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세 좋던 차베스, 강적 만났다
  • 조홍래│편집위원 ()
  • 승인 2012.02.21 0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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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 대선에 강력한 단일 야당 대통령 후보 출현…변화 바라는 국민, 철권 통치 종말 기대

철저한 반미주의로 종신 집권을 꿈꾸던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에게 강적이 나타났다. 26세에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차베스의 장기 집권 저지에 도전해온 엔리케 카프릴레스 라돈스키 미란다 주 주지사(39)가 그 주인공이다. 카프릴레스는 국제 사회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지만 베네수엘라에서는 젊은 풍운아로 비친다. 그는 차베스와 같은 대결 정책을 지양하고 단결과 화합을 표방하는 중도 진보의 개혁주의를 표방한다. 그의 노선은 신선한 바람으로 다가온다. 유권자들은 지평선에 나타난 변화의 조짐에 환호한다. 그는 2월12일 실시된 야권 대통령 후보 예비선거에서 네 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압도적 지지로 통합 야당의 단일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그동안 분열과 반목으로 얼룩진 베네수엘라 정치 풍토에서 야권을 통합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등장은 예사롭지 않다.

1999년에 집권해 13년째 베네수엘라를 장악하고 있는 차베스는 오는 10월7일 대통령 선거에서 네 번째 출마할 예정이다. 대다수 사람이 그의 당선을 기정사실로 보던 상황에서 카프릴레스의 도전은 돌풍처럼 정계를 강타했다. 차베스는 2009년 헌법 개정을 통해 대통령의 연임 금지 조항을 철폐함으로써 종신 집권의 길까지 마련했다. 그는 그래서인지 너무 자신만만했다. 자신의 권력에 대한 도전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을 정도로 종신 집권을 낙관했다.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공수부대장 시절 자신의 쿠데타 실패 20주년을 맞아 지난 2월4일 수도 카라카스에서 군사 퍼레이드 도중 손을 흔들고 있다. 그 옆은 딸 로사 비르지니아. ⓒ AP 연합

야당 분열시키는 양극화 정책이 화근 불러

그러나 민심은 변하고 있었다. 대세의 흐름을 눈치 채지 못한 사람은 차베스뿐이었다. 그는 빈민층에 대한 과감한 복지 정책으로 저소득층의 지지를 확보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 결과 소외계층의 삶의 질도 나아졌다. 이를 바탕으로 차베스는 대외적으로는 대결 노선을, 대내적으로는 야당을 분열시키는 양극화 정책을 폈다.

이런 접근은 그러나 화근을 불렀다. 이번 야당의 후보 단일화 선거 제도는 처음 도입되었다. 그 이면에는 야당을 더욱 분열시키려는 차베스의 음모가 숨어 있었다. 그의 시도는 단일 야당 후보의 출현으로 실패했다. 게다가  강력한 추진력에 힘입어 잘 돌아가던 경제가 2006년부터 내리막으로 치달았다. 인플레이션은 연 26%에 이르고 살인 사건 발생률은 남미 최고를 기록했다. 이른바 ‘차베스 피로감’이 사회 전반에 스며들었다. 이 피로감은 곧바로 변화에 대한 욕구로 응집되었다. 이 바람은 분열된 야당을 단결시켜 카프릴레스를 차베스의 대안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했다. 

베네수엘라 국민들은 흥분했다. 차베스의 철권 통치에도 종말이 올 수 있다는 기대가 충천하고 있다. 차베스의 반미 노선 때문에 골치를 앓던 미국도 첨예한 관심을 나타냈다. 차베스와의 기나긴 갈등이 마침내 막을 내리지 않을까 하는 전망까지 나왔다.

확신은 할 수 없으나 어쩌면 차베스 시대가 끝날 수 있다는 조짐들이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다. 카프릴레스는 경선 투표에서 62%를 얻었다. 예상을 훨씬 넘는 득표이다. 특히 빈민 지역에서 지지표가 많이 나왔다는 점이 주목된다. 차베스의 지지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는 얘기이다. 유권자들이 올해 57세의 노련한 차베스의 도전자로 젊은 후보를 선택한 것도 흥미롭다. 지난해 암에 걸려 건강에 적신호가 켜진 차베스를 젊은 지도자로 대체하려는 민심이 반영된 셈이다. 한 시민은 “카프릴레스는 지옥에서 우리를 구출한 구세주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수많은 지지자가 카프릴레스의 선거 본부 앞에 모였다. 이들은 ‘이것이 우리가 가야할 길’이라고 적힌 작은 깃발을 들었다. 하늘에서는 폭죽이 터졌다. 일부 군중은 춤도 추었다. 어떤 시민은 미국을 비롯해 세계의 주요 국가들과 사사건건 대결을 벌이는 차베스의 국정 운영 방식에 신물이 났다고 말했다. 차베스가 우호 관계를 유지한 나라는 이란, 쿠바, 시리아, 북한 등 반미 국가들이 전부이다.

