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 복원 공사 ‘찜찜한’ 끝마무리
  • 엄민우 (mw@sisapress.com)
  • 승인 2013.01.14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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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불에 탔던 숭례문의 복원 공사가 만 5년째에 접어들고 있다. 시간은 숭례문의 상처를 아물게 했다. 현재 숭례문 복원 공정률은 95%이다. ‘가림막’ 넘어 자태를 드러낸 숭례문에는 언제 끔찍한 화상을 입었었냐는 듯 새살이 돋았다. 겉으로 보면 금방이라도 다시 만나볼 수 있을 것처럼 예전 모습을 되찾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마냥 기대만 하기에는 석연찮다. 완공되기 전부터 잡음이 새어나오고 있다.

무엇보다 숭례문을 원래의 웅장한 모습으로 복원할 수 있었으나 예산에 발목이 잡혔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시사저널>은 이번 숭례문 복원을 둘러싼 논란들을 현 숭례문복구자문위원의 단독 증언을 비롯해 관련 업계 전문가들과 문화재청 관계자를 통해 추적했다.


ⓒ 시사저널 최준필
최초 숭례문은 지금보다도 1.2~1.5m가량 키가 컸다. 태조 이성계 시절 숭례문을 처음 세울 때 기초 지대석(바닥에 깐 돌)과 문짝 문설주(문짝을 끼우기 위해 세운 기둥)가 꽂힌 바닥돌인 문지도리석을 포함한 높이만큼 기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종과 성종 때 중수(손질하고 고침)하고, 이후에도 성곽이 계속 축조되면서 기단이 묻혀갔다. 일제 강점기 때 전차를 놓으면서 묻히게 된 것도 원인이 되었다. 그렇게 감춰져 있던 기단이 모두 나오게 된 것은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숭례문 복원을 위한 사전 발굴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였다. 당시 문화재청은 숭례문을 기단이 드러난 원형대로 복원할지, 소실되기 직전의 모습대로 복원할지 정비 방안을 재검토하기로 했다.

그동안 일부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기단을 밖으로 드러내 숭례문의 원래의 웅장한 모습을 살려내자는 의견이 제시되었지만, 문화재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숭례문의 기단이 묻힌 것은 조선 시대에 이미 이루어진 것이고 복원 시점이 태조 대가 아닌 조선 후기라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해당 이유가 전부는 아니었다. 숭례문이 키가 커질 수 있었음에도 다시 1.5m를 묻게 된 데에는 ‘예산’ 문제도 있었다는 증언이 나왔다.

<시사저널>은 “복원 과정에서 발굴한 기단을 그대로 살려 복원하자는 의견을 냈으나 ‘예산’을 이유로 거부당했다”는 숭례문복구자문단 인사의 증언을 단독 입수했다. 숭례문복구자문단은 학계·기술계 등 원로 학자 및 문화재 전문가들로 이루어졌다. 지난 5년 동안 숭례문 복원 공사 작업에 대해 실질적인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이번 숭례문 복원 사업에 참여한 신응수 대목장을 비롯해 6명의 무형문화재 장인들을 선정하는 데에도 참여하는 등 커다란 역할을 한 원로 집단이다.

숭례문 복원에 사용된 안료(위) ⓒ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제공 복원 공사 현장(아래) ⓒ 시사저널 사진자료
기단부 살려야 웅장한 멋 살릴 수 있어

