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씨앗 ‘밀실 발탁’
  • 김현일 대기자 ()
  • 승인 2013.02.05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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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 후보 낙마 계기로 본 박당선인 인사 스타일

“김용준마저!!!”

박근혜(GH) 정부의 첫 총리 후보자 사퇴 소식에 많은 이들이 개탄과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다.

“어느 누구인들 성하겠냐만….”

이른바 기성세대 가운데 얼마가 부동산을 포함한 재산 형성 과정, 본인과 자녀의 병역과 교육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느냐는 의구심이 끊이지 않는다. 여기에 관한 한 여야가 없다. ‘김용준’에 대한 실망감으로 핏대를 올리는 언론 일각도 사석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챙길 기회’ 자체가 없던 젊은 층과 ‘근로소득세 한 푼 안 낸 백수’ 외에는 죄다 걸려드리라는 자조도 이어진다.

그러나 ‘김용준 낙마’에 대해서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필연론이 압도적이다. ‘법과 원칙’의 대명사로 불리던 인사였기에 편법 증여, 부동산 투기, 자녀 병역 기피는 의혹 그 자체만으로도 용납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역사 기록으로 남을 ‘정권 첫 총리 사퇴’는 개인 ‘김용준의 비극’이자 ‘GH의 비극’이다. 당선인에게 최소한 위기의 시발임은 분명하다.

지난 1월25일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업무보고를 받기 전 모두 발언을 하는 박근혜 당선인. 옆은 하루 전 총리로 지명된 김용준 인수위원장. 그러나 김위원장은 ‘의혹’이 이어지자 국회청문회도 열리기 전, 후보 지명 닷새 만에 사퇴했다. 인수위원장직은 계속 수행한다. ⓒ 인수위사진기자단
‘김용준 비극’은 예고된 수순

역대 어느 정권이건 출범 초기의 위세는 대단했다. 새로 시작하는 만큼 ‘나의 과오’는 없고 ‘손볼 대상’만 널려 있기에 모두들 움츠렸다. 사정의 시퍼런 칼날이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탓이었다. 그러기에 기세를 올리며 거리낄 것이 없는 양 국정을 리드했고, 실제 그랬다. 그리고 이런 정부에 국민은 폭넓은 지지를 보냈다.

40%대 초반의 대선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된 김영삼(YS)·김대중(DJ) 대통령의 경우 당선인 시절 지지율은 대선 득표율의 2배인 80%대를 기록했다. YS의 경우 집권 반년이 지났을 때는 90%를 훌쩍 넘어섰다. 나중에야 어찌되었든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 시절 지지율은 86%나 되었다. 이명박(MB) 대통령은 75% 수준이었다. 그런데 GH는 65% 전후이다. 패배한 야권 지지자들의 여전한 반감 강도를 고려하더라도 심각한 양상이다. 벌써부터 이렇게 삐거덕거리니 앞날이 걱정스럽다.

물론 지지율에 얽매일 것만은 아니다. 많은 이가 고개를 젓더라도 국가 백년대계를 추진하는 과정의 지지율 하락이라면 오히려 바람직하다. 그러나 거듭되는 패착의 결과라면 얘기는 다르다. 모든 잣대를 ‘국민’에게 맞추는 GH로서는 눈앞에 전개되는 인사 난맥으로 인한 민심 이반 실상을 진지하게 반추해야 한다.

탄탄하게 짜인 청와대와 내각의 진용을 주력 삼아 국정을 강도 높게 주도해야 그 짧은 5년 임기 동안 무엇인가의 결실을 이뤄낼 터인데, 그와는 정반대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인사의 핵심 중 핵심인 총리 인선에서 초대형 에러를 냈으니 여간 엄중한 사태가 아닐 수 없다. GH가 날카롭게 비판했던 MB의 인사에도 한참 못 미치니 딱하다.

MB는 취임 직후 거듭된 촛불 시위로 정국 주도에 실패했다. 기세등등한 새 정권 초반에 촛불 시위가 가능했던 것은 ‘고소영 내각’이라는 인사 실책과 그에 대해 비등한 비난 여론이 불씨가 되었다. MB의 권위가 심각한 도전을 받아서다. 그러한데 GH는 아예 취임 전 ‘총리 후보자 낙마’라는 대형 사고를 냈다. 인사가 만사라는데, 시작부터 불안하다. 불안을 넘어 불길하다는 우려까지 나오는 판이다.

‘김용준 낙마’ 사태가 인사와 관련된 첫 사고라면 일면 이해할 수 있다. 대상이 이미 헌법재판소장을 역임한 데다가 법과 원칙에 투철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총리 후보자였으니 착오가 있을 수 있다는 측면에서 말이다.

그러나 ‘비리 종합 세트’처럼 비친 이동흡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파문에다, 인수위 청년특위위원과 수석 대변인 인선에 따른 잡음을 보면 그게 아니다. 이동흡 후보자 점지의 주체가 MB 청와대라는 사실을 십분 양해하더라도 여타 사례를 살피면 GH의 인사 시스템에 구조적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단순한 ‘장고(長考) 끝에 악수(惡手)’가 아닐 듯싶다. ‘김용준 비극’은 예고된 수순일 수 있다.

