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나무'에게서 ‘정치의 기술’을 배운다
  • 정덕현│대중문화평론가 ()
  • 승인 2011.12.25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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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이야기에 현실 투영…대중의 마음을 얻는 ‘소통 체계’ 그려내

SBS 드라마 한석규. ⓒ SBS
사극에서 당대의 현실과 정치가 투영되는 것은 대중의 요구이다. 대중은 사극을 통해 현실에 없는 정치적 비전을 발견하고 싶어 한다. 사극에 나타나는 역사의 재해석은 그래서 마치 ‘온고지신’처럼 현재의 정치를 일갈하기도 한다. <선덕여왕>에서 덕만(이요원)이 삼한 통일에 앞서 그토록 찾으려 했던 ‘시대정신’, <추노>가 보여주었던 역사의 한 줄 아래 수없이 스러져간 수많은 민초의 고단한 삶이 의미했던 것, <공주의 남자>가 그려낸, 혁명을 위해 역사와 대적하는 상상력의 힘 등은 그것을 바라보는 현대인의 마음 한 구석을 자극한다. <추노>의 천성일 작가가 밝힌 “어떤 시대를 쓰는지보다 어떤 시대에 쓰는지가 중요하다”라는 말은, 사극이 과거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를 그리고 있다는 것을 잘 말해준다. 그렇다면 <뿌리 깊은 나무>가 그려내는 현재의 모습은 무엇일까.

지난 22일 종영한 <뿌리 깊은 나무>는 이미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해 오히려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한글’과 ‘세종’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교과서 속에서 시험 문제에나 나올 법만큼 박제화된 세종의 한글 창제에 관한 일화가 21세기 대중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그 몇백 년의 간극을 이어주는 키워드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소통’이다. <뿌리 깊은 나무>의 전제로서 소통하지 않는 왕, 태종 이방원(백윤식)이 먼저 등장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이방원은 어린 세종 이도(송중기)가 마방진 앞에서 모든 숫자(백성을 의미하는)가 조화를 이루는 세상을 꿈꿀 때, 중앙에 왕을 상징하는 숫자 하나(왕을 의미)를 남겨두고 주변을 모조리 치워버리는 ‘칼의 통치’를 말하는 인물이다. 아버지 이방원의 무력 앞에 부들부들 떠는 이도는 그 칼날에 죽어나간 사람을 마음 깊은 곳에 트라우마로 간직한 채, 자신이 꿈꾸는 ‘조화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칼의 힘이 아니라 글의 힘이다. 그래서 ‘한글’은 지식의 독점으로 기울어진 세상을 바로잡고, 막혀진 소통 체계를 열어주는 강력한 세종(한석규)의 무기가 된다.

여기서 전제되는 것은 ‘소통의 정치’를 꿈꾸는 자로서의 세종이라는 특별한 왕이다. 소통은 그리 쉽게 되는 것이 아니다. 왕의 고통과 희생을 요구한다. <뿌리 깊은 나무>는 완벽한 왕으로서의 세종이 아니라, 외로움과 고통을 감내하면서 때로는 자신의 울분과 분노를 표출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왕을 그린다. 모두가 왕의 책임을 묻는 상황의 힘겨움을 세종은 이렇게 토로한다. “이 조선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내 책임이다. 꽃이 지고 홍수가 나고 벼락이 떨어져도 내 책임이다. 그게 임금이다. 모든 책임을 지고 그 어떤 변명도 필요 없는 자리! 그게 바로 조선의 임금이라는 자리다.” 이 아픈 고백은 물론 백성을 사랑하는 세종의 마음과 그것을 아무도 이해해주지 못하는 외로운 심사를 담은 것이지만 현재의 정치에 시사하는 바도 클 것이다. 모두가 책임을 회피하려는 현재의 정치 행태를 접하고 있는 대중으로서는 세종의 이런 인간적인 토로는 차라리 감동으로 다가온다.

