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제 버릇 남 주지 않았다
  • 김현일 대기자 ()
  • 승인 2013.01.08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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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들, 연금 인상에 해외 나들이까지 혈세 ‘펑펑’

여당 의원 “비행기 표 물리려고 그래? 벌써 며칠째 똑같은 것 갖고 이게 뭐야.”

야당 의원 “국회의원 처음 해보나. 다 그런 거지. 언제 날짜(12월2일-예산안 처리 법정 기준일) 지킨 적 있어. 닷새쯤 지났다고 요란은. 이만하면 양반이지. 해 넘긴다고 돈(예산) 안 나가나. 우리(야당)도 체면이 있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 그나저나 5천억은 깎아야 하는데….”

여당 의원 “그건 곤란해. 4천억 아래로 해봐. 하여튼 (12월)10일은 넘기지 말자고. 그래야 다른 것들도 처리하지.”

야당 의원 “알았어. (예결위) 간사한테 다 얘기해놨어. ‘그거나’ 잊지 말아.”

지난해 12월31일 장윤석 국회 예결위원장(가운데)이 계수조정소위를 열기에 앞서 예결위 여야 간사인 새누리당 김학용 의원(오른쪽), 민주통합당 최재성 의원과 손을 잡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 정부 시절, 국회 운영위원장실에서 마주한 여야 원내총무(지금의 원내대표) 간 대화 내용이다. ‘비행기 표’는 예산안 처리가 지연되어 여야 총무단 전원이 부부 동반으로 유럽 여행을 가기로 한 계획에 차질을 빚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이다. 법정 날짜는 ‘선언적’인 것일 뿐이라는 것으로, 여야를 막론하고 지키겠다는 의식은 보이지 않는다. ‘그거나’는 당 총재와 총무 자신이 특별히 부탁한 ‘그 무엇’을 가리킨다.

밀실 야합·변칙이 국회의 전통?

밀실 야합, 졸속 증액, 변칙 처리, 쪽지 예산, 제 밥그릇 챙기기, 외유성 해외 출장 등등. 무려 4조원의 추가 부담을 국민에게 떠넘기고 기다렸다는 듯 해외 나들이에 나선 국회의원들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이어지고 있다. 해당 의원들에 대한 소환 운동을 벌이자, 낙선 운동을 펼치자는 등 좀체 가라앉을 기색이 없다. 하지만 국회의원들이나 그들이 소속된 정당의 지도부는 ‘잠시 시끄럽다가 이내 잠잠해질, 잊힐 것’임을 잘 안다. 그러기에 여론이 들끓어도 별로 개의치 않는 눈치이다.

당 지도부까지 이런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말이 ‘쪽지’이지 실은 한데 어우러진 뒷거래의 표식이다. 그 야합·변칙 과정에 지도부 자신들은 공범, 아니 사실상 주범이다. 해외 나들이를 떠난 위원장과 여야 간사 등 예결위원들이 현장 권한을 활용해 자기 지역구 챙기기를 한 것이 분명하지만 그래봤자 하수인이라는 지적이다. 본인들은 아니라고 펄쩍 뛸지 모르나 뒷방에서, 그토록 엄격하게 규제하는 증액을 4조원씩 서슴지 않았다. 그 많은 돈이 진정으로 필요한 곳에, 효율적으로 사용되리라는 것도 장담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예전에는 여야가 치고받다가 시간을 허비해 12월31일 자정을 지나치게 되면 국회 본회의장 시계의 시침을 ‘12’자 앞으로 돌렸다. 비록 쇼라 할지라도 “입법기관인 국회가 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비판을 피하기 위한, 해는 넘기지는 않았다는 ‘밉지 않은 여야 합의’였다. 그런데 앞다퉈 국회선진화법 운운하던 지금의 여야는 그 어느 쪽에도 준법 의식이 없었다.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모르는 몰염치를 자행했다.

이번 해외 나들이에 나선 예결위 소속 의원 9명 중 7명이 올린 금액은 5백17억원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지도부와 다른 의원들의 부탁이다. 그러니 되레 “억울하다”고 하소연하는 사람이 나올 법하다. 또 해외 나들이는 그동안 예산 주무르느라 고생한 데 대한 위로용인데 너무하다는 푸념을 할 수도 있겠다.

