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고교생 44명에 당한 성폭행 사건 피해자, 8년 지나도 ‘악몽’은 그대로
  • 정락인 기자 (freedom@sisapress.com)
  • 승인 2012.08.19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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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후유증과 2차 피해 당하며 고통에 계속 시달려 가해자들은 솜방망이 처벌로 석방된 후 사회생활 중

ⓒ 시사저널 전영기
지난 2004년 경남 밀양에서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이 발생했다. 울산에 거주하는 중학교 3학년 여학생을 밀양 지역의 고교생 44명이 1년 동안 성폭행한 사건이다.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전 국민은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다. 국회에서는 진상조사단까지 꾸려졌다. 그 후 가해자 중 일부는 재판에 넘겨지고, 피해 여중생과 그의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8년의 세월이 흘렀다. 과연 이 사건은 어떻게 마무리되었을까.

기자는 이 사건을 처음부터 다시 들여다보았다. 사건 기록을 꼼꼼히 살펴보고, 이 사건에 관여했던 사람들을 수소문했다. 피해자와 가해자들의 현재 모습도 추적했다. 그랬더니 놀라운 사실들이 드러났다. 사건의 진실이 크게 왜곡되어 있었다.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 대한 억측이 난무하면서 제2, 제3의 피해가 진행 중이었다. 이 사건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었다.

피해 여중생인 정은선양(가명·당시 15세)은 울산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아래로는 여동생과 남동생이 있었다. 정양의 가정 환경은 매우 불우했다.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고, 가정 폭력을 일삼았다. 아버지 정씨(당시 35세)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어머니 윤씨(당시 33세)를 구타했다. 이를 견디지 못한 윤씨는 사건이 일어나기 1년 전인 2003년 1월쯤에 이혼했다. 그 후 윤씨는 집을 나갔다.

아내와 이혼한 후 아버지의 폭행은 큰딸인 은선양에게 집중되었다. 하루도 쉬지 않고 폭언과 폭행이 이어졌다. 아버지는 무능했고, 매일 술에 쩔어 살았다. 정양은 이렇게 하루하루 악몽 같은 생활을 했다. 한창 사춘기였던 정양은 이런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인터넷 채팅을 했고, 밀양 지역 고등학교에 다니던 박 아무개군(당시 18세)을 만났다. 이때가 2004년 1월쯤이다. 박군은 정양을 울산에서 한 시간 거리인 밀양으로 불러냈다. 그리고는 쇠파이프 등으로 때린 뒤 여인숙으로 데려갔고, 이곳에서 고교 선후배 등 12명과 함께 집단 성폭행을 했다. 이들은 이후 한 번에 7~10명씩 짝을 이루어 정양을 여관과 놀이터, 자취방, 테니스장 등으로 끌고 다니며 유린했다.

2004년 12월 밀양 성폭행 사건 수사와 관련해 여성 대책위의 항의 방문을 받은 당시 울산 남부경찰서장이 사과하고 있다. ⓒ 연합뉴스
더욱 놀라운 것은 피해 사실을 신고하지 못하도록 정양이 성폭행당하는 장면을 휴대전화와 캠코더 등으로 촬영한 것이다. 그리고는 부모에게 발설하면 인터넷에 사진과 동영상을 유포하겠다고 협박했다. 정양은 불안과 수치심 때문에 이들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일부 가해자들은 정양을 성폭행하면서 성기구까지 사용하는 등 엽기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이들의 범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정양의 여동생(당시 13세)과 창원에 있는 고종사촌 언니인 황 아무개양(당시 16세)까지 밀양으로 수차례 유인해 폭행하고 금반지와 돈을 빼앗았다.

‘자매 성폭행’이라는 언론의 오보도 방치돼

사건 당시 울산 남부경찰서에 연행된 가해 학생들. ⓒ 연합뉴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정양의 동생과 사촌언니인 황양은 성폭행을 당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경찰 조사 과정에서도 이런 사실을 진술했다. 그런데도 대다수 언론은 여전히 ‘자매 성폭행’으로 보도하고 있다. 포털 사이트 뉴스에서 ‘밀양 여중생 성폭행 자매’를 검색해보면 언론사들의 오보를 실감할 수 있다. 당시 사건 정황을 자세히 기록한 포털 사이트의 ‘위키 백과’ 등도 잘못된 내용을 담고 있다.