이에 비해 카프릴레스는 대외 관계에서 비대결적이다. 그는 포용적 대외 정책으로 모든 국가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브라질 방식을 선호한다. 전 브라질 대통령 룰라 다 실바가 그의 멘토이다. 그의 유화적 접근은 많은 국민에게 영감을 주었다. 카프릴레스는 인구가 가장 많은 미란다 주 주지사이다. 이 주에는 수도 카라카스의 일부 지역도 포함되어 있다. 이는 수도권의 민심도 그의 선출에 반영되었다는 의미이다.

이제 10월의 대결은 차베스 집권 이후 가장 치열한 선거가 될 듯하다. 카프릴레스는 카라카스에 모인 수천 명의 군중에게 연설하면서 “베네수엘라를 단결시키는 과업을 국정의 최우선 목표로 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대결과 분열의 정치에 종지부를 찍겠다는 다짐도 했다. 그는 차베스의 정책은 비판했으나 그의 이름은 거명하지 않았다. 자신의 비대결 철학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사회 전반의 양극화 현상에 지친 시민들은 “단결하자”라는 호소에 열광했다.

차베스는 그동안 야당을 낡고 부패한 집단으로 매도했다. 그는 가끔 자신을 신(God)에 비유하면서 암을 이긴 것도 신의 뜻이라고 주장했다. 카프릴레스는 신에 도전하는 것이 오히려 기회일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차베스의 허구성을 은유적으로 비꼬았다.

카프릴레스가 차베스를 무너뜨리는 일은 만만치 않다. 차베스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빈민층 세력이 여전히 막강하고, 무엇보다 주요 권력 기관들이 그를 떠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베네수엘라 혁명을 완수할 수 있는 지도자는 자기뿐이라는 차베스의 호언장담을 믿는 사람이 아직 많다. 차베스 덕분에 살림살이가 나아진 빈민층과 국영 기업 직원들은 정권이 바뀔 경우 직장을 잃을까 걱정한다. 어느 정도 부를 축적한 기득권층은 차베스를 지지한다. 야당 후보들의 경선이 있기 전 차베스는 10월 선거에서 ‘쓴맛’을 보여주겠다며 40%의 지지를 확신했다. 2006년 선거에서 63%를 얻은 지지율을 스스로 낮춘 것은 자신의 인기 하락을 자인한 셈이다.

한 정치 분석가는 다가올 선거가 ‘비대칭적’임을 인정하면서도 야당이 지금처럼 강력한 전선을 구축한 것이 이례적이기 때문에 이변이 가능하다고 전망했다. 이 분석가는 유권자의 3분의 1이 아직 지지 후보를 결정하지 않았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의미심장하다고 지적했다. 과거의 선거에서는 이런 현상이 없었다. 처음부터 차베스 지지가 압도적이었다. 일요일 경선에서는 2백90만명이 투표했다. 예상보다 훨씬 높은 투표율이다. 카프릴레스는 2위 득표자의 두 배인 1백80만표를 얻었다. 그의 카리스마를 반영하는 지지율이다. 야당이 민심의 바람을 타고 조직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차베스에게 불리한 조짐이다. 

카프릴레스, 정치 초년생 이미지 벗어야 

차베스 대항마로 떠오른 카프릴레스. ⓒ EPA 연합
하지만 차베스의 패배를 단정하기는 이르다. 그에게는 국영 석유회사에서 거둬들인 거대한 자금이 있다. 빈곤층에 집중 투입한 막대한 사회 복지 프로그램의 약발도 남아 있다. 또한 정부 미디어들은 연일 차베스를 홍보하고 있다. 차베스와 그의 측근들이 TV에 얼굴을 내밀지 않는 날은 하루도 없다. 쇼맨십도 탁월하다. 암 투병 과정을 ‘초인’의 이미지로 포장했다. 정적을 궤멸시키는 수완도 대단하다. 

이에 비하면 카프릴레스는 정치 초년생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했다. 공직 경력도 의원, 시장, 주지사가 전부이다. 그래서 거인과 어린아이의 싸움이라는 말도 나온다. 차베스는 카프릴레스가 당선될 경우 베네수엘라의 미래는 소멸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거의 협박에 가까운 말이다. 이에 대해 카프릴레스는 온건하게 대응한다. 지금까지 나타난 현상을 보면 이 온건 작전이 먹히는 것 같다. 이래저래 베네수엘라의 대통령 선거는 예측을 불허하는 세기의 퍼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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