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쉴 때는 전화하지 마”
  • 강성운│독일 통신원 ()
  • 승인 2013.03.27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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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노동계·정계, 근무 시간 외 업무 스트레스 방지 추진

스마트폰이 널리 보급된 독일에서는 요즘 ‘칼퇴근’이 무색하다. 퇴근 후나 휴가 중에도 전화 또는 이메일로 업무를 처리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6월 독일노동조합연맹(DGB)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근무 시간 외에도 업무 연락을 받느냐’는 물음에 피고용인의 60%가 ‘그렇다’고 응답했다. ‘자주’ 혹은 ‘매우 자주 그렇다’고 응답한 비율이 33%에 달했다. 독일노조연맹의 아넬리 분텐바흐 씨는 “항시 ‘대기 중’인 상태가 노동자들의 건강을 크게 해치는 것은 물론 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했다. 스트레스로 인해 병가를 내는 노동자가 늘어나면서 전체 산업의 생산성이 그만큼 떨어진다는 것이다.

올해 1월29일 연방노동보호·노동의료청이 발표한 ‘독일의 스트레스에 관한 보고서 2012’에 따르면 설문에 참여한 1만8000명의 노동자 중 35%가 ‘업무 스트레스로 두통을 겪고 있다’고 응답했다. ‘불면증을 앓고 있다’는 비율도 27%에 달했다. 직장 내 스트레스 요인으로는 동시에 여러 업무를 수행하는 이른바 ‘멀티태스킹’, 전화·이메일 연락으로 인한 잦은 업무 방해, 부족한 휴식 시간 등으로 나타났다.

독일 츠비카우의 폭스바겐 공장. 이 회사는 퇴근 후 회사 메일 서버를 아예 차단해 노동자들의 여가를 보장하기로 했다. ⓒ AP 연합a
휴대전화·컴퓨터가 노동자 스트레스 주범

독일의료보험조합(DAK)이 발표한 건강 보고서도 직장에서 발생하는 이런 종류의 스트레스가 최근 급증한 사실을 보여준다. 2012년 병가를 낸 노동자 270여 만명의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된 이 보고서에 따르면 ‘우울증 및 기타 정신질환’으로 인한 병가 일수는 1997년에 비해 165%나 늘었다. 정신적 고통으로 병가를 낸 노동자 숫자도 22명 중 1명꼴로 전년보다 두 배 이상 증가했다. 가파른 증가세 배경에는 과거에 비해 우울증 등 정신건강상의 문제를 숨기기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하려는 추세가 있다. 하지만 원인이 어떻든 노동자들의 스트레스와 정신건강은 개인이 아닌 노동 환경의 문제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지난해 6월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독일 연방노동장관은 고용주들에게 “스마트폰을 포함한 휴대전화와 컴퓨터를 이용한 업무 연락에 대한 뚜렷한 규정을 마련해달라”고 요구했다. 업무 시간 외에 수시로 연락을 하는 이른바 ‘휴대전화 테러’는 노동자에게 스트레스를 줄 뿐 아니라 초과 근무 시간에 포함되지 않아 독일 노동법상 문제가 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일연방고용주협회(BDA)는 “피고용인들이 계약서에 명시된 것보다 일을 더 많이 할 의무는 없다. 반대로 (일에 대한) 적극성과 성과를 내려는 준비된 자세를 강제로 막을 수도 없다”고 밝혀 노동자의 스트레스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설 의사가 없음을 내비쳤다.

BDA의 발언은, 2011년 말 폭스바겐 사가 업무 마감 이후 회사 메일 서버를 아예 차단시키면서 노동자들의 여가를 보장하기로 한 것과 대조를 이룬다. 회사 메일 서버가 작동하면 퇴근 후 개인적인 메일을 확인할 때도 업무 관련 메일을 송·수신할 수 있고, 스트레스를 줄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겠다는 뜻이다. 단, 회사 경영자는 예외이고 일반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전화 연락은 가능하다. 폭스바겐 노사협의회의 노조측 대표인 베른트 오스터로 씨는 “노사 양측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고 전했다.