이 시대가 보여준 소통에 대한 두 가지 풍경 반영

ⓒ SBS
한글을 창제하고 반포하려는 세종과 그것을 막으려는 밀본 세력은, 그래서 고스란히 현재의 정치가 그려내는 소통에 대한 태도를 함의한다. 소통하려는 자와 불통하려는 자. 백성의 소리를 들으려는 자와 그것을 막는 자. 적들(?)에게 열린 사회를 지향하려는 세종의 일갈이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식견이 얄팍하다는 이유로, 신분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하극상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이유로, 나라 기강이 문란해진다는 이유로, 이런저런 이유로 백성의 입을 막는다면 과인은 대체 백성의 소리를 어디서 들을 수 있단 말이오.”

주목되는 것은 이른바 ‘재상 정치’를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실상은 자신의 기득권(글자를 독점함으로써 권력을 독점하는)을 지키려는 밀본이라는 세력이다. 밀본의 본원인 정기준(윤제문)은 한글이 가진 그 ‘역병’ 같은 힘을 직감하고 겁을 먹는다. 그것은 소통의 체계가 왕과 백성 사이에 놓인 자신 같은 신하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세상을 뒤엎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글을 반포하려는 세종과 그것을 막으려는 밀본의 대결은 마치 지금 우리 시대가 처해 있는 소통에 대한 두 가지 풍경을 그려낸다. 이른바 소셜 네트워크의 시대,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같은 새로운 소통 체계는 기성 소통 체계를 장악하고 있는 권력에게는 위협이 아닐 수 없다. <뿌리 깊은 나무>는 이 대결 구도를 마치 <100분 토론>을 보는 것처럼 세종과 정기준의 논리 대결로 풀어낸다. 정기준은 한글을 백성에게 주는 것이 왕이 져야 할 책임의 방기라고 몰아붙인다. 즉, 한글 하나 주고 이제는 백성들끼리 모든 것을 책임지며 살라는 얘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생겨나는 백성들 저마다의 욕망은 앞으로의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 것이라 위협한다. 하지만 세종은 그것이 왜 지옥이냐고 되묻는다. 이것은 소통의 책임에 관한 담론이다. 우리가 흔히 인터넷 소통 체계의 명과 암을 말할 때 늘 나오는 담론을 몇백 년 전 세종의 이야기를 통해 보게 된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송중기·백윤식. ⓒ SBS
때마침 있었던 서울 시장 선거에서 드러난 SNS의 힘과,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갑자기 들고 나온 ‘SNS 심의’ 발언은, <뿌리 깊은 나무>가 그린 한글 반포와 유포 과정에 대해 대중이 더욱 열광하도록 만들었다. 심지어 ‘밀본이 MB’라는 말까지 회자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정기준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역병 같은 글자’의 유포 과정은 그래서 마치 SNS가 가진 힘을 재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중요한 인물이 바로 소이(신세경)이다. 세종이 준비하는, 국가가 기관을 통해 백성에게 전파시키는 ‘반포’보다 더 강력한 것이 직접 백성들 속으로 들어가 입에서 입으로 전파시키는 ‘유포’가 훨씬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얘기는 그대로 현재의 SNS 시대가 몰고 온 새로운 소통 체계에 대한 알레고리가 된다. 모든 것을 한 번 보고 들으면 기억하는 소이는 사극판 컴퓨터인 셈이고, 그녀가 유포에 사용하는 부적과 노래는 SNS 같은 네트워크인 셈이다.

도대체 이 ‘역병 같은’ 소통의 욕망을 어찌 막을 것인가. 최근 정치권 일각에서 나오고 있는 “세종을 배우라”라는 요구는 그래서 <뿌리 깊은 나무>를 통해 새롭게 의미화된 ‘소통의 정치’에 대한 대중들의 욕망을 말해준다. 그러니 정치여! 만일 지금의 대중의 마음을 얻고 싶다면 밀본이라는 적조차 붕당으로 인정하고 토론하려 하는 <뿌리 깊은 나무>의 세종을 되새겨볼 일이다. 이제 막는다고 막아지는 세상은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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