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수사, ‘청와대 윗선’으로 향하나
  • 김지영 기자 (young@sisapress.com)
  • 승인 2012.05.21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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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나온 진경락 작성 문건에 ‘VIP 또는 대통령실장 보고’ 명시…청와대는 “무관한 일” 해명 되풀이

ⓒ 청와대공동취재단·연합뉴스

검찰의 민간인 불법 사찰 수사의 칼끝이 갈수록 ‘청와대 윗선’을 향하고 있다. ‘청와대 윗선’으로는 이명박 대통령과 전직 대통령실장 등이 거론되고 있다.

국무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지원관실)에 근무했던 경찰청 소속 김기현 경정의 사찰 문서 2천6백건이 지난 3월 공개되어 큰 파장을 일으켰다. 최근에는 진경락 전 지원관실 기획총괄과장이 작성한 문건들이 양파 껍질 벗겨지듯 하나씩 공개되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검찰 수사가 진행될수록 민간인 사찰 사건의 실체가 점점 더 드러나고 있다. 

현재까지 드러난 ‘진경락 문건’은 크게 두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지원관실이 이대통령을 비난했던 새누리당 정두언·현기환 의원과 민주통합당 백원우·이석현 의원 등을 불법 사찰한 의혹이 그 하나이다. 여기에 ‘공직윤리지원관실의 업무 추진 지휘 체계’ 문건까지 공개되었다(중앙일보 5월16일자). 2008년 7월21일 지원관실이 출범한 지 한 달 뒤인 그해 8월28일 진 전 과장이 작성한 것이다.

이 문건에는 ‘공직윤리지원관실이 노무현 정권 인사들의 음성적 저항 등으로 VIP(이대통령)의 국정 수행에 차질이 빚어지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일반 사항은 총리에게 보고하되, 특명 사항은 청와대 비선을 거쳐 VIP 또는 대통령실장에게 보고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지원관실=친위 조직’ 사실로 확인돼

청와대는 2년 전 민간인 불법 사찰 사건이 처음 불거진 이후 지금까지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청와대와는 무관한 일이다”라고 선을 긋고 있다. 김기현 경정의 사찰 문서에서 ‘BH(청와대) 하명’이라고 표기된 사실이 드러났을 때도 “청와대가 사찰을 지시하거나 보고받은 일이 없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급기야 이영호 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 등이 구속되고, 진경락 문건에서 ‘VIP 또는 대통령실장 보고’라고 명시되었음에도 같은 해명만 되풀이하고 있다.

하지만 파장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우선 문건을 통해 지원관실이 ‘친이 세력’과 ‘영포 라인’의 비선 조직이었고 특히 ‘VIP께 절대 충성하는 친위 조직’이었음이 다시 확인되었다.

사정 당국의 한 관계자는 “지원관실이 2008년 7월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는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터진 촛불 집회로 정권은 큰 위기의식을 느꼈다. 이에 이영호 비서관을 비롯한 영포 라인 인사들이 ‘촛불 집회와 같은 사태가 앞으로도 계속되면 정권 내내 힘들어진다. 우리가 직접 나서서 이 정권을 보위해야 한다’라고 결의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면서 발족한 것이 지원관실이다. 당연히 청와대 ‘윗선’의 재가를 받았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이대통령도 이 조직의 실체를 알게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라고 말했다.

여야 불문하고 정치권에서 이번 사태와 관련해 청와대를 바라보는 시각은 매우 싸늘하다. 야권의 비난 수위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박지원 민주통합당 비대위원장 겸 원내대표는 5월17일 YTN 라디오에 출연해 “민간 사찰의 몸통은 역시 이명박 대통령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당시 민정수석인 현 권재진 법무부장관께서 여러 정황으로 (민간인 불법 사건 은폐에) 개입되어 있는 것이 사실인데도 아직도 장관께서는 변명을 하고 있다”라고 싸잡아 공격했다.

여권에서조차 청와대를 압박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친박계가 친이계를 옥죄는 형국이다. 이상일 새누리당 대변인은 “문건에는 ‘VIP 보고’ ‘VIP 지시 사항’ 등의 단어도 등장한다. 검찰은 현 정부에서 지원관실이 무슨 일을 했는지 낱낱이 밝혀야 한다. 청와대와의 관련성도 정확하게 규명해야 한다”라고 논평했다. 이처럼 여야 모두 진실 규명 의지가 강하다. 때문에 19대 국회가 개원하면 국정조사나 청문회가 성사될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적지 않다. “이대통령이 민간인 사찰 의혹에 대해 직접 해명해야 한다”라는 여론도 비등해지고 있다. 

검찰 출입기자들 “뭔가 큰 것 있는 것 같다”

검찰의 수사 예봉도 날카로워지고 있다. 검찰은 지난 5월17일 ‘파이시티 인·허가 로비 사건’으로 구속된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을 소환 조사했다. ‘현재는’ 참고인 신분이다. 하지만 박 전 차관은 지원관실 창설 과정과 불법 사찰, 증거 인멸 등에 모두 관여되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으며, 불법 사찰의 ‘몸통’으로까지 불리고 있다. 검찰도 그동안 박 전 차관과 이영호 전 비서관을 핵심 인물로 보고, 증거 확보에 주력해왔다. 따라서 불법 사찰과 관련한 박 전 차관의 운명도 쉽게 예측할 수 없다. 특히 박 전 차관에 대한 수사가 ‘청와대 윗선’ 수사로 가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관측이 많다.

이에 대해 검찰 관계자는 “너무 나가지 마라. 현재는 문건의 실행 여부를 확인하고 있다”라고만 말했다. 문건에 적시된 ‘특명 사항은 VIP 또는 대통령실장에게 보고’ 등에 대해 실제로 그렇게 실행했는지를 수사하겠다는 의지가 강한 것으로 알려졌다. 수사 진척에 따라서는 전직 대통령실장 등이 검찰에 나가 포토 라인에 서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검찰은 수사팀을 보강했다. 서울중앙지검 소속 특수부와 형사부 등의 검사 다섯 명을 추가로 투입한 것이다. 한 검찰 출입기자는 “(민간인 불법 사찰 문제를 수사하고 있는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 박해윤 부장검사가 검찰 출입기자들에게 다른 사안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유롭게 얘기를 하지만, 민간인 불법 사찰 부분에서만큼은 굳게 입을 다물고 있다. 출입기자들 사이에서는 ‘무언가 큰 것이 있는 것 같다’라는 말이 오가고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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