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만에 잠 깬 ‘포클랜드 전쟁’
  • 조홍래│편집위원 ()
  • 승인 2012.04.10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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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대통령, 영국에 영유권 해결 위한 협상 제의해 긴장 고조…현재 여건상 영국이 유리

포클랜드는 영국에서 1만4천㎞, 아르헨티나에서 4백80㎞ 떨어진 남대서양의 작은 섬이다. 이 섬의 영유권을 놓고 영국과 아르헨티나 간의 관계가 다시 긴장되고 있다.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포클랜드 전쟁 30주년인 4월2일 이 섬이 영국 땅이라는 주장은 억지라고 말했다. 런던에서 지구의 반 바퀴 거리나 떨어져 있고 아르헨티나 대륙붕에 닿아 있는 이 섬이 어떻게 영국 영토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녀의 말에는 일리가 있다. 그러나 이 섬의 영유권 분쟁 역사는 4백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무인도였던 이 섬이 처음 발견된 것은 16세기였다. 영유권 귀속 문제는 이 섬을 누가 제일 먼저 발견했느냐 하는 사실과 직결되지만 최초 발견자가 누구인지는 역사적으로 매듭지어지지 않았다. 포클랜드는 그 후 포르투갈·스페인·영국 사이의 영유권 다툼을 거쳐 1833년 영국의 자치령으로 선포되면서 국제법적으로 영국 영토가 되었다. 그로부터 근 2백년이 흘렀다. 이 섬에는 현재 영국계 주민 3천2백여 명이 살고 있다.

지난 4월1일 아르헨티나 남부 도시 우슈아이아에 있는 포클랜드 전쟁 기념관에 전쟁의 상징인 찢어진 국기가 펄럭이고 있다. ⓒ AP연합

영국, 유전 발견해 절대 양보 못할 입장

포클랜드를 국제 문제로 부각시킨 것은 1982년의 포클랜드 전쟁이었다. 당시 아르헨티나의 독재 정부는 군사 통치에 대한 국내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이 섬을 침공했다. 하지만 당시 영국 총리였던 마가렛 대처는 100척의 함정과 병력을 파견해 섬을 되찾았다. 대처는 이 작전 성공과 고질적 노사 분규를  해결한 리더십 덕분에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준비 없이 기습 침공을 당한 대처가 만일 작전에 실패했다면 사임해야 할 처지였다. 그해 4월2일부터 계속된 전쟁은 74일 만에 아르헨티나가 항복하면서 막을 내렸다. 아르헨티나 군정은 이 전쟁을 계기로 막을 내렸다. 그래서 이 전쟁은 아르헨티나 국민들에게 두 얼굴의 역사로 기억된다. 항복은 굴욕이지만 민주주의를 얻었기 때문이다. 이 나라는 그로부터 30년째 민주주의 정부를 유지하고 있다. 이 전쟁에서 아르헨티나 군인 6백49명과 영국군 2백55명이 죽었다.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순직 장병들을 추모하는 기념사에서 무력 침공은 군부 독재자들의 결정이었을 뿐 국민의 의사는 아니었다고 말해 묘한 여운을 풍겼다. 그러면서도 섬에 대한 영유권 주장은 철회하지 않았다. 그녀는 전쟁은 원하지 않는다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협상을 영국에 제의했다. 영국은 협상 자체를 거부했다. 역사적으로 영국 영토가 된 섬을 놓고 협상을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주장이다. 아르헨티나도 물러서지 않았다. 남미 12개국의 지지를 얻어 협상을 촉구하는 한편 5월에 열리는 미주 정상회담에서 이 문제를 다루겠다고 벼르고 있다. 아르헨티나가 이처럼 세게 나오는 것은 긴 군부 독재에서 벗어나 민주 국가로 변신하면서 국제적 위상이 높아진 덕분이다.

영국에서는 일단의 참전 용사들이 모여 순직 장병들을 추모하고 74일간 타는 촛불 하나를  켰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도 추모사를 통해 영국의 역사를 지킨 용사들을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말했다. 그는 포클랜드에 대한 영국의 권리를 단호히 지킬 것이라며 30년 전에 쟁취한 원칙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말해 이 섬에 대해 어떤 협상이나 양보의 여지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50여 명의 참전 용사가 모여 추도 미사를 올리고 일부는 영국 대사관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다. 두 나라의 표정으로 미루어 포클랜드를 둘러싼 긴장은 앞으로 더욱 높아질 듯하다. 더구나 포클랜드 해안에서는 최근 매장량 3억5천만 배럴의 유전이 발견되어 영국으로서는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입장이다. 포클랜드를 수호하기 위해 연간 3억2천만 달러를 지출하는 영국 정부는 유전 발견에 환호하고 있다. 포클랜드에는 현재 1천3백명의 영국군과 4대의 전투기가 배치되어 있다. 윌리엄 왕세자도 현지에서 한때 조종사로 근무했었다.