정양은 1년 정도를 가해 학생들로부터 신체적인 폭행과 성폭행을 당했다. 밖에서는 가해 학생들에게, 집에서는 아버지의 폭행에 시달렸다. 그렇다고 이런 아버지에게 피해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자신의 수치가 세상에 알려지는 것도 두려웠다. 때문에 그냥 혼자 끙끙 앓고 있었다.

정양은 우연히 이모인 윤 아무개씨를 만났고,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이모 윤씨는 정양의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11월25일 오후 8시쯤 112에 전화를 걸었고, 피해자의 신분을 철저하게 보호해줄 수 있는지를 몇 차례나 묻고는 다짐을 받았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울산 남부경찰서 형사도 ‘비공개’를 약속했다.

그런데 경찰의 약속은 공수표에 불과했다. 경찰은 처음에는 비공개로 수사하다가 신고가 접수된 지 12일째 되던 날인 12월6일에 가해 학생들에 대한 일제 검거를 실시했다. 창원, 밀양, 울산 등지의 PC방과 도서관 등에서 44명이 울산 남부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이 중 밀양 지역의 고교인 밀양 밀성고, 밀양 세종고, 밀양공고(현 밀양전자공고)에 재학 중인 학생들이 35명이나 되었다.

경찰은 가해 학생들을 검거한 후 언론에 보도자료를 냈다. 당시 정양의 어머니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경찰은 마치 한 건 한 것처럼 언론에 모두 공개하고 말았다”라고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딸을 지켜주고 싶었던 엄마의 마음은 경찰의 보여주기 식 수사에 허무하게 무너졌다.

경찰의 조사 과정도 문제투성이였다. 경찰은 정양 자매에게 ‘여경한테 조사받게 하겠다’라고 약속했으나 지키지 않았다. 때문에 자매는 자신이 당했던 일을 남성 경찰관에게 설명하는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수사를 맡은 경찰관은 정양에게 ‘니네들이 꼬리치며 좋아서 찾아간 것이 아니냐’ ‘내가 밀양이 고향인데 밀양 물 다 흐려놓았다’ 등의 입에 담지 못할 폭언을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가해 학생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범인을 지목하게 했다. 경찰 수사 기간 동안 아홉 차례나 불려갔고, 한 번에 7~8시간을 진술했다. 이 과정에서 가해자와 가해자 부모들로부터 ‘가만 두지 않겠다’는 등의 협박을 받기도 했다. 사건 담당 경찰관들은 또 노래방에 가서 도우미를 불러놓고는 피해 여중생의 실명을 거론하며 ‘누구와 닮았네’ ‘밥맛 떨어진다’ 등의 폭언을 했다.

동석했던 도우미가 이런 사실을 정양 가족에게 알리면서 비난을 받았다. 이에 시민단체와 여성단체 등이 반발했고, 경찰은 강력계 수사팀(4명)을 전원 해체하고, 여경을 포함한 새로운 수사팀을 편성했다. 하지만 여론이 들끓자 검찰이 개입해 특별수사반을 구성해서 수사했다.

당시 CBS 소속으로 사건을 취재했던 창원MBC 장영 기자는 “사건이 터지고 얼마 후에 경찰의 진급 심사가 있었다. 경찰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사건을 키워서 성과를 내고 싶었던 것 같았다. 취재하는 동안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다. 또, 당시 경찰의 비인권적인 수사가 문제 되면서 8명의 경찰관이 징계를 받았지만 1년 후에는 모두 복직했다”라고 말했다.

정양의 변호는 강지원 변호사(전 청소년보호위원장)가 맡았다. 밀양 성폭행 사건이 터지자 강변호사가 변호를 맡아야 한다는 네티즌들의 요구가 빗발쳤다. 강변호사는 흔쾌히 무료 변론에 나섰다. 정양 자매의 상담 등은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이사(당시 소장)가 도와주었다.

강변호사와 이미경 이사는 경찰 수사 직후 정양 자매를 서울로 전학시키기로 의견을 모았다. 강변호사는 “이미 얼굴이 알려지는 등 피해자의 신상이 노출되어서 그 지역에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무도 모르게 서울로 이사를 시켰다”라고 말했다. 정양 자매와 어머니는 2005년 1월에 서울로 온 후 연세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치료는 소아정신과의 신의진 교수(현 새누리당 의원)가 맡았다.

정양의 상태는 심각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피폐해 있었다. 신의원은 “피해자는 오랫동안 방치되면서 자랐다. 그러다 성폭행을 당하면서 여러 합병증이 심하게 나타났다. 우울증과 애정 결핍도 심했다. 피해자는 또 부모의 이혼으로 어머니가 가출하자 떠나버린 엄마에 대한 원망이 컸다. 가족이 만났다고 다 해결된 것이 아니었다. 치료 중에도 ‘죽고 싶다’며 많이 울었다”라고 회상했다.

