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의 '마지막 인터뷰'
  • 김지영 기자 (young@sisapress.com)
  • 승인 2012.08.12 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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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대통령 퇴임 후 김우중 전 회장과 만남도 주선"

생전의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 ⓒ 시사저널 사진 자료

‘바보 강금원’이 ‘바보 노무현’ 곁으로 갔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던 ‘영원한 후원자’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이 지난 8월2일, 2007년부터 6년여 동안 앓아온 뇌종양으로 별세했다. 향년 60세이다. ‘두 바보’의 첫 만남은 지난 1998년 7월 서울 종로구 보궐 선거에 노 전 대통령이 출마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노 전 대통령은 강회장과의 첫 인연에 대해 “(당시) 모르는 사람한테서 전화가 왔다. ‘후원금을 얼마까지 낼 수 있지요?’라고 물었다. ‘1년에 5천만원까지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무실로 온 사람이 강회장이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 이후 노 전 대통령에게 “먹고사는 문제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말고 소신껏 정치를 하라”라며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강회장이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과의 인연이 강회장 개인에게는 모진 시련으로 이어졌다. 2003년 12월 배임 및 조세 포탈 혐의로 구속 기소되어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고,  2006년에도 불법 대선 자금과 관련해 구속되었다. ‘박연차 게이트’ 수사가 한창이던 2009년 4월에는 회사 돈을 임의로 사용한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노무현의 영원한 후견인’, 지난 8월2일 영면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한 직후인 지난 2008년 3월5일 강금원 회장과 산행 중에 파안대소하고 있다. ⓒ 사람사는 세상 홈페이지 제공
기자가 강회장을 처음 만난 것은 검찰의 대통령 측근 비리 수사가 진행되던 지난 2003년 11월22일이었다. 그가 운영하는 충북 충주의 시그너스 컨트리클럽에서였다. 예의 넉넉한 미소로 기자를 맞아주면서도 “내가 이런 사람이 아니다. 사람 만나는 도리가 아닌 줄도 안다”라면서 인터뷰는 사양했다. 

그해 그가 영등포구치소에 수감되었을 때 면회 신청을 했지만, 면회를 거부했다. “지금은 기자를 만날 때가 아니니 나중에 보자”라는 답신만 자신의 측근을 통해 전해왔다.

그런데 지난 2월 초, 강회장의 건강 상태가 악화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강회장의 휴대전화로 여러 차례 연락했으나, 받지 않았다. 여느 때 같으면 당장 전화를 받지 못하더라도 이후에는 답신을 보내왔던 강회장이었기에 건강이 상당히 안 좋아졌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강회장의 오랜 측근은 2월28일 전화 통화에서 “회장님은 현재 항암 주사를 맞으며 치료 중이다. 기력이 많이 떨어지셨다. 전화를 못 받으시는 것도 그것 때문이니 이해해 달라”라고만 말했다. 인터뷰를 하기로 ‘약속’했던 강회장이 호전되기를 기다리던 중 그는 세상을 떠났다. 

강회장 별세 후 기자는 취재수첩을 열었다. 강회장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지난해 5월24일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노 전 대통령의 서거 2주기(5월23일) 다음 날이었다. 봉하마을 추모식에 참석하고서 막 상경한 강회장을 서울 강남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사전에 약속된 만남이었다. 엷은 자주색 점퍼를 입은 강회장은 전날 추모식에 참석하고 막 올라온 데다, 지병인 뇌종양 탓인지 초췌하고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평소 습관처럼 엄지와 검지로 입술과 턱을 매만지는 강회장과 오후 3시쯤부터 6시까지 세 시간여 동안 녹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다. 노 전 대통령과의 추억을 얘기하는 대목에서 강회장은 여러 차례 눈시울을 붉혔다. 하지만 일부 친노 사람들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을 때는 목소리가 높아지기도 했다. 전날 추모식의 여운이 강하게 남은 탓인지 강회장은 자연스럽게 노 전 대통령과의 추억을 회고하면서 대화의 물길을 열었다. 강회장은 “노대통령은 재임 시절 청와대 뒤편에 있는 원두막에서 담배를 피우기도 했고, 나와 함께 돼지고기를 구워먹기도 했다. 대통령과 어깨동무를 하면서 청와대 경내를 둘러본 적도 있고, 대통령의 여름휴가 때는 경남 진해에서 함께 지내기도 했다. 내가 요트를 몇 척 가지고 있는데, 대통령이 되시기 전에는 부산에서 (전남) 보길도까지 쾌속 요트를 타고 다녀온 적도 있다”라며 ‘친구 노무현’을 떠올렸다. 그러면서 “그런 친구의 장례식에 다녀왔다”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잠시 말문도 닫혔다.