제 밥그릇 챙기는 데 여야가 따로 없어

이들은 혈세를 쓰기 위해 ‘예산 심사 시스템 연구를 위한 해외 출장’이라고 둘러댔다. “중남미와 아프리카 몇몇 나라들에게서 무엇을 배우겠다는 것이냐”라는 비난만 오히려 더 자초하고 말았다. 차라리 솔직하게 심신의 피로를 풀고 에너지를 충전하기 위함이라고 했다면 그 직분의 엄중함에 미루어 참을 수 있을 것이라는 한탄도 들린다. 속이 빤한데도 계속 딴소리를 하니 한 사람당 1천5백여 만원, 도합 1억5천만원을 국고에 환수해야 한다는 주장이 공감대를 넓히고 있다.

해외 나들이는 비단 예결위 소속 의원들만이 아니다. 비난이 비등해지자 아태 지역 나들이 계획을 보류한 예결위 다른 팀 외에 국토해양위·문화체육관광방송위·행정안전위 소속 의원들도 실은 해외 나들이를 준비 중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통상위 소속 의원들은 이미 남미로 떠났다.

공부하는 모양새를 내느라, 의원 외교를 한답시고 연구소를 시찰하거나 무리해가며 현지 지도자와의 면담 일정을 잡고, 교민 간담회를 여는 억지는 국민들도 이미 아는 수순이다. 모두는 아니라도 상당수의 해외 출장이 그렇고 그러함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다.

그나마 요즘은 해외 공관의 눈길을 피해 ‘밤 문화’를 즐기러 나갔다가 현지인과 시비가 붙어 물의를 일으킨 의원들의 축축한 소식이 들리지 않아 다행이다. 맨발로 비행기 내를 돌아다니거나, 포크로 이빨 새를 쑤셔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붉히게 하는 의원 또한 없는 듯하다. 담배를 피우겠다고 공항 청사 밖으로 나갔다가 길을 잃는 바람에 수행한 국회 입법조사관이 다음 비행기 편으로 모시고 왔다는 식의 얘기도 뜸하다.

그러나 부인에게 명품 쇼핑을 시키고, 지인들을 챙기느라 선물 보따리를 잔뜩 싸들고 오는 진풍경은 아직도 여전한 것으로 전해진다. 일각에서는 해외 나들이를 주변에 미리 고지해 상당액을 ‘수금’한다는 얘기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의원들로서는 해외 출장을 이유로 ‘고달픈 지역구’를 잠시나마 벗어나는 해방감을 즐길지 모르나, 국민 혈세를 이처럼 허투루 써버리기에는 너무 아깝다. 국회는 의원연금 예산으로 1백28억원을 책정하고, 의원 세비 30% 삭감은 슬그머니 지나쳤다. 만약 의원연금 포기 약속 등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면, 그것은 국회의원의 잘못이 아니라 전적으로 믿은 사람의 책임이 될 판이다. 이러니 “선거용으로 내뱉은 말을 진짜처럼 들어서는 안 된다”는 비아냥거림이 나온다.

국회의원윤리실천규범 등이 결혼식 주례를 금지하는 등의 규제가, 공명선거 풍토를 위한 것이라고 여긴다면 큰 착각이다. 모두가 자신들을 위함이다. 1만5천원으로 제한했던 선물 규정을 없앤 것도 마찬가지다. 합법적 핑계가 되기 때문이다. 당초의 1만5천원 한도도 부담을 줄이려는 발상의 산물이었다. 자기네 이익을 위해서라면 여야가 따로 없다.

이런 정치권의 행태를 표로 응징하자고 모두들 다짐했지만, 매번의 선거 때는 그렇고 그랬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선택의 제한도 한몫했겠으나 그 못지않게 쉽사리 잊어버리는 국민들의 책임도 크다는 지적이다. 예산을 자기 지역구에 빼돌리고 외유에 나섰다는 의원들에 대한 비난은 ‘중앙’의 얘기일 따름이다. 지역구에서는 “일 잘하는 우리 의원님”이라고 박수를 받는다. 그렇다면 중앙당 지도부라도 각성해야 하는데 그들 자체도 별다르지 않으니 기대할 게 없다. 밥그릇 챙기는 데는 여야가 한통속이다. 국민이 깨어야 한다는 말밖에 할 수 없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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