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좋고 선생 좋은 ‘교육 직거래’
  • 이하늬 인턴기자 ()
  • 승인 2012.07.03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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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한 자율로 서로에게 만족 주는 ‘교육생협’ 각광…일반 생활협동조합 방식을 학원에 적용

ⓒ 시사저널 박은숙

이상한 학원이 있다. 숙제가 없다. 지겨워하는 학생을 억지로 붙잡지도 않는다. 학생은 자기가 원하는 시간에 오고 간다. 매일 오는 학생도 있고 일주일에 두 번만 오는 학생도 있다. 학원에 오는 것은 전적으로 학생 마음이다. 그런데 분위기는 학구적이다. 집에 가는 학생보다 자습을 하는 학생이 더 많다. 중2인 한 학생은 원장선생님과 토론을 한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와 <삼국지>가 주제이다. 교육생협을 목표로 하는 서울 금천구 ‘나눔학원’의 모습이다.

학원 수업은 1 대 1로 진행된다. 학생 한 명과 선생님 한 명이 강의실 하나를 쓴다. 학생이 칠판에 문제를 푼다. 선생님은 소파에 앉아 풀이 과정을 지켜본다. 10분이 넘게 걸린다. 학생은 썼다가 지워가며 문제를 푼다. 선생님은 재촉조차 하지 않는다. 드디어 학생이 답을 말했다. 맞았다. 선생님은 다른 방식으로 다시 문제를 풀어준다. 한 문제를 푸는 데 20분이 걸렸다. “이런 방식으로 하면 너무 오래 걸리지 않나요?” 기자가 물었다. “괜찮아요. 저희는 시간 많아요.” 선생님이 대답했다.

다른 방에서는 학생들이 자습을 한다. 자습실 책상은 모두 붙어 있다. 마주 보고 공부를 하는 식이다. 꼭 교과 공부만 하는 것은 아니다. 소설책을 봐도 된다. 그 한쪽에 선생님이 있다. 학생들은 모르는 것이 있으면 선생님께 간다. 어떤 과목이든지 상관없다. 꼭 선생님이 아니어도 된다. 초등학생은 중학생에게 묻고, 중학생은 고등학생에게 묻는다. 자습 도중에 학생들이 떠들기 시작했다. 연예인·다이어트 이야기를 한다. 기자는 조심스레 선생님의 반응을 살폈다. 반응이 없다. ‘조용히 하고 공부해’라는 말은 어디서도 들리지 않는다. 심지어 학원에서 줄넘기를 하는 아이도 있다. 자습 중간에 체육복을 챙기더니 훌쩍 나가버린다. “쌤, 저 줄넘기하고 올게요.” “응, 열심히 해!”

선생님 구성도 다양하다. 퍼머 머리에 청바지를 입은 24세 대학생부터 백발이 성성한 72세의 할아버지 선생님까지. 나이뿐 아니라 경력도 다양하다. 이 학원의 원장인 민경우 강사는 대학에서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출판하기도 했다. 고3 학생을 가르치는 이정호 강사는 종로학원 17년차 베테랑 수학 강사이다. 이들이 받는 강사료는 동일하다. 시간당 1만5천원에서 2만원이다. 대학생에게는 적지 않은 돈이지만 이정호 강사에게는 큰돈이 아니다. 왔다 갔다 하는 시간을 따지면 차비 수준에 가깝다. 

하지만 이들은 같은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다. ‘교육생활협동조합’(교육생협)이 그것이다. 이정호 강사는 “예전부터 생협에 관심이 많았지만, 지금까지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마침 교육생협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참여하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영어를 강의하는 72세의 박주행 강사도 “집에서 왕복 3시간이 걸린다. 그럼에도 교육공동체라는 말을 듣고, 정말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급여와는 상관없다”라고 밝혔다.

생활협동조합(생협)은 생산자와 소비자의 직거래를 통해 중간 마진을 없앰으로써 서로에게 도움이 되도록 하는 체계를 말한다. 생협이 직접 생산자들을 찾아 미리 공급량과 가격을 결정하므로 판매 가격이 비교적 안정되어 있다. 소비자가 조합원이 되려면 3만원 안팎의 출자금을 내야 한다. ‘한살림’ ‘아이쿱생협’과 같은 먹거리 또는 생활필수품을 거래하는 생협이 대표적이다.

교육생협은 이같은 생협의 기본 취지를 그대로 교육에 적용하고 있다. 생협의 범위가 확장된 것이다. 학원은 교육생협의 취지에 공감하는 퇴직 교사 및 대학생 등에게 일자리를 제공한다. 큰돈을 벌 수는 없지만 시간당 최저 임금의 2~3배를 받을 수 있다. 학부모는 3만원의 출자금을 내면 조합원이 된다. 조합원 가족 모두 학원 수강생이 될 수 있다. 1 대 1 수업인 것을 감안하면 수업료는 저렴한 편이다. 

