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 오직 신만이 아는 것일까
  • 조해수 기자 (chs900@sisapress.com)
  • 승인 2012.12.18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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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삭 아내 살해 사건’ 법정 공방, 반전 거듭

“의사인 남편이 출산을 불과 한 달 정도 남겨둔 아내를 손으로 목 졸라 살해해 태아까지 사망케 했다.”

지난해 초부터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른바 ‘만삭 아내 살해 사건’에 대한 검찰의 주장이다. 이 사건은 지난해 1월14일 서울 마포구 도화동에 위치한 백 아무개씨(32)의 집에서 부인 박 아무개씨(사망 당시 29세)가 욕조에서 숨진 채 발견되면서 시작되었다. 경찰은 유명 대학병원의 소아과 레지던트인 남편 백씨를 살해 용의자로 지목했다. 1심과 2심은 부검 결과와 백씨의 당시 행적 등을 근거로 그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특히 “백씨의 범행은 비난 가능성이 매우 크고, 줄곧 반성의 태도를 보이지 않는 점 등을 보면 엄중한 처벌이 불가피하다”라면서 징역 20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사건은 이렇게 끝나는 듯했다. 그러나 지난 6월28일 대법원은 “(검찰의 입증 내용이) 법관으로 하여금 합리적인 의심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없을 정도에까지 이르지 못한다”라며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내면서 논란이 본격적으로 확산되었다. 유죄냐, 무죄냐를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예고되는 가운데, 지난 12월7일 파기환송심 재판부인 서울고법 형사7부(부장판사 윤성원)는 “백씨의 유죄가 인정된다”라면서 다시 유죄를 선고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드라마를 연출했다. 

파기환송심이 백씨의 유죄를 재확인하면서, 공은 다시 한번 대법원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하급심이 모두 유죄 판결을 내렸다고 할지라도, 최종적으로 대법원이 어떤 판결을 내릴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분위기이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번 사건이 자칫 ‘제2의 치과의사 부인 살해 사건’이 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사망 원인·살해 동기·사망 시간이 핵심

이번 사건에서 핵심 쟁점이 되고 있는 부분은 ‘사망 원인’과 ‘살해 동기’ 그리고 ‘사망 시간’이다. 하급심은 이런 부분에 대해 “증거가 충분하다”라고 보고 있지만, 대법원은 “객관적인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라는 입장이다.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은 사망 원인이다. 집에 외부인의 침입 흔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박씨의 사망 원인은 남편 백씨에 의한 것이거나, 아니면 스스로 사고에 의한 것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1, 2심과 파기환송심은 부인 박씨와 남편 백씨의 몸에서 나온 여러 상처에 주목했다. 재판부는 “최초 검안부터 확인된 피해자 목 부위의 상처와 피부 까짐의 방향 등을 보면, 이러한 상처는 피해자가 사망하기 전에 누군가로부터의 힘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판단된다. 피해자의 목과 얼굴 주변 멍 그리고 내부 출혈 등 여러 상처 역시 전형적인 액사(손으로 목을 눌러 질식시킴)에 의한 흔적으로 보인다”라면서 백씨가 박씨를 살해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백씨측은 만삭이었던 아내 박씨가 갑자기 실신해 욕조에 쓰러졌고, 이때 고개가 심하게 돌아가 목 부분을 압박하면서 사망한 ‘이상 자세에 의한 질식사’라고 주장했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해외의 법의학자까지 동원했다. 캐나다 토론토 대학 법의학센터장인 마이클 스벤 폴라넨 박사는 지난해 1심 공판에 참석해 “사체의 현장 상태나 부검 사진을 확인한 결과, 이상 자세에 의한 질식사 가능성이 있다. 이상 자세로 질식사한 뒤 시간이 흐르면 구부러진 목 등에 상흔이 날 수 있다”라며 사고사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대법원은 이 주장을 받아들였다. 대법원은 ‘임신 중인 여성 5%가 실신을 경험하고 28%가 실신과 근접한 경험이 있다’라는 연구 결과를 제시하며 “이상 자세가 아닌 백씨가 목을 조른 행위에서 (질식사가) 비롯되었다고 보이려면 액사에서만 특유하게 발생되는 소견이 확인되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파기환송심에서는 액사의 직접적인 증거를 확보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졌다. 재판부는 좀 더 선명한 부검 사진을 통해 액사의 판단 기준이 되는 지두흔(손가락 끝으로 누른 흔적)을 추가로 확인해 목졸림 흔적의 증거를 보완했다. 그러나 익명을 요구한 한 변호사는 “평소 싸움이 잦은 부부라면 목 등 신체 부위에 손에 의해 눌린 상처쯤은 얼마든지 남을 수 있다. 지두흔 역시 결정적인 증거가 되지는 못할 것으로 보인다”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대법원은 살인 동기에 대한 하급심의 판단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하급심은 “백씨가 전문의 자격시험을 잘 보지 못한 상태에서 게임을 하다 부인과 싸워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 문제가) 부부 사이에 다툼의 동기는 될 수 있겠지만, 살인의 동기로서는 매우 미약하다. 범행 동기가 뚜렷하지 않은 경우 형사재판에서는 증거가 중요하기 때문에 유죄를 인정할 때 신중을 기해야 한다”라고 밝혔다.