구조적 문제의 ‘구조’는 이른바 ‘밀실 인사’를 가리킨다. GH가 때로는 ‘환관’에 비유되는 측근 몇몇의 보좌를 받고 있다지만 전문화된 조직은 어차피 아니다. 또, 전문성이 다소간 있더라도 그 방대한 대상과 자료를 소수 인원이 꼼꼼하게 따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원맨(?) 인사가 사고를 칠 가능성은 상존한다.

그나마 이루어진 밀실 인사도 발표 전까지 봉인되어 있어 ‘밀봉(密封) 인사’라는 닉네임까지 더한 GH의 머릿속에, 인사는 보안이 생명이라는 경구가 새겨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렇다. 보안은 매우 중요하다. 숱한 사람들이 기를 쓰고 달려드니 자칫 잡음이나 양산하기 십상이다. 음해·중상모략이 판칠 수도 있다. 이러한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보안은 절실하다.

그러나 이런 과정도 활용 여하에 따라 민심의 풍향을 저울질할 수 있는 긴요한 수단이다. 인사팀에서도 미처 인지하지 못한 하자를 발견하는, 여과(濾過)라는 순기능도 있다. 부작용을 막겠다고 밀실에 앉아 그 많은 인사를 재단하려는 시도는 무모를 넘어 어리석은 짓이다.

먹지를 대고 손으로 한 글자씩 써가며 문서를 작성하던 1950년대에 이러한 비화도 있다.

국회 인사청문회가 도입된 2000년 이래 낙마한 총리 후보자는 4명. DJ 정부 장상·장대환, MB 정부 김태호(사진 왼쪽부터), GH 정부 김용준 등이다. 두 장후보는 ‘개인 의혹’으로 임명동의안이 부결되어 연속 탈락하는 진기록을 세웠고, 김태호 후보자는 후보 지명 후 21일 동안 갖가지 의혹 시비에 시달리다 국회 본회의 표결 직전 사퇴했다. ⓒ EPA 연합
인사 파일도 한계… ‘열린 인사’ 절실

‘인재를 발굴하기 위해 중앙청 앞에 추천함을 설치했다. 그때 천거된 인물 중 하나가 윤 아무개이다. 독일 뮌헨 대학에서 산림을 전공했다고 한다. 인재가 귀했던 시절, 이승만 대통령이 덥석 그를 농림부장관에 임명했다. 안경 한쪽 다리를 노끈으로 연결해 쓴 것은 그렇다 치고, 농정을 몰랐다. 도저히 안 되어 1개월 반 만에 해임했다. 귀향하는 퇴임 장관에게서 달라진 것은 안경 다리였다. 안경을 고친 것이 전부이다. 결재도 자신과 관련된 딱 하나였다.’ 광복 후 우리 행정부의 구석구석을 꿰고 있던 신두영 전 감사원장의 증언이다.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얘기라고 치부할 일만이 아니다. 전산화된 인사 X파일이 정리되어 있다지만 거기에도 구멍은 숭숭 뚫려 있다. DJ가 총리 후보로 지명한 장상·장대환의 경우 관련 자료가 부족해서 사단이 벌어졌던 게 아니다. MB가 지명한 김태호 총리 후보도 다를 바 없다. 조금만 유의해도 알 수 있는 임대소득 탈루 등 이런저런 건들로 21일 만에 자진 사퇴해야 했던 김후보이다.

MB 정부 인사 검증 허점의 대표적 사례인 검찰총장 후보 천성관의 낙마에 쐐기를 박은 자료는 통상의 기관 자료에서 챙기기는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다. 막강한 검찰 조직을 동원했던 천후보가 백기를 든 것은 그저 알고만 지낸다는 아파트 이웃과 외유할 때 지출한 명세가 드러나서였다.

하물며 그나마 자료 이용도 한계가 있을 수 있는 ‘밀실 인사’는 위험천만이다.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우를 범할 소지가 널려 있다.

그럼에도 대개의 지도자들은 밀실 인사와 그에 부수되게 마련인 보안에 집착한다. 이런 성향은 또 ‘깜짝 인사’로 이어진다. 국민의 찬탄을 일으켜 국면 전환이 될 것을 기대하는 데서 비롯한 ‘깜짝 인사’는 박정희 대통령과 그 이후의 아날로그 시절에나 통하던 것이다. 지금은 찬탄은커녕 되레 흠결투성이 인사로 야유나 받기 마련이다.

역대 대통령 거의가 다르지 않았지만 특히 모양새와 보안을 유달리 역설했던 YS에게는 이와 관련한 비화가 여럿이다. YS 정부의 첫 안기부장(현 국정원장)은 김덕. 그러나 당초 내정자는 다른 교수였다. 서강대 이 아무개였는데, 그가 출입하는 안기부 요원에게 귀띔한 사실을 보고받은 YS가 즉각 교체했다.