“부산 선거 낙선 후 대통령 출마 처음 제의”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나흘째인 2009년 5월26일에야 보석으로 풀려난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이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을 찾아 조문하고 있다. ⓒ 시사저널 사진 자료

강회장이 2003년 배임 등의 혐의로 영등포구치소에 수감되었을 때의 일이다. 그해 12월31일, 당시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과 이호철 민정비서관 등이 강회장을 면회하러 왔다. “그날 문재인 수석이 ‘대통령께서 내일(2004년 1월1일) 면회를 오고 싶어 하신다’라고 전하더라. 그래서 내가 ‘미쳤느냐. 여기가 어디인데, 오신다는 것이냐. 오시지 마라’라고 크게 호통을 쳐서 돌려보냈다. 그리고 그날 내 집사람(김영랑 여사)을 청와대로 보내 대통령의 면회를 강하게 만류했던 적도 있다”라며 회고하는 대목에서도 강회장의 눈가에서는 물기가 배어나왔다. 

노 전 대통령은 지난 1998년 7월, 서울 종로구 보궐 선거에서 당선되었으나, 이듬해 부산 출마를 선언하고 종로지구당을 포기했다. 그리고 2000년 4월13일 총선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부산 북·강서 을 지역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강회장은 “2000년 부산 총선에서 떨어진 날 저녁, 대통령에게 ‘이제 대통령밖에 할 게 없네’라며 처음으로 대통령 출마를 권유했다”라고도 말했다.

‘영남 사람’ 노무현과 ‘호남 사람’ 강금원의 정치적 신뢰가 얼마나 두터웠는지 가늠할 수 있는 증언도 여럿 나왔다. 강회장은 “나는 ‘동·서, 영·호남의 화합을 이루어야 한다’고 대통령께 자주 말씀드렸다. (2003년 초)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시절, 대통령에게 ‘YS(김영삼 전 대통령)와 DJ(김대중 전 대통령)가 화해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라고 요청한 적도 있다. 나를 ‘강회장’이라고 부르시는 YS와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YS를 두 차례 정도 찾아뵙고 영·호남 화합에 나서주실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YS는 DJ에 대한 서운함이 많았다. 그분께서는 ‘DJ가 어떻게 군사 독재자들(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과 나를 청와대로 함께 초청할 수 있느냐. 그리고 현철이(YS의 차남)도 잡아넣었다’면서 상당히 서운해하셨다”라며, YS를 설득하는 데 실패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노 전 대통령이 장·차관 인사 때 강회장의 건의를 상당 부분 수용했다는 말도 했다. 그는 “노대통령은 내가 건의했던 장·차관 인사를 거의 다 들어주셨다. 대통령은 (2005년에) 통일부장관으로 386세대인 젊은 사람을 기용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런데 내가 이재정씨를 통일부장관으로 추천했고, 대통령도 수용해주셨다. 특히 내가 추천했던 호남 출신 법조계 사람도 많이 임명되었다. 나는  (2005년에 전남 보성 출신) 이용훈 대법원장과 (전남 여수 출신) 김종빈 검찰총장, (2007년에는 전북 임실 출신) 이강국 헌법재판소장 등을 추천했는데, 실제로 임명되었다”라고 참여정부 시절의 인사 비화를 털어놓기도 했다.