퇴직교사에겐 일자리를, 학생에겐 재미를

그렇다 보니 학생과 학부모의 만족도가 높은 편이다. 학교 수업을 따라가기 어려운 학생도, 과학고를 목표로 하는 학생도 학원에 만족한다. 중3 문수현양은 수학을 싫어했다. 50점. 지난 시험에서 받은 수학 점수이다. 학원에 다닌 지 두 달, 수학 점수가 80점을 넘었다. 수현양은 “기초가 부족해서 수학을 따라가기 어려웠다. 여기 와서 수학이 조금 재미있어졌다. 문제가 풀릴 때 뿌듯하다”라고 말했다.

과학고 입시를 앞둔 류종찬군(14)도 학원이 재미있다. 어머니 박은주씨(42)는 “아이가 수학을 재미없어 했는데 요즘에는 증명을 배우면서 재미있어 한다. 경시대회에 나갔는데 자기 생각에는 답이 없더란다. 그래서 ‘답 없음’을 증명했다고 한다”라고 말했다. 교육생협을 만나기 전, 박씨는 서울 대치동 수학 전문 학원과 과외 사이에서 고민이 많았다고 털어놓았다.

정승훈군(15)의 어머니 김용희씨(42)는 다른 측면에서 이 학원을 마음에 들어 한다. 대면 교육에서 얻는 정서적 만족이다. 승훈군은 학교 공부를 지루해하는 아이였다. 철학과 역사에 관심이 많지만 자기가 읽은 책에 대해 토론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처음 학원에서 상담을 하는데 다른 학원이랑 물어보는 것이 다르더라. 아이에게 ‘너는 무엇을 좋아하니? 무슨 책을 재미있게 읽었니?’라고 물어보시더라. 이것이 아이에게는 굉장히 절실한 것이었다. 설령 성적이 오르지 않아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다.”

지금 생협의 대명사로 통하는 ‘한살림’은 1980년대에 만들어졌다. 2010년 기준으로 조합원 가구만 25만에 이른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자리 잡기까지 30년이 걸린 셈이다. 그래서 어쩌면 지금의 교육생협을 준비하는 강사나 학부모에게도 불안과 고민이 있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한국 최초의 교육생협의 앞날이 주목된다. 

ⓒ 시사저널 박은숙
워낙 선례가 없어서 명확한 규정을 내리기 어렵다. 운영하면서 가다듬고 있다. 방향은 크게 세 가지이다. 하나는 지식 정보화 사회에 맞는 최첨단 교육을 시킨다. 두 번째는 지역 밀착형 대면 교육이다. 요즘 화상 과외와 동영상 강의가 발달되어 있지만, 대면 교육이 효과적이다. 세 번째는 나눔이다. 표준화된 교육이 아니라 교육 공급자와 소비자가 상호 연결되는 사회적 시스템을 추구한다.

교육생협을 시작하게 된 배경은?

개인 과외를 하면서 사교육 부담이 과도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인구 구성을 보았을 때 고학력 인텔리는 늘어나고 학생은 줄어들고 있다. 사교육 부담을 덜면서 양질의 교육을 시킬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는 교육 콘텐츠이다. 우리나라는 암기, 반복적 문제 풀이 중심으로 수업을 한다. 그래서 사고력 중심의 생각하는 공부로 방향을 잡았다.

특별히 금천구에서 시작한 이유가 있나?

과외를 하다가 이른바 ‘강남’ 아이들과 구로·금천 아이들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금천 지역 몇몇 학부모들은 아이가 고등학교에 올라갈 때 아예 이사를 가거나 심지어 학원을 목동으로 보내더라. 강남 아이들은 지나친 사교육에 시달린다. 반면 금천에서는 제대로 된 교육을 못 받는 것이 문제이다. 아이 자체의 수준 차는 크게 없다. 교육 여건의 차이가 다른 결과를 낳았다. 불공평하다. 그래서 금천에 고급 교육 환경을 제공해 이 지역 아이들도 동일한 기회, 동일한 환경에서 진로를 개척할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힘들었던 점은 없나?

대부분 순조로웠지만, 하나가 있다면 학생들의 반응에 비해서 수강생이 빨리 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의외이다. 이런 교육에 대한 편견과 의구심이 있는 것 같다. 기존 유형별 문제 시스템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한다. 사람들이 대량 기계적인 교육에 대한 욕구가 강하다. 성적에 대한 집착이 너무 크기 때문에 양질의 콘텐츠 교육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이것이 가장 큰 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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