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왜 “죽탕치겠다” 연발하나
  • 진희관│인제대 통일학연구소 소장 ()
  • 승인 2012.04.28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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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통첩’성 강경 발언 연이어 쏟아내…로켓 발사 이후 국제 기구의 압박 견제하는 효과 노린 듯

지난 4월15일 북한 김일성 100회 생일을 맞아 열린 대규모 군 열병식에서 김정은 조선노동당 부위원장(오른쪽 두 번째)이 거수 경례를 하고 있다. ⓒ AP 연합

북한군 최고사령부가 ‘선전 포고’에 가까운 언급을 하고 있다. 최근 두 달여 동안 나온 북한의 발언은 당장에라도 전쟁을 일으킬 것 같다. 가장 큰 특징은 과거에 존재했던 ‘조건문’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예컨대 “그러한 참변을 마다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본때를 맛보게 될 것”(2010년 8월5일 조평통 서기국 발표) 등과 같이, 예전에는 ‘만약 ○○한다면’ 식의 전제 조건이 있었다. 그러나 4월23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 특별작전행동소조 통고’는 “혁명 무력의 특별 행동이 곧 개시된다”이다. 조건 없는 최후통첩 형태이다. 그리고 “무력 행동의 대상은 남측 최고 지도자와 그 측근들 그리고 보수 언론 매체들이다. 개시되면 3~4분… 특이한 수단으로… 근원을 불이 번쩍 나게 초토화해버리게 될 것이다”라면서 마지막 문장에 “우리 혁명 무력은 빈말을 모른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하루 전인 22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 성명에서는 남측에 대해 “간섭하려 드는 나라가 있다면… 분노의 창끝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라고 겁박하고 있다. 이처럼 험악한 분위기를 가져온 문건의 시작은 4월18일 최고사령부 대변인 성명에서 비롯된다. “서울 한복판이라 하여도 우리의 최고 존엄을 헐뜯고 건드리는 도발 원점으로 되고 있는 이상 그 모든 것을 통째로 날려 보내기 위한 특별 행동 조치가 취해질 것이다”라고 하여 ‘청산해버리기 위한 성전’을 벌여나갈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강성대국’ 표방에도 성과 없어 반전 꾀하나

지난 3월7일 김관진 국방부장관(맨 왼쪽)이 해병 연평부대를 찾아 군사 대비 태세를 점검하고 장병들을 격려했다. ⓒ 연합뉴스
물론 한때 반전 ‘기회’를 삼으려는 의도도 포착되었다. 최고사령부 대변인 성명을 발표한 다음 날인 4월19일 북한의 ‘정부·정당·단체’ 성명에서는 “(태양절 행사 비난에 대해) 당장 사죄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괴뢰 역적 패당을 영영 쓸어버릴 것이다… 경거망동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해 남한의 반응을 기다린 측면도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이에 대한 우리 정부의 공개적인 답변은 없었고, 대신 같은 날 국방과학연구소는 최신형 미사일을 공개했다. 특히 정확성과 성능 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며 북한 전역을 타격할 수 있는 사거리를 갖춘 순항 미사일을 ‘자랑’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북한의 강경 자세에 맞불을 놓는 발언들이 이어졌다. 결국 4월21일 평양시 군민대회를 시작으로 ‘흔적도 없이 죽탕쳐버리자’는 구호 아래 매일 북한 전역에서 군중대회가 진행되었고, 4월23일자 로동신문 정론에 ‘거족적인 성전’이라는 제목이 게재되기도 했다.