제보한 자문위원은 문화재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는 문화재 분야의 원로이다. 이름 밝히기를 꺼린 그는 “내가 자문위원을 하면서 쓴소리를 하면 앞뒤가 안 맞는 것이지만 기단 문제는 짚고 넘어가야 한다”라고 말했다. 숭례문복구자문단의 자문위원 ㄱ씨는 발견된 기단을 다 드러내고 최초의 모습으로 복구할 것을 문화재청측에 주장했다. 묻혀 있던 부분을 드러냄으로써 숭례문의 웅장한 모습을 다시 구현할 수 있고, 땅에 묻혀 비율이 어긋난 아치문 모양도 살릴 수 있다는 취지에서였다. 무엇보다 원래의 모습을 되살리는 것이 복원 취지에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화재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산’이 더 들어간다는 이유를 들었다. ㄱ씨는 “문화재청이 반대하면서 예산이 더 들어가고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고 얘기하던데, 이것은 이치에 안 맞는 얘기가 아니냐. ‘무사석(성문을 쌓을 때 사용하는 돌 중 하나)’이 땅속에 묻혀 있어 부식 및 노화가 많이 되어서 대부분 갈아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예산 문제도 있고 매설물 때문에 여러 복잡한 것이 많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끝까지 의견이 관철되지 않자 화가 난 ㄱ씨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끝까지 반대했다는 것을 기록에 남겼다가 보고서에 써라. 그리고 분명 여기에 대해 훗날 지적이 나올 텐데 그때 얘기할 핑계거리를 만들어둬라.”

학자들이 숭례문 초기 기단을 살리는 것을 강조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숭례문 초기의 웅장한 멋을 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조유전 경기문화재연구원장에 따르면 초기 남대문은 구름과 맞닿아 있는 웅장한 모습으로 지어졌다. 조유전 원장은 “숭례문이 처음 지어졌을 당시 숭례문 주변 지대는 임금이 있는 도성으로 갈수록 점점 높아지는 모습을 보였다. 지금으로 따지면 서울역 쪽에서 숭례문 쪽으로 지대가 올라가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도성에 들어가려 하면 남대문이 구름 위에 걸쳐 있는 것처럼 느껴져 사람들에게 경외심을 갖게 했다. 숭례문 사이의 문은 구름 속에 들어가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그만큼 애초에 지을 때 기차게 계획을 잘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은 “숭례문 복원 공사에 들어간 예산을 감안하면 예산 때문에 기단을 못 살렸다는 것은 납득이 안 된다. 처음부터 이 부분을 감안해서 예산을 잡았어야 맞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했다.

드러난 기단을 살려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자 문화재청은 대안을 내놓았다. 유리벽을 만들어 원래 기단을 볼 수 있게끔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안에 물이 찰 수 있고 결로 현상이 생길 수 있는 등 문제가 예상되어 해당 안을 하지 않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라고 전했다. 이는 결국 드러낸 기단을 다시 덮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제공
숭례문 안료는 ‘일본 봉황 나카가와’ 제품

숭례문을 둘러싼 논란은 기단 복원 문제뿐만이 아니다. ‘일본산으로 숭례문의 옷을 입혔다’는 일제 단청 재료 수입에 대한 지적도 있다. 단청은 목조 건물에 화려한 색채로 장식하는 것을 말한다. 사찰이나 고궁을 보면 건축물 안팎에 화려한 단청무늬가 그려진 것을 볼 수 있다. 단청에는 크게 안료와 아교라는 두 가지 원료가 사용된다. 안료는 색깔을 내는 원료이고 아교는 이를 목재에 붙도록 하는 ‘풀’이다. 숭례문에 사용된 안료 11가지 중 9가지는 모두 일본에서 수입한 것이다. 최종덕 숭례문 복구단장은 “안료는 조선 시대에도 중국·일본 등에서 수입해 사용했다. 사용해본 결과 중국산보다는 일본산의 품질이 우수해 채택한 것”이라고 말했다. 

안료를 바르는 데 사용된 아교도 일본산을 사용했다. 2009년 안병찬 경주대 교수가 단청용 아교를 재현했으나 접착력이 떨어져 사용할 수 없었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이것도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황평우 소장은 “전통 아교를 개발할 의지가 있었다면 개발할 때까지 시간을 줘야지 2009년에 안 된다고 바로 접는 게 말이 되느냐”라고 지적했다.

숭례문에 사용되는 안료는 ‘일본 봉황 나카가와’라는 업체의 제품이다. 해당 업체는 1897년부터 일본에서 안료 제조를 해온 업체로서 ‘일본 근대화’ 발전에 일조해온 곳이다. 해당 안료는 ‘가일아트’라는 업체에서 독점 납품하고 있었다. <시사저널>은 해당 업체가 숭례문 단청에 사용되는 아교나 안료를 공급하게 된 배경 등에 대해 묻기 위해 회사와 접촉을 시도했다. 가일아트 관계자는 “거의 전 세계 제품들을 문화재청에서 비교테스트를 했고, 여러 감정이 얽혀 있음에도 좋은 것을 쓰려다 보니 일본산을 쓰게 된 것이다. 납품하게 된 제품은 조달청 입찰을 통해 숭례문 안료로 채택된 것”이라고 말했다.

