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 이론 깨버린 ‘노인의 위험 자산 사랑’
  • 전영수│한양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
  • 승인 2012.05.06 02:58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본의 사례에서 배우는 100세 시대 노후 자산 포트폴리오

ⓒ EPA연합
한국 노인들은 돈이 없다. 장수 사회에 진입한 선진국과 비교해 특히 그렇다. ‘내리사랑’이라고 자녀에게 다 퍼주니 정작 자신의 노후는 무일푼에 내몰렸다. 70대까지 자산이 커지는 미국은 물론 총 가계 자산의 60% 이상을 움켜쥔 일본 노인이 부러울 따름이다. 치우친 보유 자산의 편입 비중도 문제이다. 사면 오른다는 맹목적인 토지 신화의 부작용이다. 가계 자산 중 실물 자산(76.8%)이 금융 자산(23.2%)의 세 배 이상이다. 연령이 높을수록 부동산 쏠림 현상은 더 심화된다. 은퇴 생활 때 중요한 유동성(금융 자산)은 부동산(실물 자산)에 묶여 늪에 빠졌다. 여유 자금이나마 있다면 다행이다. 빈부 격차의 클라이맥스가 노노(老老) 그룹에 나타난다는 점을 볼 때 평균 이하의 자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절대다수이다. 극소수가 움켜쥔 거대 자산이 평균을 올렸을 뿐이다. 평균치의 함정이다. 때문에 대다수가 막막한 걱정뿐 뾰족한 대안이 없다. 갈 길은 멀어졌는데 노잣돈은 적으니 답답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이론보다 힘이 센 것은 현실이다. 그래서 이론은 늘 현실 설명력을 높이며 진화한다. 고빗사위에 선 한국 노인의 노후 자금 확보 현실도 장기간 정설로 받아들여진 투자 자산 선호 이론에 수정의 압박 강도를 높였다. 이론과 괴리된 고령 인구의 위험 자산 선호 현상 때문이다. 금융 이론을 종합하면 고령 인구는 위험 자산보다 안전 자산을 좋아한다. 나이가 들수록 위험 회피적인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연령별 포트폴리오를 보아도 연령과 안전 자산은 비례한다. 자산 시장에서는 위험 자산 보유 비중을 ‘100-나이’ 셈법으로도 소개한다. 연령 변화에 따라 편입 비중을 바꾸는 라이프사이클 펀드도 연령 증가와 안전 선호가 대전제이다. 그 샘플이 될 사례가 주식이다. 생애 주기 자산 배분(Lifetime Asset Allocation)에 따르면 노인은 주식을 싫어한다. 즉, 은퇴에 가까워질수록 주식을 줄이고 저축을 늘린다. 근로소득이 있는 현역 세대는 그 반대이다. 고령화와 자산 구성에 대한 역U자형 주식 수요를 연구한 결과도 있다. 젊었을 때에는 주식 비중이 낮다가 40대에 정점을 찍은 후 은퇴 시점에 다시 줄어든다는 실증 결과이다. 자산 시장 붕괴 가설(Asset Market Meltdown Hypothesis)도 비슷하다. 베이비부머 등의 은퇴 이후 이들의 자산을 흡수할 후속 세대의 경제력 저하로 위험 자산 선호도가 떨어질 것이라는 이론이다. 위험 프리미엄 증가설도 있는데 역시 노인일수록 안전 자산을 챙긴다고 본다. 요컨대 ‘고령자=안전 자산’ 등식은 확고했었다. 

장수 리스크가 ‘안전 자산 선호’ 버리게 해

그런데 요즘은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고령자가 위험 자산에 러브콜을 날리며 기존 이론을 과감히 깨뜨린 사례가 증가했다. 그동안 소수 반론에 그쳤던 ‘고령자=위험 자산’ 등식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고령자가 위험 자산을 선호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는 연구 결과도 원래 있었다. 과거의 특정 경험이 노인이 되었어도 위험 자산을 선호하게 한다거나(Cohort Effect), 자녀에 대한 유산 동기가 위험 자산을 늘리는 유인 요소가 된다는 가설이 그렇다. 보유한 금융 자산이 많을수록 주식 비중이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손실을 받아들이는 심리적 방어 수준이 달라서다. 최근에는 또 다른 이유가 가세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장수 리스크가 위험 자산을 받아들이도록 했을 가능성이다. 100세 시대인데 60대 때 소득이 중단되면 이후 40년간의 생존 방법이 없어져서다. 있다면 자산 운용뿐이다. 이때 쌈짓돈의 운용 효과(기대 수익)를 키우려는 불가피한 선택지가 ‘위험 자산 적극 편입’이라는 얘기이다. 운용 수익을 늘리자면 위험도 커질 수밖에 없다. 또 노인 인구에게 더 두려운 것은 손실 위험보다 장수 위험이다. 고위험·고수익의 전형인 주식·펀드에 5060세대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배경이다.  