이렇듯 지금 한반도를 둘러싼 험악한 분위기는 사실상 김정일 사망 직후 조문 문제에 대한 북한측의 불만에서부터 시작된 측면이 있다. 특히 2월 말부터 시작된 강경 발언들에서 구체화되었다. 2월25일 북한 국방위원회 대변인 성명, 3월2일 최고사령부 대변인 성명, 3월3일 국방위원회 내·외신 기자회견 그리고 전국적인 군중대회가 각지에서 진행되어 이미 남북 간 긴장이 고조될 것임이 예견되고 있었다. 더욱이 3월 초에는 김정은 당시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이 처음으로 판문점을 방문했고, 전략로켓사령부를 ‘현지 지도’해 군사적 위기감을 고조시킨 시점과도 일치한다. 3월 말 서울에서 개최된 핵안보정상회의를 전후로 위기 국면은 넘어가는가 싶었지만, 장거리 로켓 발사와 4월15일 태양절 100주년 행사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남북 관계를 악화시키는 소재들이 북한을 더욱 자극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북한이 초강경 일변도로 나가는 데는 여러 원인이 존재할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신임 지도부의 대내적 지도력 확보의 문제와 대외적 메시지를 동시에 가진다고 볼 수도 있다. 즉, 김정은이라는 젊은 지도자의 권위를 확보해나가는 과정에서 한반도 위기를 활용하는 측면이 존재할 것이라는 점은 자명하다. 그리고 내부적으로 ‘강성대국’ 지향을 표방하고 있지만 딱히 뚜렷한 성과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찾기 어렵다는 점에서, 의도적인 남북 관계 악화를 계기로 인민 대중들의 ‘복수심’을 자극해 전인민적 군중대회를 통해 결속을 다지는 전술을 채택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또한 장거리 로켓 발사로 빚어지는 국제기구의 대북 압박을 견제하는 효과를 노리는 행위라는 분석도 설득력을 더한다. 지금의 상황을 두고 미국 국무부 역시 실제 북한의 무력 도발을 배제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 경우 추가 대북 제재 방침이 실행될 때의 위험성은 더욱 커질 수 있을 것이며, 따라서 북한의 초강경 반응들은 국제 사회의 ‘합리적’ 판단에 장애 요인이 될 수도 있으리라는 전망이다.

정부가 북한의 폭력성만 부추겼다는 지적도

이처럼 다양한 해석이 나옴에도, 역시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한반도의 위기관리에 있다. “다른 외부 요인들에 대한 분석도 중요하지만, 좀 더 직접적으로 남북 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관리해나가는 능력이 더 필요하다”라는 전문가들의 지적도 그래서 제기된다. 이명박 정부의 지난 4년여 기간 동안 남북 관계는 항상 초긴장 상태를 이어왔다. 남북한 모두 서로 비난하기에 급급했고, 상대방에게 결렬의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일관되게 ‘전략적 인내’ 방식을 주장해왔지만, 결과적으로 북한의 ‘버릇’을 고치지도 못했고, 오히려 더욱 북한의 폭력적인 성향만 부추겼다는 비난마저 뒤따른다. 

북한 문제 전문가들은 지난 4년을 돌이켜보면서, 한반도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는 기회도 적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실제 이명박 정부 초기 북한은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2008년 3월 말 우리 군 수뇌부의 대북 핵시설 정밀 타격 필요성 언급과 통일부의 업무보고에서 6·15와 10·4 선언이 누락되면서 2008년 4월부터 이명박 정부를 실명으로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2009년 8월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때 방문한 특사 조의 방문단이 청와대를 예방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고,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실명 비난이 사라진 적이 있다. 심지어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한 제3국에서의 비밀 접촉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비밀 접촉 과정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2010년 3월부터 이대통령에 대한 실명 비난이 재개되었다. 그리고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건이 이어지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2011년 1월 북한의 조평통이 당국 간 대화를 제의하고 심지어 금강산 관광 재개를 위한 당국 간 회담을 갖자는 제의(1월12일)를 내놓으면서 반전의 계기가 마련되는 듯했다. 그러나 5월 베이징 비공개 접촉에서 ‘돈 봉투’ 사건이 발생하면서 관계는 다시 악화되고, 결국 12월 김정일 사망으로 북한의 사정은 매우 민감한 형국이 된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과거 냉전 체제의 군사 정권 시절에도 수십 차례에 걸쳐 특사를 비밀리에 방북시키고, 북측 고위 인사들을 극비리에 서울로 초청해 위기관리를 해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외형적으로는 서로 대립해왔지만, 세밀한 노력을 통해 나름으로 한반도의 위기를 관리해온 것이다. 지금의 남북 관계에서 이명박 정부는 북한을 관리할 어떠한 지렛대도 갖고 있지 못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오히려 남북 관계는 대책 없는 ‘치킨 게임’의 양상을 띠고 있다. 지금 이명박 정부는 ‘파국을 막느냐, 방치하느냐’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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