안기부장 건이야 단순 보안 문제였지만 김상철 서울시장의 경우는 달랐다. 김시장 자택 정원 부지가 그린벨트를 상당 부분 침범했다는 보도가 이내 터져나왔고, 김시장은 취임한 지 일주일도 안 되어 물러나야 했다.

여론의 뭇매에 마음이 상한 YS는 모든 고위 공직자의 경력과 재산 상황 등에 대한 정밀 점검 특명을 내렸는데, 점입가경이라고 점검 책임자인 인사비서관의 고려대 졸업 학력이 가짜로 드러나 또 우스개가 되었다.

1993년 2월26일, 바로 전날 취임식을 가진 YS는 청와대 2층 대접견실에서 신임 장관(급) 34명에게 임명장을 수여했다. 대통령 취임 후로는 첫 대면에서 YS가 출입기자인 필자에게 던진 말이 ‘철통 보안’이다. 수여식 다음 순서는 1층 현관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것. 신임 총리와 장관들을 대동하고 접견실을 나서려던 YS는 필자와 마주치자 대뜸 “내각 어때?”라고 물었고 “면면도 면면이지만 취재에 애를 먹었다”는 대꾸에 “내가 직접 임명을 통보하면서 미리 새나가면 없던 일로 하자고 했다”고 소개했다. 자신감 넘치는 YS의 보안 자랑이 이어지는 바람에 현관에 내려오는 동안 신임 대통령 옆 자리는 신임 황인성 총리가 아닌 기자의 차지가 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의전상 문제뿐 아니라 당시 TV 촬영팀이 동영상을 확보하지 못하게 된 것도 그래서였다.

2명의 총리 후보자가 연이어 탈락하는 초유의 기록을 세운 DJ의 경우도, 따지고 보면 밀실의 부산물이다. 밀실 인사의 또 다른 병폐인 호오(好惡)가 지나쳐 빤히 보이는 문제점을 간과한 결과였다.

GH의 생부이자 정치적 멘토인 박정희 대통령의 당시 영문 이니셜은 PP(President Park). 용인술의 달인 PP는 당정 개편, 무엇보다 총리·장관 임명과 교체를 통치의 요긴한 수단으로 활용했다. 대내적으로는 충성심 확보, 대외적으로는 국면 전환에 두루 써먹었다. 장기 집권한 만큼 별도의 존안(存案) 자료는 굳이 소용되지 않았으나 보안은 무척이나 강조되었다. 부정 축재 등 문제가 발생하면 이른바 ‘친서(親書)’를 보내 단속했다. PP 친서는 최후 경고장이었다.

PP가 후했던 부분은 ‘허리 아래’ 즉, 이성 문제인데 ‘정인숙 권총 살해 사건’에도 불구하고 정일권 총리를 수개월 더 재임케 한 경우가 대표적이다. 정여인 소지품에서 당시로는 드문 복수여권 등이 나와 불똥이 엉뚱한 자신에게 튀었음에도 그랬었다.

GH의 김용준 후보자 선택과 관련해서는 인수위 내부에서조차 어리둥절해한다. 마침 이동흡 헌법재판소장 후보자의 하자 소동이 빚어져 검증의 절박함이 생생한 와중에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하냐는 것이다. 김후보자가 헌법재판소장에 취임하던 당시(1994년)에는 현재와 같은 인사청문회가 없었음에도 일단 청문 과정을 거친 것으로 GH가 혼동한 것이 아니냐는 추론이 나돈다.

정국 주도하려면 밀실 인사 탈피해야

그게 어떤 이유였건 확실한 것은 모든 게 밀실 인사의 소산이며, 가장 주요한 총리 인사가 엉망이 되었고, 그로 인해 GH의 권위와 리더십이 상당량 훼손되었다는 점이다.

총리 인선 지연은 연쇄적으로 불러올 장관 임명 지연으로 이어지는 등 많은 차질을 초래한다. 같은 조치도 발동 시기에 따라 그 효과가 천차만별인데 ‘있을 수 없는 황당한 에러’에 의한 이후의 차질은 단순한 시간상 차질이 아닐 것이 분명하다. 일련의 정책과 조치의 강도가 전혀 다를 터이다. 효과가 반감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징크스 얘기는 그래서 나온다. GH가 밀실 인사 행태를 지양하더라도 어이없는 인사 검증 구멍이 생길 것이라는 미신 같은 말이 떠돈다. 이는 ‘김용준 낙마’ 파동의 충격이 그만큼 크다는 증좌이다.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고… 유사한 에러 내지 불상사가 또 발생할지 모른다는 우려 섞인 관측도 있다. 조심하면 할수록 ‘깐깐한 시아버지 밥에 돌 들어간다’는 속담을 명심하라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GH는 밀실 인사를 하루빨리 탈피해야 한다. 시대착오적 고집은 버려야 한다. 보안에 무심하라는 게 아니라 보안 제일주의 사고를 걷어치우라는 말이다. 오만을 버리는, 근본적인 발상 전환이 따라야 한다. 소통을 그렇게 외친 MB 정부가 소통에 가장 문제가 있다는 비판을 듣는 이유를 곱씹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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