한국 노인의 인식 변화는 이제 공고했던 자산 이론마저 깨뜨릴 찰나이다. 수명 연장에 따라 자금을 마련해야 한다는 압박이 투자 교과서를 바꿀 만큼 거세진 결과이다. 대안이 없다는 점에서 노인 인구의 주식·펀드 선호는 좀 더 확산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징후는 갈수록 짙어진다. 연령대별 주식 보유 현황을 보면 노인의 주식 선호는 확실히 대세이다. 노인 투자자(60세 이상)는 78만3천명으로 지난해에 비해 17만7천명이 더 늘어났다. 주식 투자자 여섯 명 중 한 명이 노인이라는 얘기이다. 4050세대의 감소세와는 대조적이다. 액수도 크다. 노인 보유액이 시가총액의 33.7%를 차지해 55~59세(14.8%), 50~54세(14.7%)를 월등히 따돌렸다(한국거래소, 2010년). 특히 2009년(24.6%)보다 10%나 늘어났다. 연령별 1인당 평균 보유액을 보아도 60세 이상(1억2천90만원)이 가장 많다. 현역 절정기인 40~44세(4천3백80만원), 45~49세(5천3백70만원)의 두 배를 넘겼다. 객장 풍경을 의미하는 키워드가 ‘장바구니’에서 ‘흰머리’로 바뀐 결과이다. 한국 노인들의 주식 선호는 꽤 이례적이다. 대다수 장수 국가에서는 안전 자산을 좋아하는 데다 위험 자산에 넣었어도 장시간에 걸쳐 서서히 늘린 경우가 보편적인 까닭에서다. 그러니 무리수도 많다. 인기에 편승해 단기 매매에 치중하거나 파생상품에 기웃대는 노인이 적지 않다.

그렇다면 은퇴 대국 일본은 어떠할까. 원래 고령자의 위험 자산 선호 현상은 일본이 원조이다. 비교적 일찍부터 노인 인구의 위험 자산 편입 비중이 높았다. 물론 이율배반적이다. 보편적인 일본인의 투자 성향에서는 안전성이 최고 잣대이다. 유독 노인 그룹만이 위험 자산에 밝다. 이유는 한국 노인의 장수 압박과 동일 선상에서 찾아진다. 반대로 열도의 투자 성향은 확실히 안전 자산 지향적이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금융 자산에서의 예금 비중이 네 번째로 높다(2010년). 보험·연금까지 포함한 안전 자산 합계 비중은 사실상 1위이다. 반면 주식 비중은 바닥권이다. 주식 비중이 일본(11.0%)보다 낮은 국가는 그리스(8.8%)와 슬로바키아(6.1%)뿐이다. 버블 시기만 해도 불나방처럼 위험 자산에 달려들었지만 지금은 정반대이다. ‘불리기’보다는 ‘지키기’가 최대 과제로 안착했다. 원인은 많다. 장기간 지속된 절대 저금리와 경기 침체가 대표적이다. 줄어든 투자 여유 탓이다. 뼈아픈 참패 기억도 위험 자산과 결별한 계기였다. 한국과 달리 투자 자산의 라인업이 적다는 점도 위험 자산에 대한 관심이 하락한 이유이다. 당연한 결론인데, 기대 수익도 낮다. 1년 예금 금리(정기)가 0.03%이니 0.1% 제시 이율에 목돈이 몰릴 수밖에 없다.

은퇴 이후 지출 수준이 높은 것도 원인

일본인의 안전 자산 선호 현상은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물론 대세는 안전 지향성이다. 위험 회피적인 투자 관행이 경제 발전을 가로막는다고 보아 정부가 투자 메리트를 높였을 정도이다. 2000년대 이후 ‘저축에서 투자로의 패러다임 전환’ 캠페인이 대표적이다. 현금·예금 형태로 잠자는 거액의 가계 자금을 끌어내 내수 부양과 화폐 유통을 자극하기 위한 조치였다. 저축에서 투자로의 방침 전환은 2001년 발표된 ‘골태(骨太) 방침’에서였다. 굵은 뼈까지 개혁하겠다는 의미의 개혁 청사진이었다. 이에 따라 2003년부터 주식·펀드 매각 이익과 배당·분배금에 대한 세율을 20%에서 10%로 낮추는 우대 세제를 실시했다. 예·적금 금리는 그대로 20%를 유지했다. 성과는 있었다. 2001년 10.1%였던 주식 보유 비중이 이후 17.2%(2007년 3월)까지 올라섰다. ‘와타나베 부인’으로 상징되는 FX(외환) 거래도 유행처럼 번졌다. 손쉬운 투자를 위해 부동산 등의 유동화 상품도 등장했다. 다만 10여 년이 지난 현재 포트폴리오는 제자리로 돌아왔다. 위험 자산은 급감했고, 안전 자산이 재차 패권을 쥐었다. 여기에는 금융 위기도 한몫했다. 피해는 가계 손실로 직결되었다. 불만도 늘어났다. ‘저축→투자’로의 캠페인적 슬로건이 결국 국민을 속인 사기극에 불과했었다는 위화감이 대표적이다. 소득 정체·하락 와중에 없는 돈까지 끌어다 위험 자산에 넣은 현역 세대의 배신감은 더 컸다.

