 별칭이 붙었다. ‘원 소스 멀티 유즈’라는 콘텐츠의 상업적 가능성을 시장에서 확인시켜 준 1세대였기 때문이다.

지금 그는 또 한 번 영역 확장을 시도한다. 온라인게임을 시작한 것이다. 최사장은 “콘텐츠와 관련된 사업은 무엇이든 할 것이다. 게임도 만화의 사촌이다. 궁극적으로 완구+만화영화+온라인게임의 결합을 꿈꾼다. 시장이 그렇게 흘러갈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2001년 온라인게임에 투자를 시작한 그는 수업료를 혹독히 치르고 있다. ‘투자의 위험성이 크다 보니’ 손오공 대신 그가 직접 투자한 초이락게임즈라는 회사를 통해 게임 개발에 나서고 있다. 초이락은 100억원대의 매출을 기록하고 있고 세계 16개국에 서비스되는 ‘샤이야’라는 히트작도 가지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들어가는 돈이 나오는 돈보다 많다. 최근 CJ와 손잡고 서비스하고 있는 <슈퍼스타 K>라는 온라인게임의 반응이 좋아 그는 거기에 기대를 걸고 있다. 

온라인게임 사업의 고전이 그를 위축시켰을까? “내가 무학인데 지금까지 버텨왔다. 사업을 하면서 망가진 경험도 있다. 지금은 성공에 더 자신 있다. 다 겪어봤으니까. 서울화학을 만든 이후에 무서운 것이 없다. 부정적인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다. 얼마 전에 세종대 학생들이 케이스 스터디를 하겠다며 와서 ‘가장 힘든 것이 뭐냐’라고 묻더라. 나는 그 말이 더 어렵더라. 긍정적으로 해라. 어차피 힘든 것인데 어렵게 생각하면 더 힘들어진다. 가볍게 생각하고 끌고 가는 것이 좋다. 내가 게임에 투자하지 않았으면 재벌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역량이 있는데, 나는 그것을 최대한 만들어서 무언가를 남겨놓고 싶다. <오세암>이나 <장금이의 꿈>을 돈만 보고 만든 것이 아니다. 문화에 투자한다고 생각해서 만든 것이다. 나는 성취감이나 지적 호기심이 강하다. 개발하고 싶은 욕구가 있으면 그쪽으로 간다.” 

그는 자신의 최신 스마트폰 첫 화면에 써놓은 메모장을 보여주었다. 그의 사업 아이디어가 가득했다. “이것 다 내가 실험하고 만들어볼 것이다. 인생은 죽을 때까지 진행형이다.” 마침 그의 에세이집이 나온다. 책 제목이 <멈추지 않는 팽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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