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팽’당한 자리에 외국인 앉았다
  • 노진섭 기자 (no@sisapress.com)
  • 승인 2012.08.07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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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외국계 기업, CEO 영입에 새로운 흐름 보여…본사 정책과 현지화 경영 사이의 갈등 등이 이유

왼쪽부터 데이비드 매킨타이어 재규어·랜드로버코리아 사장(© 뉴시스), 그래엠 토프트 한국네슬레 사장, 리차드 길포일 콜맨코리아 사장(© 뉴스뱅크).

세계적인 생활용품 기업인 유니레버는 1985년, 1993년, 1997년 세 차례에 걸쳐 한국 시장 진출을 꾀했지만 번번이 한국 현지화에 실패하고 철수했다. 1999년에 재시도할 때는 하얏트리젠시, TNT익스프레스 등에서 경영 수완을 보인 이재희 사장을 영입했다. 이사장은 3년 연속 매출액을 60%씩 성장시켜 유니레버가 한국에 안착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런 사례가 한국에 진출하려는 외국계 기업에 퍼지면서 한국인 경영인(CEO)을 영입하는 외국 기업이 늘어났다.

10년 전에는 한국에 있는 외국 기업의 수장 중 절반 정도가 한국인이었다. 한국 문화 등 비업무적인 특성을 잘 이해함으로써 현지에 맞는 마케팅을 펴는 데 유리하다는 판단에서 외국 기업은 한국인 CEO를 선호했다. 그러나 이런 기조는 최근 들어 정반대 현상을 보이고 있다.

한국인 경영인이 떠나고 외국인이 CEO 자리를 꿰차기 시작했다. 한국인 사장이 사임한 표면적인 이유는 ‘개인 사유’이지만,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 실적 부진에 대한 문책, 본사 정책과 현지화 경영 사이의 마찰, 현지화 이후 본사 정책 확대 등의 배경이 깔린 것으로 보인다.

1996년 한국에 지사를 낸 세계적인 스위스계 식품 기업 네슬레는 줄곧 외국인 CEO를 고집해오다 지난 2002년 이삼휘 사장을 영입했다. 한국인 입맛을 밝혀내라는 것이 이사장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이사장은 테이스터스 초이스라는 커피 제품으로 국내 소비자의 혀끝을 사로잡았다. 또, 국내 업체들과 제휴해 제품 생산과 판매망 확보 문제를 한 번에 해결했다. 이런 공로로 본사의 인정을 받으며 10년 동안 장수 CEO로 입지를 굳히던 이사장은 지난 5월 회사를 떠났다.

1988년 호주네슬레에 입사한 후 일본,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한국 등 아시아 국가에서 영업·마케팅 등의 업무를 맡았던 그래엠 토프트 사장이 지휘봉을 잡았다. 한국네슬레 관계자는 “이삼휘 사장은 캡슐 커피머신을 출시하면서 매출 증가를 주도했고, 본사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나이가 많아 은퇴한 것이지, 실적 부진이 사장 교체의 배경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캠핑 브랜드인 콜맨코리아는 본사 정책과 현지화 경영 사이의 갈등이 CEO 교체의 불쏘시개로 작용한 사례이다. 2010년부터 콜맨코리아를 이끌던 박갑정 대표는 2년 만인 올해 초 사장직에서 하차했다. 현재 리처드 길포일 전 아시아태평양 담당 사장이 일본과 한국 지사를 지휘하고 있다. 콜맨코리아 관계자는 “박대표가 개인적인 문제로 회사를 그만두었고, 길포일 사장이 임시로 사장직을 대신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내부 직원의 말은 다르다. 회사 내부 관계자는 “박대표는 현지화 전략을 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본사 정책과 충돌하는 부분이 있었다. 이 때문에 길포일 사장과도 불협화음이 잦았다. 한국은 캠핑 문화가 불붙은 시장이지만, 사실 콜맨 본사의 시각으로 보면 한국은 아직 작은 시장이다. 오히려 일본과 중국이 큰 시장이다. 본사 입장에서는 한국 현지화 전략이 꼭 필요하지 않은 셈이다”라고 밝혔다.

수입 자동차 업계에는 지난 10년 동안 대규모로 외국인 CEO가 들어섰다. 1995년 9개 수입 자동차 브랜드 중에 외국인 CEO가 있는 업체로는 BMW코리아가 유일했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에 따르면 현재 16개 업체 중 7개사의 CEO가 외국인이다.

최근에 한국계 CEO가 외국인으로 바뀐 업체는 재규어·랜드로버코리아이다. 지난해 한국 시장에서 총 2천3백99대를 팔아 역대 최고 판매 대수를 달성했다. 재규어 1천16대, 랜드로버 1천3백83대가 팔려 각각 39.9%, 46.5%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벤츠와 BMW와 같은 독일차를 선호하는 국내 시장에서 선전한 셈이다.

지난해 10월까지만 해도 이동훈 당시 사장은 “벤츠와 BMW를 타 본 고객들이 재규어와 랜드로버를 시승해보고 좋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독일 브랜드에 대응하겠다”라고 말했다. 또, 올해 부산국제모터쇼에 참가해 부산·경남 시장을 공략하겠다고 밝혔다. 퇴임을 앞둔 사장의 모습이 아니었다. 2008년부터 대표를 맡은 이사장은 지난해 12월 돌연 사임했다. 그 자리에 데이비드 매킨타이어 전 벤틀리코리아 사장이 취임했다. 업계에서는 한국인 CEO가 현지화에 성공한 상태에서 본사의 정책을 펴나갈 시점에 사장을 교체한 것으로 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처음에는 본사 정책을 보류하더라도 현지화를 추진한다. 성공적인 현지화를 위해 한국인 사장을 고용하지만 시장에서 어느 정도 위치를 차지하면 본사가 낙점한 외국인 CEO를 내려보낸다. 그때부터는 본사 정책으로 한국 시장을 공략한다”라고 말했다.

토종 기업의 외국인 CEO 영입 사례도 늘어

한편, 토종 기업에도 외국인 CEO가 늘어나고 있다. SK그룹 계열사인 SK바이오팜은 지난 3월 크리스토퍼 갤런 박사를 CEO로 영입했다. 해외 법인이 아닌 SK그룹 계열사에서 외국인이 CEO를 맡은 경우는 이례적이다. SK그룹 관계자는 “크리스토퍼 갤런 사장은 의약과 생명과학 산업의 최대 시장인 미국에서 30년 이상의 경력을 쌓은 신약 개발 전문가이다. 뉴로메드 사의 대표 등을 역임했다. 초기 연구·임상 개발 등 신약 개발 영역뿐만이 아니라 상업화·사업 개발·자금 조달 등 제약업계에서 쌓아온 기업 경영 능력이 탁월하다. 개발한 신약으로 미국 시장에 진출하려면 미국 FDA(식품의약국) 등 현지 사정에 밝은 사람이 필요했다”라고 설명했다.

한국 기업이 외국인 CEO를 영입하는 목적은 외국 기업이 외국인 CEO를 영입하려는 그것과는 성격이 다르다. 국내 시장이 아니라 외국 시장에 진출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외국인 CEO를 영입하고도 불합리한 이유로 그들을 내친다면 주한 외국 기업의 사례를 답습하는 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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