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비우고 참선하는 자세로 집중해서 쓴다”
  • 조철 기자 (2001jch@sisapress.com)
  • 승인 2012.11.20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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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만자 써 ‘3교 성서전(三敎 聖書展)’ 연 서예가 여원구 선생

11월7일~20일 서울 인사동 한국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연 서예가 구당 여원구 선생. ⓒ 시사저널 이종현
국내 서예계 원로로서 많은 제자를 길러냈고, 예서의 대가로서 대한민국 국새 글씨를 새긴 전각가로도 유명한 구당(丘堂) 여원구 선생(80). 그는 대한민국 미술상과 대한민국 미술대전 서예 부문 대상을 수상했고, 숭례문 상량문 글씨를 썼으며 약천사 대적광전 현액 작품 등 전국 주요 사찰의 현판 작업에도 참여했던 작가이다. 2004년 세종문화회관에서 개인전을 가진 이후 8년 만에 ‘3교 성서전(三敎 聖書展)’이라는 이름으로 연 최근 전시에서, 불교·유교·기독교 경전을 붓으로 옮겨 적은 3백여 작품을 선보였다. 2년여 기간 동안 35만여 자를 썼다. 예서, 전서, 초서, 현대 서체를 고루 선보인 데다 종이 또한 여러 종류를 써서 관람객의 눈을 즐겁게 했다.

“세 종교 모두 근본 정신은 똑같다고 느꼈다”

여원구 선생은 “세 가지 종교의 경전을 다 옮기기보다 핵심만 뽑아 작업했다. 주요 작품을 소개하자면 <논어> 전문 1만5천9백37자를 해서로 쓴 10폭 병풍, <성경> 중 마태복음을 국·한문 혼용으로 쓴 6폭의 병풍, <금강경> 전문을 전각으로 새긴 작품 등이다. 각 경전의 명구를 골라 만든 소품도 70여 점 있다. 특히 <법화경> 전문을 두 번 썼다. 한 번은 호태왕비체로, 또 한 번은 해서체로 썼다. 7만자씩 두 번이니 그것만 해도 14만자이다. 그 모두를 다 쓰니 2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라고 지난 2년을 돌아보았다.

전시 관계자는 여러 종교의 경전을 예술 작품으로 만들어 한자리에 전시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불자로서 절에 다니는 구당 선생이 다른 종교의 경전까지 서예로 옮길 생각을 한 것은 지난해 말이었다. 그는 “한국의 대표적인 세 종교 모두 구심점은 똑같다고 생각했다. 기독교의 사랑이나 유교의 인(仁)이나 불교의 자비나 다 사랑 아닌가. 각 종교는 가는 길은 다르지만 정점에 가서는 다 똑같다. 근본정신은 다 같다는 것을 작업을 하면서도 크게 느꼈다. 크리스마스 때는 절에서 교회로, 부처님 오신 날에는 교회에서 절로 화환도 보내고 메시지도 보내고 그러는 것처럼 종교는 서로 화합해야 한다. 종교 갈등이 심한 현실을 극복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번 전시에서 화선지가 아니라 닥종이나 삼베지에다 글을 썼다. 먹을 잘 빨아들이는 화선지에 비해 획 긋는 작업이 어렵지만, 독특한 느낌을 주기도 하고 오래 보존할 수 있어서 이 종이들을 선택했다. 또한 종이에다 자연적인 물을 들이는 작업도 스스로 고안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종이 종류만 10여 종이었다. 커피 물 들인 한지, 감물 들인 한지, 치자 물 들인 한지, 옻칠한 한지, 삼베지, 오월 감잎 물 들인 한지, 감물 들인 삼베지, 딸기 물 들인 한지, 블루베리 물 들인 한지 등이다.

종이까지 다양하게 쓰니 보통의 서예 전시장에서 느낄 수 있는 단조로움이 확 달아났다. 작품마다 다른 색감과 질감이 드러난 것이다. 부드러운 획으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가 하면, 거칠게 뻗는 획으로 열정을 느끼게도 하고, 자유롭게 내달린 획에서 억눌린 마음을 풀어놓게도 만들었다. 70여 점의 소품에서는 동양화처럼 여백의 미를 살린 것도 눈길을 끌었다. 구당 선생은 “사군자를 그린 동양화라든지 그런 작품에서는 ‘공백의 미’라는 것이 있다. 거기에서는 여유를 느낄 수 있잖은가. 비우는 것이 하나의 미이자 매력이다. 불교 사상이나 노장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여백, 즉 공간을 남기는 것도 안목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공간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서 작품이 살고, 죽는다. 잘못 비우면 균형이 안 맞을 수 있기 때문에 섣불리 할 수 없는 일이다. 채우거나 비우는 것을 조화 있게 잘 처리해야 한다”라고 설명했다.