17년 전 ‘치과의사 살인 사건’의 데자뷔

사망 시각은 백씨의 알리바이(현장 부재 증명)를 증명할 수 있는 중요한 쟁점이다. 사건 당일 백씨가 학교 도서관으로 떠나는 모습이 아파트 CCTV에 찍힌 시각은 오전 6시41분이다. 하급심은 “사망한 박씨는 오전 5시30분부터 일어나 출근 준비를 했다. 그런데 사망 당시 피해자는 잠옷 차림에 화장도 하지 않는 등 출근 준비를 전혀 하지 않은 모습으로 숨졌다. 백씨가 집을 나서기(오전 6시41분) 전에 사건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크다”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러한) 피해자 가족의 진술도 살인으로 판단할 결정적 요소로 보기 어렵다. 박씨가 남편이 먼저 집을 나선 후 욕실에서 출근 준비를 시작하다가 사망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라고 사고사의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지금까지 진행된 만삭 아내 살인 사건은 지난 1995년 6월12일 발생한 ‘치과의사 살해 사건’의 ‘데자뷔’처럼 느껴진다. 당시 외과의사인 이 아무개씨는 서울 은평구 불광동 자신의 아파트에서 치과의사인 아내와 두 살짜리 딸을 살해하고 욕조에 옮겨놓은 뒤 아파트에 불을 질러 위장한 혐의로 구속 기소되었다.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2심에서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대법원은 이를 유죄 취지로 파기 환송했으나, 고법은 다시 무죄로 판결했다. 결국 대법원도 이를 받아들여 법정 공방 8년 만인 2003년 최종 무죄가 선고되었다.

만삭 아내 살해 사건처럼 당시 검찰은 남편 이씨의 범행을 입증할 만한 결정적인 증거를 찾지 못했다. 검찰이 이씨의 유죄 증거로 제시한 것은 시반(시체에 나타난 반점)과 시강(시체의 굳은 정도) 등을 토대로 ‘사망 시간이 이씨가 출근한 오전 7시 이전일 가능성이 크다’는 국내 법의학자들의 감정 결과였다. 그러자 이씨는 스위스 법의학자를 동원해 “시반과 시강 등으로 사망 시각을 추정하는 것은 오차 범위가 넓고 변수도 많아 정확성이 부족하다”라고 주장했다. 2심은 이를 받아들여 “오히려 제3자의 범행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라며 이씨의 손을 들어주었다. 대법원도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라 “제출된 증거만으로는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없이 이씨에 대해 유죄라고 판단할 수 없다”라고 선고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번 사건에 대해서 “지난 6월 파기 환송한 것은 무죄 취지가 아니라, 사건을 다시 심리해보라는 뜻에서 한 것이다. 백씨가 사건 직후 상당히 의심스러운 태도와 행적을 보였고, 이에 대한 설명에도 여러 의문이 있다”라면서 유죄 판결의 여지를 남겼다. 그러나 만약 무죄가 선고된다면, 검찰은 억울한 누명을 씌운 대가로 백씨에게 민·형사상 소송을 당할 수도 있다. 대법원의 판결이 주목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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