폰 데어 라이엔 노동장관이 ‘휴대전화 테러’에 규제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표명하자 독일금속노조(IG-Metall)는 발 빠르게 스트레스 방지안을 제출했다. 금속노조의 한스-위르겐 우르반 씨는 “위험 물질, 소음 또는 부족한 광량 등과 달리 정신적 부담에 대해서는 고용주에게 (책임이) 명백하게 요구된 바가 없다”고 법안 제출 배경을 설명했다.

지난해 6월 제출된 이 법안은 올해 1월27일 사회민주당(SPD)의 마누엘라 슈베지크 부총재가 연방참의원회에 상정할 때까지 긴 겨울잠을 잤다. 각 주 총리들로 구성된 연방참의원회는 연방의회와 마찬가지로 법안을 상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는데 올해 초 니더작센 주 선거에서 사민당 출신 총리가 선출되면서 연방참의원회의 주도권이 보수 성향의 기독민주연합(CDU)과 자유민주연합(FDP)에서 진보 성향의 사민당·녹색당 연합정부로 넘어갔다. 슈베지크 부총재는 기독민주연합 의원인 폰 데어 라이엔 노동장관에게 “말만 할 것이 아니라 개선하기 위한 행동을 보여야 한다”고 촉구하면서 이 법안에 대한 반응을 예의 주시하겠다고 압박했다.

일괄적 규정은 비현실적이라는 주장도

라이엔 노동장관은 이틀 뒤인 1월29일 직장에서의 정신적 압박에 대한 반대 성명을 고용주협회와 공동 발표하기로 하면서 법안 제정 없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고용주협회가 갑자기 불참을 통보하면서 공은 다시 의회로 넘어왔다. <슈피겔> 온라인판은 ‘고용주들이 스트레스 방지 규정을 가로막았다’고 비판했다. 친기업 보수 성향 일간지인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너 차이퉁 역시 “실천이 필요한 때다. 그러나 (협상) 상대가 없이는 불가능하다”라는 노동장관의 말을 인용해 협상 결렬 원인을 고용주연합 쪽으로 돌렸다.

일각에서는 노동자의 스트레스 문제가 공적으로 토론되는 것은 반기지만, 스트레스 방지 규정의 효용성에는 의문을 표시한다. 이미 노동보호법에 휴식 시간이 보장돼 있기 때문에 추가로 규정을 만들기보다는 고용주와 대화를 하거나 노조의 도움을 받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의료·언론·외식업 등 노동 시간이 불규칙적이거나 수시로 업무 연락이 오가는 특수 직종도 있는데 이를 일괄적으로 규제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잉그리트 슈미트 독일연방노동법원장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너 차이퉁과의 인터뷰에서 “새로운 규정을 마련한다 해도 개개인을 스트레스로부터 지킬 수는 없다. 스트레스 방지 규정보다 중요한 것은 피고용인들이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다. 자신감과 굽히지 않는 자세는 어떤 규정으로도 대신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동시에 경영자들이 책임감을 갖고 변화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피고용인의 자유 시간은 근무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이러한 문화가 정착되면 어떠한 규정보다 훨씬 큰 성과를 가져올 것이다.”

독일의 노동 조건은 OECD(국제협력개발기구) 가입국 중에서 괜찮은 편이다. OECD 자료에 따르면 노동자의 주당 평균 노동 시간은 2011년 기준 35.5시간으로 한국의 44.6시간에 비해 9시간가량 적다. OECD가 내놓은 더 나은 삶 지표 중 ‘일과 생활의 균형’ 부문을 봐도 매주 50시간 이상 일하는 노동자 비율은 독일이 5.14%인 반면, 한국은 22.48%나 된다. 야근과 잔업을 밥 먹듯 하는 우리네 입장에서는 스트레스 방지 규정이 독일 노동자들의 투정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일은 원래 고되고 직장 생활은 스트레스를 주기 마련이라는 통념에 의문을 제기하고, 정치인들이 재계에 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촉구하는 것. 이는 독일의 노동 환경이 한국보다 월등히 나아지게 한 원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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