정양은 한 달 정도 정신과 치료를 받은 후 퇴원했다. 하지만 짧은 기간 동안의 치료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정양은 ‘지하철에 뛰어들겠다’고 하는 등 자살 시도를 빈번하게 벌였다. 그러자 극단적인 행동을 염려한 가족 등이 폐쇄 병동에 강제 입원시켰다. 이런 와중에 아버지와 고모 그리고 고모부가 정양을 찾아갔다.

이들은 정양에게 피의자들과 합의할 것을 강권했다. 피의자 가족들이 정씨를 찾아가 합의 조건으로 돈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정양도 외부와 단절된 병원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정양의 아버지는 그런 딸의 심리를 이용했다. 현행법상 보호자의 친권을 막을 수도 없었다.

아버지가 피의자들과 합의 강권해

결국 정양은 아버지를 따라 나섰고, 피의자 가족들에게 합의서와 선처를 바란다는 탄원서도 써주었다. 아버지 정씨는 합의금으로 5천만원을 받았다. 이 중 1천5백만원은 울산 외곽에 전셋집을 마련하는 데 쓰고, 나머지는 친척들과 나누어 가졌다. 정작 정양 자매에게는 한 푼도 돌아가지 않았다.

합의서와 탄원서는 피의자들의 형량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정양은 나중에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 후 충격을 받은 정양은 다시 가출을 했고, 어머니를 만났다. 아버지 정씨는 성폭력상담소 등의 설득으로 정양 자매의 친권을 친모로 변경하는 데 동의했다. 정양 가족은 생이별을 했다. 자매는 어머니와 서울에서 살고, 막내 남동생은 아버지와 울산에서 살았다. 서울에 이사 온 정양 자매와 어머니는 월세방에서 살며 동사무소에서 나오는 보조금으로 생활해야만 했다.

정양 자매에게는 큰 슬픔이 닥쳤다. 알코올 중독자였던 아버지의 사망 통보였다. 아버지 정씨는 피의자들에 대한 선고 공판이 진행되는 도중에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사망했다. 그 후 울산에 있던 남동생도 서울에 와서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다.

정양 자매와 어머니는 경찰의 모욕적인 수사에 대해 국가에 책임을 묻기 위해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2007년 3월18일 서울고등법원 민사 26부는 정양 자매에게 각각 3천만원과 1천만원, 어머니에게 1천만원을 배상할 것을 판결했다. 대법원은 2008년 6월16일 이 원심을 확정했다. 법률 대리인이었던 강지원 변호사는 “손해배상으로 받은 돈을 다 쓸까 봐 무척 걱정했다. 피해자 가족에게는 피 같은 돈이었다. 그래서 전세계약서를 확인하고 지급했다”라고 말했다. 정양 가족은 월세에서 전셋집으로 옮겼다.

정양은 끝내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에 전학을 했다. 10여 곳의 학교를 돌아다닌 뒤에야 간신히 전학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가해자의 부모가 정양이 전학한 학교에 찾아왔고, 소년원에 있는 아들을 위해 탄원서를 써달라고 한 것이다. 정양은 큰 충격을 받고는 학교를 그만두었다.

사회가 피해자 제대로 지원하지 못하는 현실

정양은 올해 나이 스물세 살이다. 같은 또래와 비교해보면 대학교 졸업반에 해당하는 나이이다. 그는 현재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항간에는 ‘행방불명설’까지 나돌고 있으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정양은 여전히 굴곡진 삶을 살고 있다고 전해진다.

강지원 변호사는 “학교를 그만둔 후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컴퓨터에 매달리기도 하고, PC방에서 지내기도 하고,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폭식을 해서 체중이 엄청나게 불어난 때도 있었다. 고정적인 직장 생활을 하지 못하고 아르바이트 같은 생활을 전전했다”라고 전했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이사는 “우리 사회가 피해자에게 제대로 지원하지 못한 것을 반성해야 한다. 경찰 조사 과정에서의 2차 피해에 대해 소송을 제기했고, 손해배상을 받은 것에는 의미가 있다. 이것도 피해자의 강력한 목소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금 피해자가 제대로 살지 못하는 것에는 사회 책무도 있다.