캐머런 총리는 의회에서 포클랜드의 미래는 주민들이 결정할 문제라고 말했다. 주민들이 영국의 자치령으로 남아 있기를 원하는 한 영국은 그들의 의사를 존중할 것이라는 말인데, 영어를 사용하는 주민의 61%는 영국 자치령으로 남기를 원하고 있다. 이런 배경은 국제 여론을 규합하는 과정에서 영국에 힘을 실어 준다. 포클랜드는 또한 남극 반도로 진입하는 수로에 위치하고 있어 남극의 해양 생태 조사를 실시하는 영국에게는 필수적인 섬이다. 

현재의 여건으로 보면 이 섬을 둘러싼 입장은 영국에 유리해 보인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의 분위기도 팽팽하다. 영국에 섬을 빼앗기기 전 1833년까지 한동안 이 섬을 위수령으로 다스렸던 아르헨티나는 그 시절을 잊지 못한다. 국민의 절대 다수는 이 섬을 되찾으려는 정부의 노력을 지지한다.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그래서인지 이 섬을 아르헨티나 말로 ‘말비나스(Malbinas)’라고 부른다. 한 퇴역 장교는 “말비나스는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아르헨티나 영토이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논리는 스페인이 이 섬을 아르헨티나에 준 것을 영국이 강탈했다는 것이다. 한 역사 교수는 말비나스는 아르헨티나 역사의 일부이며 영국의 영유권 주장은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격이다”라고 말했다.

아르헨티나, “치졸한 외교” 비판받아

1982년 5월17일 포클랜드의 스탠리 항에서 무기를 반납하기 위해 줄 선 아르헨티나 군인들. ⓒ 연합뉴스
그러나 30년 전 군사 정권이 정권 연장의 구실로 포클랜드를 침공했듯이 지금의 정부도 지지도 하락과 국내 경기 침체에 대한 불만을 희석시키기 위해 이 문제를 이용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따라서 페르난데스 대통령이 협상을 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다분히 시늉에 불과해 실현 가망성이 없다는 것이다. 영국의 논리대로 섬의 장래를 주민들의 의사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 국제 여론의 추세인 만큼 먼저 섬 주민들의 신뢰를 얻는 일이 급선무임에도 정부가 그런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불만도 많다. 하지만 주민 대다수가 영국식 민주주의와 문화에 만족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아르헨티나 정부가 주민들의 생각을 바꾸기는 어려워 보인다.

아르헨티나로서는 포클랜드가 자기 나라에서 가까이 있다는 것 외에 이 섬과의 현실적 유대가 전혀 없다. 영국은 교육·문화·사회적 인프라 면에서 이 섬에 많은 투자를 한 반면, 아르헨티나 정부가 섬 주민들을 위해 해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때문인지 포클랜드를 “영국 식민지로부터 해방시킨다”라는 아르헨티나 정부의 선전에 섬 주민들은 “웃긴다”라는 반응을 보인다. 아르헨티나는 최근 포클랜드와 거래하는 인접국들을 은근히 괴롭히는 조치를 취했다. 이런 행동은 결과적으로 아르헨티나에 대한 외국 투자를 감소시킨 결과를 가져왔다. 치졸한 외교를 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미국의 오바마 행정부는 2년 전 포클랜드 협상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표명해 영국을 격분시켰다. 영국의 격한 반응에 놀란 미국은 그 후 이 문제에 대한 입장 표명을 자제해오고 있다. 남미 국가 중 아르헨티나의 입장을 가장 선두에서 지지하는 사람은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다. 하지만 반미·반서방주의자로 정평이 난 차베스의 제스처는 상궤를 벗어난 그의 여러 행적 때문에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 포클랜드 문제는 또 다른 30년, 혹은 100년이 흘러도 현재의 상황이 송두리째 바뀌지 않는 한 해결될 전망이 없다. 미국의 워싱턴포스트는 아르헨티나가 ‘지는 싸움’을 하고 있다고 논평했다. 페르난데스는 이에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이는 엄연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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