숭례문에서 나온 부자재 처리에 관한 문제도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숭례문 화재 이후 문화재청은 “재사용이 가능한 수습 부재는 복구 시 다시 사용하고 나머지는 연구 자료와 숭례문 화재를 잊지 않기 위한 전시 자료 등으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현재 부자재들은 경복궁 고궁박물관 근처에 있는 부재 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다. 최종덕 숭례문 복구단장은 “재사용되지 않은 부자재는 2016년까지 파주 헤이리에 전통건축부재보관센터를 만들어 전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숭례문 내부나 인근이 아닌 파주 헤이리에 전시관을 짓는다는 것을 놓고 실효성에 대한 지적이 많다. 문화재위원 출신인 한 인사는 “숭례문과 그렇게 거리를 떨어지게 만들면 거길 누가 보러 가겠나. 숭례문 근처 건물을 매입해서라도 근처에 두어야지. 결국 자료 보관소가 될 것”이라고 우려를 표했다.

‘전통 방식으로 복원한 것으로 보는 것이 맞느냐’에 대한 논란도 이전부터 끊이지 않고 나왔다. 처음 공개 발표회 때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석재를 쌓았는데 나중에는 크레인을 통해 작업했다는 지적이다. <시사저널>이 입수한 사진에도 석재를 크레인으로 옮기고 있는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하지만 문화재청은 억울함을 호소한다. 문화재청측은 “전통 기법으로 한다고 원칙을 정했지만 현실적으로 옛날과 똑같은 기법으로 숭례문을 복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대 사회의 환경이 전통 사회와는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라고 토로했다. 과거에 석축 부분을 굴삭기로 작업했다는 점을 지적받았던 것에 대해서도 억울함을 호소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당시 석축 공사 논란이 일어난 부분은 일제 강점기 때 콘크리트를 채워 넣었던 곳”이라고 말했다.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은 여기에 반박하는 사진을 제시했다. 굴삭기가 석축 사이에 쌓인 토사를 퍼내는 사진이었다. 황평우 소장은 “석축 사이의 흙더미는 조선 시대 토목 기법을 배울 수 있는 중요한 단서인데 수작업이 아닌 굴삭기로 파냈다. 처음에 전통 기법으로 하겠다던 발표와 어긋나는 부분이 너무 많다”라고 지적했다.


숭례문 복구 다 되어가도 그대로인 ‘문화재보호법’ 

숭례문 화재 당시 부각된 문화재 관리 소홀 논란 뒤에는 ‘문화재보호법’이 있었다. 문화재보호법에 따르면 해당 문화재가 국유 문화재라고 해도 문화재 소재지인 지방자치단체가 맡게 되어 있다. 문화재에 대한 등록은 문화재청이 맡으면서 관리는 시청이나 구청이 맡는 구조이다. 그렇다 보니 책임 소재도 불분명하고 문화재 관리에도 비효율적이라는 지적이 많다. 지자체는 해당 분야에 전문가도 아닐뿐더러 문화재 관리 외의 업무도 있어 현실적으로 문화재를 관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숭례문은 서울시 중구가 관리를 담당해왔다. 지난해 안재혁 서울시 중구 도시관리국장은 “중구 관할에만 문화재가 100여 개가 되는데 이를 직원 3명이 관리한다”며 어려움을 호소했다. 숭례문의 경우 상징성 및 국민 정서를 고려해 복구가 완료되는 대로 문화재청이 맡기로 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언 발에 오줌 누기 식’이라는 지적이 많다. 문화재청 역시 인력이 부족하긴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현재 숭례문 복원 공사는 문화재청 수리기술과에서 맡고 있으며, 매주 대전에서 직원이 1명씩 서울에 올라오는 식으로 교대 근무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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