 

가해자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나  

밀양 여중생 성폭행 사건에 직접적으로 개입된 가해 학생들은 모두 44명이다. 검찰은 이 중 10명만 기소했다. 나머지 34명 중 20명은 소년부에 송치했고, 13명에 대해서는 피해자와 합의했거나 고소장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소권이 없다’며 풀어주었다. 한 명은 다른 사건에 연루되어 다른 청에 송치되었다.

2005년 4월 울산지법은 기소된 10명 전원에 대해 소년부 송치 결정을 내렸다. 피의자들은 보호 관찰 처분 등을 받으면서 법적인 단죄가 마무리되었다. 호적에 ‘전과자’라는 빨간 줄도 남지 않았다. 피해자가 당한 상처와 고통에 비하면 터무니없는 솜방망이 처벌이다. 지금은 모두 풀려난 상태이며, 대학에 다니거나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

경남경찰청 소속의 황 아무개 순경(27·여)은 가해자의 친구였다. 그는 2004년 사건 당시 가해자 미니홈피에 그의 행동을 옹호하는 글을 남겼다. 이 내용이 8년 만인 지난 4월에 알려지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경남경찰청은 황순경을 대기발령 상태에서 조사했고, 의령경찰서로 발령을 냈다.

기자는 8월16일 황순경과 전화 통화를 시도했으나 외근 중이어서 연결이 되지 않았다. 대신 상급자인 부서 과장에게 근황을 물어보았다. 그는 “어릴 적 철모를 때에 올린 글로 인해 나름으로 많이 힘들어했다. 본인도 느끼는 것이 많았다고 본다. 말이 별로 없고, 잘 근무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황순경은 사건이 있은 후 경주 소재 대학을 졸업했고, 2010년 순경 공채 시험을 통해 경찰에 입직했다.


 
 

학교 폭력 서클 ‘밀양 연합’은 정말 사라졌을까

밀양 여중생 성폭행 사건 뒤에는 학교 폭력 서클인 ‘밀양 연합’이 있었다. 가해 학생들이 여기에 소속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기자는 사건 이후 ‘밀양 연합’이 존재하는지를 취재했다. 그랬더니 현재 ‘밀양 연합’은 해체되고 없었다. 사건 당시에도 조직 체계를 갖춘 ‘폭력 서클’이라기보다는 지역에서 노는 학생들의 ‘친목 단체’에 가까웠다. 경남 지역 언론사의 한 기자도 비슷한 말을 했다. 그는 “‘밀양 연합’이 실제 있었다고 보기에는 약간 애매했다. 이 단어도 예전에 조폭을 수사하던 경찰들이 만든 것이다. 확대 해석된 면이 없지 않다”라고 말했다.

성폭행 사건이 있은 뒤 지역에서는 학생들의 ‘사적 모임’에 대해 민감해했다. 각 학교나 관내 경찰에서도 학생들의 동향을 예의 주시해왔다.

기자는 가해 학생들이 다녔던 밀양 밀성고, 밀양 세종고, 밀양전자공고에 전화를 걸어 교내 폭력 서클의 유무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모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리고 ‘교내 폭력 서클’의 존재를 강하게 부정했다.

밀양 세종고의 교감은 “8년 전에 일어난 일을 왜 새삼스럽게 꺼내느냐, 지금까지 아무 문제가 없으면 잘 지도하는 것 아니냐”라며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밀양 밀성고의 교감은 “학교 차원에서 성폭력 예방 교육을 주기적으로 실시한다. 강사도 초청하고 자치 활동도 하고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설문조사도 자주 실시해서 금품 갈취, 폭행, 왕따 등이 있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현재 우리 학교에는 학생들 사이에 ‘폭력 서클’ 같은 것은 없다”라고 강조했다.

밀양전자공고의 교감은 “우리 학교는 실업학교이다 보니 인문 학교보다 일찍 하교한다. 학교 밖에서 다른 것들을 접촉할 기회도 많다. 우리는 학생들에게 어떤 문제를 일으켰을 때의 엄한 책임을 강조한다. 또, 학교에서 폭력을 야기하거나 교사의 지시를 불이행하는 것에는 강력하게 제재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지역 학원을 담당하는 밀양경찰서 여성청소년계 계장은 “그 애들(당시 가해 학생들)은 모두 성장했다. 사건 당시는 학교 폭력 관련 처벌이 약했고, 학교에서도 관리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지금은 법이 강화되었다. 학생들이 학교 폭력을 마음대로 행사할 수도 없다. 우리 경찰도 학교 교사들과 긴밀한 유대 관계를 맺으면서 정보 교환도 하고 동향도 파악하고 있다. 밀양에는 학교 폭력 서클은 없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 연합뉴스
강지원 변호사는 밀양 성폭행 사건 피해자들의 지킴이였다. 무료 변론을 자청한 후 피해자들을 법률적으로 지원했다.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피해 가족이 새 삶을 살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주는 데도 노력했다. 피해자가 학업을 마칠 수 있도록 전학하는 데도 힘을 써주었다.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심리 치료를 위해 주변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재판이 끝난 뒤에도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해 승소했다. 강지원 변호사를 통해 사건 전후를 들어보았다.

