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금연·절주, 긍정적 사고가 건강 비결”
  • 감명국 기자 (kham@sisapress.com)
  • 승인 2012.06.02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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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설립 80주년 맞은 인제대·백병원 백낙환 이사장 인터뷰 / "해운대 백병원은 외국인 의료 관광의 중심으로 성장할 수도”

ⓒ 시사저널 임준선

1926년생으로 올해 나이 86세. 백낙환 인제대·백병원 이사장(의학박사)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쁜 80대’로 불린다. 실제로 백이사장은 수십 년째 젊은이도 소화해내기 힘든 살인적인 일정을 이어가고 있다. 전국의 다섯 개 백병원(서울·부산·상계·일산·해운대)과 경남 김해시 인제대학교를 운영하면서 매주 한 차례도 빠지지 않고 서울과 부산, 김해를 오가고 있다. 결재뿐만 아니라 교수·교직원 면접은 물론 간호사 면접도 직접 진행한다. 매주 월요일 오후 의대 본과생, 전공의, 교수들로 구성된 외과 팀으로부터 직접 보고도 받는다. 의료 시장 개방에 대비해 ‘의료도 산업화해야 한다’는 개인적 신념과 소신을 각 신문 등 매체에 칼럼과 기고문 형식으로 수시로 기고하고, 여러 차례 ‘의료포럼’도 열었다. 매주 월요일 저녁에 여는 ‘경영자 독서 모임’에 10년 넘게 개근하고 있기도 하다.

백이사장은 진보학계의 원로인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의 친형이기도 하다. 올해로 백병원 설립 80주년을 맞아 80대 후반의 나이에도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백낙환 이사장을 5월19일 서울백병원 사무실에서 만났다.

백병원이 설립 80주년을 맞이했다. 일제 강점기로 거슬러 오르는 상당히 오래된 역사인데….

큰아버지이신 백인제 박사께서 1916년 서울대 의대 전신인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셨으나, 1919년 3월1일 ‘3·1 운동 시위’에 적극 가담한 죄로 경찰에 체포되어 8개월간 옥고를 겪으셨다. 물론 경성의전에서도 퇴학을 당했다. 이후 총독부와 경성의전의 유화 조치 덕분에 복학을 했고, 수석으로 졸업하셨다. 당시 큰아버지를 눈여겨본 스승이 일본인 우에무라 준지 교수였는데, 1924년 지금의 서울백병원 자리에 자신의 개인병원을 세워 8년 정도 운영하다가 1932년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애제자였던 큰아버지에게 병원을 물려주었고, 그때 설립된 ‘백인제 외과의원’이 지금 백병원의 시초가 되었다.

백인제 박사는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는데….

그렇다. 1952년의 일이었다. 그 일로 인해 사실 병원은 굉장히 큰 위기를 맞았다. 설립 초기 30여 병상 규모로 출발해 이후 최대 100병상까지 증가하며 당시로서는 전국 최대 규모였던 백병원은 쇠락의 길에 접어들었다. 반면 서울 곳곳에서는 세브란스병원, 가톨릭성모병원 등 대규모 종합병원이 신설되었다. 유능했던 의료진이 하나씩 병원을 떠나가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1963년 2대 원장이었던 김희규 박사가 재단 해체라는 마지막 처방을 내리고 가톨릭대학으로 자리를 옮기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위기를 어떻게 극복했나?

내 나이 36세 때인 1961년 1월, 원장 직무대행으로 백병원의 운영을 맡게 되면서 현대식 종합병원 건설로 제2의 도약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정면 돌파 외에 다른 선택이 없었다. 납북되신 큰아버님과 아버님(백붕제 변호사)께서 공익 재단을 설립하며 세웠던 ‘인덕제세(仁德濟世), 인술제세(仁術濟世)’의 뜻을 내가 실천에 옮겨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내 결단으로 천신만고 끝에 1975년 서울백병원이 현재의 모습으로 완공되면서 종합병원으로 재도약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1979년 학교법인 인제학원이 설립되어 의과대학과 부산백병원을 개원했으며, 1989년 상계백병원, 1999년에는 일산백병원을 연이어 개원하기에 이르렀다. 지난 2010년 3월에는 우리나라 최고의 휴양지인 해운대에 해운대 백병원을 개원하는 등 현재 다섯 개 병원, 4천여 병상 규모로 성장했다.

“지역 사회에서 받았던 사랑에 보답하고파”

최근 수도권 대학과 지방 대학 간의 격차가 점차 커지는 추세에서 인제대 역시 어려움이 많을 듯한데.

인제대는 뿌리가 깊고 튼튼한 대학이다. 인제대의 모체인 백병원이 우리나라 최초의 민립 공익법인이었던 것처럼 백병원 재단도 병원에서 얻은 수익을 사회에 되돌려 육영 사업에 전력을 다해왔다. 인제대는 30여 년의 짧은 역사에도, 의과대학에 이어 2010년 약학대학 유치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냈으며, 교육인적자원부가 전국 대학의 취업률을 조사해 발표한 2004년 이후 8년 연속 높은 취업률을 기록하며 취업 명문 대학으로 자리매김했다. 교과부의 교육 역량 강화 사업 대상으로 5년 연속 선정되어 재학생 1인당 지원금이 전국 사립대 중 1위를 차지하는 쾌거도 올렸다. 학생 1인당 투자 교육비도 부산·울산·경남 지역에서 1위, 전국에서 11위를 차지하고 있다.