이로써 일본 가계의 안전 자산 선호 심리는 한층 공고해졌다. 2010년 기준(6월)으로 금융 자산(1천4백45조 엔) 중 56%가 현·예금(8백6조 엔)에 집중되었다. 그 밖에 보험·연금(3백93조 엔)과 주식(95조 엔)·주식 이외(91조 엔)로 구성된다. 보험·연금까지 합해 전체 자산의 83%(1천1백99조 엔)가 원금 보전 형태로 운용된다(총무성, 2010년). 장기 추이도 비슷하다. 연도별로 약간 변하지만 안전 자산이 주력 상품이 된 것은 추세적이다. 실제 의식 조사에 따르면 금융 상품 선택 기준 1순위는 안전성(44.9%)이다. 유동성(31.0%)과 수익성(16.6%)은 우선 대상에서 밀린다. 운용 목적이 질병·재해 대비(69.3%)와 노후 대비(61.6%)가 압도적이라는 점에서 그만큼 원금 보전 욕구가 반영된 결과이다(금융광보중앙위, 2008년). 국제 비교도 마찬가지다. 한·미·일 3국의 금융 자산을 비교하면 한국·일본은 현·예금 비중이 높지만, 미국은 주식·채권·펀드 비중이 높다. 투자 목적은 한·일 양국이 다르다. 한국은 시세 차익이 주류이지만 일본은 배당·이자 소득(54.1%), 장기 운용 성과(50.0%)가 압도적이다. 장기 투자는 보편적이다. 1년 이상 보유한 상품이 전체의 87.5%를 차지했다. 이 중 보유 기간 10년 이상의 비율도 30.3%에 달했다(금융투자협회, 2010년).

상황이 이런데 유독 노인 그룹만이 여기서 예외이다. 고령 가구의 주식 비중이 전체 평균보다 약 두 배나 높았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보유 비중이 낮아졌지만 여전히 전체 평균을 월등히 앞선다. 정년 이후 평균 노인의 자산 운용 의지가 적극적이라는 의미이다. 은퇴 이후 근로소득은 확연히 줄어드는데 지출 수준은 그대로이거나 혹은 거액 지출이 불가피한 사태가 빈번히 발생해서다. 노후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위험 자산을 선호하는 이유이다. 고령 세대의 예비적 동기에 의한 저축 및 운용 필요가 위험 자산 선호로 연결된다는 얘기이다. 이때 단순 저축만으로 기대 수익을 맞추기는 힘들다. 그래서 위험 자산이 돋보인다. 금융 자산 중 위험 자산(주식·채권 합계) 보유 비율은 30대가 10%인 데 비해 60대는 17%이다(내각부, 2010년). 최근 인기 절정인 고위험의 신흥국 투자 자산(통화·주식 등) 편입 고객 중 상당수도 고령 고객이다. 고배분 펀드 및 해외 부동산 펀드 등이 대표적이다. 실제 통계(연령별 가계 금융 자산 보유 비중)를 보자. 연령별 금융 자산(2009년)은 20대(2백94만 엔)와 30대(5백98만 엔)가 60대(2천2백2만 엔)와 70대(2천3백61만 엔)보다 적다. 이 중 주식·펀드 편입 비율은 20대(4%)·30대(5%)보다 60대(8%)·70대(12%)가 훨씬 높다.

주식은 일본 노인들에게 기쁨 준 존재로 각인

그렇다면 일본 노인들이 주식을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본 노인의 생애 궤적과 당시 환경을 중첩시키면 일정 부분 힌트가 도출된다. 먼저 일본 가계의 주식 기피 현상은 역사가 짧다. 장기 통계를 보면 1965년의 주식 비중은 17.6%로 나타났다. 당시 가계 자산(32조 엔) 중 6조 엔이 주식(출자금 제로)이었다. 1950년대에는 금융 자산 중 50%가 주식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1980년대에도 10~20%대를 줄곧 유지했었다. 버블이 한창이던 1988년 23%까지 치솟은 이후 1996년 일순간에 8.2%까지 떨어졌다. 주식 회피는 이때부터 본격화했다. 1997년 야마이치(山一) 증권사가 도산한 것도 계기가 되었다. 주식 배척 이유로는 위험 수용의 금전 여유를 갖춘 현역 세대가 줄어들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반대로 일본 노인의 주식 선호 배경에는 불가피성이 매우 크다. 거품 붕괴와 자산 추락 등 일련의 악재에도 주식이 아니면 노후 자금을 확보하기 힘든 상태에 직면해서다. 이 상황에서 일본 노인들이 위험 자산에 투자하는 행위는 사실상 꽤 합리적인 선택 결과이다. 고도 성장을 경험한 고령자에게 주식이 익숙한 투자 자산 중 하나였다는 점도 관련이 깊다. 투자 수익이 높았다는 기억의 공유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