 피해자와는 언제까지 연락이 되었나?

1년 전까지는 연락을 했다.

지금은 왜 연락이 안 되는 것인가?

내가 자꾸 언론에서 관심 대상이 되니까 피한 것이다. 가족들이 도움을 주는 우리를 너무 어려워했다. 그래서 도와주었던 사람들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심리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휴대전화의 번호도 바뀌고 연락이 안 된다.

피해자 가족은 서울에 와서 어떻게 지냈는가?

서울에 와서도 너무 고통스러워했다. 가정생활이 어렵다 보니 어머니도 일을 해야 하고, 본인도 일을 하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아르바이트도 지속적으로 하지 못했다. 그동안에도 말 못할 사연이 아주 많았다.

아버지가 사망한 후 가족들은 어떻게 되었나?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던 남동생이 서울로 왔다. 여동생은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전문대학을 나온 것으로 안다. 동생은 언니에 비해 성격도 씩씩하고 밝았다. 동생들은 아버지의 폭력을 덜 받았다. 그래서인지 엄마에 대한 적개심도 덜 했다.

피해자 가족들에 대한 심리 치료는 어디까지 진행되었나?

피해자 가족들은 가슴속에 커다란 상처를 안고 있었다. 엄마도 가정 폭력의 희생자였다. 내가 보기에 이 가족은 가장의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가정 폭력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엄마와 딸이 서로 상처를 받다 보니 많은 충돌도 있었다. 우리가 심리 치료를 하려고 무척 애를 썼는데, 워낙 상처가 크다 보니 치유하는 데 힘이 많이 들었다.

당시 경찰의 수사 과정이 문제가 되었다. 얼마나 개선되었다고 보는가?

경찰은 성폭력 사건을 수사하면서 피해자의 고통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당시 경찰은 오히려 피해자를 윽박지르고, 마치 ‘사고 친 아이’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골치 아픈 일이 벌어졌다는 것으로 생각했다. 심지어는 가해자들의 가족에게 욕설도 듣게 했다. 진술 녹화실을 사용해야 한다는 지침이 있었는데, 녹화실 자체가 없었다. 한마디로 조사하는 경찰관들에게 인권 의식이 없었다. 지금은 당시 사건을 계기로 조사 관행이 많이 개선되기는 했지만 피해자들의 체감에는 훨씬 못 미치고 있다. 여자 경찰관이 조사할 때도 심리 상담 같은 훈련을 받은 경찰관을 투입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성폭력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성폭력 문제는 갈수록 더 심해지고 있다. 개선되는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성폭력은 재산을 강탈하는 강도죄보다도 훨씬 무거운 인격적 살인이다. 청소년들 간의 성폭력 문제도 지금보다 더 엄격해야 한다. 청소년기에 있을 수 있는 일쯤으로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 가해자들에게 관대하게 처벌하는 판사나 검사의 인식 자체도 바뀌어야 한다. 피해자만 죽으라고 하는 사회 풍토가 시급히 고쳐져야 한다.

이 사건을 진행하면서 느낀 것은?

성폭력은 인격적 살인이다. 단순 성추행하고는 또 다르다. 그래서 남자들의 생각이 획기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여성을 주먹이나 돈으로 얻을 수 있다는 비열한 생각을 고쳐야 한다. 이런 생각들이 바뀌지 않는 한 성폭력은 없어지지 않는다. 정부 당국이 앞장서서 노력해야 하는데, 과연 무엇을 했는지 묻고 싶다.

강지원 변호사는 밀양 성폭행 사건 피해자들의 지킴이였다. 무료 변론을 자청한 후 피해자들을 법률적으로 지원했다.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피해 가족이 새 삶을 살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주는 데도 노력했다. 피해자가 학업을 마칠 수 있도록 전학하는 데도 힘을 써주었다.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심리 치료를 위해 주변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재판이 끝난 뒤에도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해 승소했다. 강지원 변호사를 통해 사건 전후를 들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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