2007년과 2008년에는 ‘동교동계’ 인사들의 사면도 적극 건의했고, 이 또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 강회장의 증언이다. “(대북 송금 특검으로 구속되었던) 박지원씨(현 민주당 원내대표)와 (현대 비자금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권노갑씨, (당 대표 경선 자금을 받은 혐의로 사법 처리되었던) 한화갑씨 등을 사면시켜야 한다고 대통령에게 건의했고, 결국 사면되었다”라고 말했다.

강회장은 특히 “대통령에서 퇴임한 후 내가 봉하마을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을 데려간 적도 있다. 김회장은 지금 외국에 있지만, 그때 케이크를 사들고 가서 두 분이 만나기도 했다”라고 전했다. 김우중 전 회장은 노대통령이 임기 중 마지막으로 단행한 2008년 1월1일자 특별사면 대상자였다.

“노대통령 외로울 때 발길 끊은 친노 인사…”

노 전 대통령과 강회장은 ‘돈 문제’에 대해서도 스스럼없이 털어놓는 사이였던 것 같다. 강회장은 “노대통령이 한 번은 ‘국정원의 통치 자금이 연간 2백억원가량 되어서 (대통령 임기가 끝날 때까지) 1천억원은 챙길 수 있다. 그런데 강회장이 ‘단 1원도 받지 말라고 해서 못 챙기겠네’라고 농담을 해서 함께 크게 웃은 적도 있었다”라고도 전했다.

이날 만남에서 강회장이 유난히 목청을 높이면서 상당히 안타까워했던 대목이 있다. 바로 야권이 민주당과 국민참여당으로 분열된 부분이었다. 그는 “그 사람들(국민참여당 인사들)에게 ‘민주당을 개선해라. 따로 나가서 성공한 정당이 있느냐’라며 만류했다. (친노 정치인) ○○○으로부터 몇 차례 전화가 왔기에, 내가 ‘쥐XX처럼 정치하지 마라’라고 화를 낸 적도 있다. 희정이(안희정 충남도지사)와 광재(이광재 전 강원도지사)도 ‘○○○이 언제 우리들 말을 들었느냐.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했지’라고 비난하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이날 강회장은 ‘친노 정치인 ○○○씨’의 실명을 직접 거명했다. 

검찰의 ‘박연차 게이트’ 수사가 한창 진행될 당시 친노 인사들이 봉하마을 사저에 발길을 끊었던 것에 대한 서운함과 불만도 여과 없이 피력했다. 그는 “노대통령은 상당히 외로웠다. □□□이든, 그 누구든 봉하마을에 찾아오지 않았다. 정치인들이 (박연차 게이트의) 불똥이 자신들한테 튈까 봐 오지 못했겠지. (사저에는) 나와 (노 전 대통령의) 비서들만 남았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노 전 대통령이 서거했음에도 강회장은 ‘노무현 가족들’과의 친분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는 “얼마 전 프랑스 파리에서 2백만명이 연금 개혁 시위를 한창 벌일 때 권양숙 여사님과 파리 등지로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라고 전했다.

강회장은 수천억 원대의 재력가였음에도 집안 살림은 매우 검소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강회장은 “내가 다섯 개의 계열사를 갖고 있는데 시그너스골프장에서 돈을 많이 번다. 모두 합쳐 월급만 5억원 정도 된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의 손에 들려 있는 휴대전화는 최신품인 스마트폰이 아니었다. 구형 모델이었다. 강회장은 “내가 공짜폰을 쓴다”라며 웃기도 했다.

강회장과 기자가 만난 그날 이후 강회장은 노 전 대통령과 관련된 행사에 참석하지 못했다. 강회장의 측근은 “지난해 6월부터 뇌종양 치료를 받으면서 요양을 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강회장은 8월2일 영면에 들었다. ‘이승에서’ 밤새 통음하며 서로의 깊은 속내를 털어놓았던 막역지우 노무현과 강금원. 지금쯤 ‘저승에서’ 조우한 두 사람은 그동안 쌓였던 회한과 회포를 한 자락씩 풀어놓으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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