인제대와 백병원이 서울이 아닌 지방에 자리 잡게 된 이유가 있었나?

의료 사업을 통해 교육 분야에 진출하는 것은 설립자이신 큰아버님의 꿈이기도 했다. 그 뜻에 따라 서울백병원이 자리를 잡으면서 나는 본격적인 대학 설립에 나섰다. 마침 1977년 정부에서 민간병원의 건립을 지원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정부는 특히 지방의 의료 취약 지구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면서 의료기관에 행정·재정 지원의 기회를 제공했다. 그래서 당시 전국적으로 다섯 개 대형 병원이 나누어 지방 의료 시설 확충에 참여하기로 했고, 백병원은 부산 사상 지구를 맡게 되었다. 의과대학 설립과 제2, 제3의 백병원을 건설할 기회를 기다리던 우리에게 정부의 이런 제안은 희소식이었다. 당시 내가 특별히 부산·경남 지역을 택한 이유도 있었다. 우선은 내가 군대 생활과 피난 시절을 보낼 때 부산 사람들이 보여준 친절함이 무척 인상 깊었다. 또 당시에는 서울에 의과대학이 일곱 개나 있어 의대 신설 허가가 나오지 않았고, 전남 지역만 해도 두 개의 의과대학이 있었지만, 부산·경남 지역에는 부산의대 단 한 곳뿐이었다. 

해운대 백병원의 운영은 잘되고 있나?

인제대 해운대 백병원은 부산·울산·경남 지역 전체의 의료 수요를 충족할 수 있는 우수한 시설과 장비, 인력을 확보했다. 해운대 백병원은 중증외상센터와 장기이식센터, 로봇수술센터 등의 중점 육성 센터를 중심으로 ‘인술로 세상을 구한다’는 ‘인술제세’의 창립 이념을 실천하고 있다. 특히 인근의 풍부한 관광 인프라와 연계해 외국인 환자를 유치하는 의료 관광의 중심으로도 성장할 가능성이 크다. 사실 어려움도 많았다. 해운대 지역 주민들이 ‘종합병원 유치위원회’까지 만들 만큼 대형 의료기관 유치를 간절히 원했고, 우리 백병원에도 제안이 왔었다. 하지만 당시 대내외적으로 어려움이 많아 선뜻 나서기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동안 지역 사회에서 인제대 백병원이 받았던 사랑에 보답한다는 차원에서 건립을 추진하게 되었다.

오늘날 대학생 등 젊은이들이 취업난 등으로 많은 고통을 겪고 있다.

오늘날은 도시의 그늘로 주저앉은 고립된 개인, 해체된 가족과 공동체, 눈부신 경제 성장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빈곤, 산업화의 장애물처럼 취급되는 농촌의 와해, 개발 착취로 황폐해진 자연, 심화되는 남북의 이질성과 굳어진 대립 구도 등 우리의 삶은 극복하기 쉽지 않은 난제들을 안고 있다. 이러한 갈등을 슬기롭게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청년이며, 청년들이 꾸미는 미래의 세계는 모두가 화해하고 평화롭게 더불어 살아가는 아름다운 세계가 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인제청년상을 제정했고 올해로 2회째를 맞이한다. 또한 어려운 형편에도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의 꿈과 이상에 조그마한 도움이 되고자 21년째 인당장학회를 통해 지금까지 2천1백45명에게 17억6천5백여 만원의 장학금을 지원해오고 있다. 서툴더라도 물러서지 않는, 실패를 맛보더라도 포기하지 않는 노력과 도전, 그 젊은 용기가 모여서 서로의 목소리를 만들고 그 이야기를 함께 들을 때 우리는 우리가 쌓아온 어두움과 화해하고 나아가 우리 자신과 세계를 조화시키는 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고 믿는다.

80대의 고령임에도 스케줄 노트에 빈틈이 없을 만큼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건강 비결은?

모든 것을 이루더라도 건강을 잃으면 전부를 잃는다는 말이 있듯, 인생에서 건강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건강을 지키기 위해 내가 실천하고 있는 비결은 소식(少食), 다동(多動), 금연(禁煙), 절주(節酒) 등으로 의외로 간단하다. 나는 적게 먹고, 많이 움직이며, 담배를 피우지 않고, 술을 절제하고 매일 운동을 한다. 매일 아침 등산으로 하루를 연다. 아침에 못하면 저녁에 운동을 한다. 그래도 안 되면 점심 시간을 활용해서 한다. 여기에 덧붙여 당부하고 싶은 것은 긍정적 사고이다. 긍정적 사고의 제일은 바로 ‘사랑’이다.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고 서로를 사랑으로 포용하는 것이 나의 건강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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