선생은 낮에는 고려대와 덕성여자대학교 등에 강의를 나가고 동방연서회에서 제자들을 가르친다. 시간을 쪼개 쓸 수밖에 없어 전각 작업은 주로 밤 시간을 이용했다. 새벽 1시까지 <금강경> 전문을 1천2백70방의 전각으로 새긴 것은 고행의 길을 자처한 것처럼 보였다. 15년 전에 <금강경> 전각 작업을 구상한 것을 최근 2년여 기간에 몰입해 완성시킨 것이다. 중국과 국내에서 틈틈이 구입해두었던 전각석이 마침내 각각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은 것이다.

“서예는 명상 같은 것…어릴 때부터 가르쳐야”

구당 선생은 서예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결구(結構)’를 들었다. 글자에 짜임새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만의 예술을 펼치더라도 그 전에 예부터 내려오는 서법이나 예법을 배워야 짜임새 있는 글자를 쓸 수 있다고 말했다. 한학자인 선친의 영향을 받아 어릴 때부터 한자를 배우고 썼던 그는 30대 후반에 고(故) 여초 김응현 선생이 세운 동방연서회에 들어가 사사를 받으며 본격적으로 서예가의 길에 들어섰다. 작고한 스승의 뒤를 이어 동방연서회 회장을 맡고 있는 선생은 “내가 배울 때만 해도 서예를 배우려는 사람이 많이 몰려들었는데, 지금은 몇십 명 안 되는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 지금은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으니 요즘은 서예하는 사람을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라고 아쉬워했다. 대학에 서예학과가 개설된 것은 불과 20여 년 전이라고 한다. 원광대학교가 시초로, 그 밖에 계명대학교, 경기대학교, 대구예술대학교 등 몇 곳에 불과하다.

 ‘한글 전용’에 대해서도 아주 못마땅해했다. 그는 “우리말의 70% 이상이 한자어인데, 음만 따서 한글로 하면 의미가 통하겠는가. 한자 교육을 아예 안 하다시피 하니 바보를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작품도 국·한문 혼용으로 한 것이다. 어릴 때부터 한자 교육을 받고, 국·한문 병기를 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입시 교육’이 문제라고 성토하기도 했다. “지식을 전달하는 것 말고 인성 교육도 중요한데 학교가 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교육을 받고 사회에 나온 젊은이들에게 이해심과 인내심이 필요한데…. 서예를 배우면 정성과 끈기를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니 아이들이 학교에서 붓도 잡아보고 해야 되는데, 유치원에서부터 고등학교까지 전부 입시 교육만 하니까 안 되는 것이다. 사람을 기계로 만들고 있다. 정서도 함양해야 하는데….”

여든 살이 넘은 선생은 괄괄한 목소리에, 표정도 걸음도 발랄했다. 건강 관리 비결은 등산이었다. 전국에 안 가본 산이 없다고 자랑하는 그는 지금도 제자들과 거의 매주 산을 찾는다고 말했다. 손을 잡아보니 부드럽고 따뜻했다. 전각가이기도 하니 거칠고 못이라도 박혔을 것 같았는데, 옛 선비의 손이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구당 선생은 “서예를 하면 장수한다는 말이 있다. 서예가 참선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요즘 사람들은 운동만 하면 오래 살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운동선수가 일찍 세상을 떠나는 경우가 더 많다. 과격한 운동만 하기 때문이다. 옛날 선비들을 보면 운동도 안 하는데 오래 살았다. 참선을 통해 마음을 고요하게 했기 때문이다. 붓을 들고 글씨를 쓸 때도 마음을 비우고 참선하는 자세로 집중해서 쓴다. ‘선’하고 ‘글씨’하고는 통한다고 말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서예가 명상의 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법구경 기신품구>라는 작품에 있는 ‘마땅히 스스로 제 몸을 닦아 그 가르침을 따라 행하라. 자기가 가르침에 따라 교화되지 않고서야 어떻게 남을 가르칠 수 있으리오’라는 대목은, 그가 왜 서예를 하는지에 대한 답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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