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피난처에 숨은 수상한 기업 많다
  • 김진령 기자 (jy@sisapress.com)
  • 승인 2013.04.17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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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진아일랜드 등에 자회사…국세청, 역외 탈세·비자금 조성 여부 주목

카리브 해에는 현대판 보물섬이 널려 있다. 세계 각국 정부의 징세를 피하기 위해 수많은 부자가 자신의 재산을 카리브 해 조그만 섬나라에 있는 조세 회피 지역에 숨겨뒀다. 그 많은 조세피난처 중 요즘 영국령 버진아일랜드(BVI)가 주목받고 있다. BVI에 재산을 숨겨온 부자들의 명단이 유출됐기 때문이다. 국세청에서도 한국계 기업이나 한국인이 있는지 확인 작업에 나섰다. BVI에서 수백만 건의 이메일과 문서가 유출돼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에 흘러들어간 것.

부자에게 제일 무서운 것은 세금이다. 조세피난처는 법인세나 소득세, 자본 이득, 증여 소득, 상속 재산에 대한 세금을 매기지 않기에 ‘세금 천국’으로 불린다. 조세 회피 지역은 부자들의 재산을 숨겨준다. 이로 인해 BVI에서 털린 자료에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하다. 영국의 가디언이나 미국의 워싱턴포스트 같은 언론사도 가세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정보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우리 정부도 ICIJ와 접촉해 국내 인사의 정보를 가져오겠다는 입장이지만 아직까지 성과는 없다.

카리브 해에 떠 있는 부자들의 보물섬

우리나라 국세청이 탈세 문제에 공격적으로 나서고 있는 것은 현 정부의 ‘지하경제 양성화’와 관련이 깊다. 복지 예산 확보와 경제 활성화를 위해서라도 지하로 흘러들어가고 있는 탈루 소득과 세원 발굴이 필수적이다. 우리나라 지하경제 규모가 엄청나기 때문이다. 지난해 7월 조세정의네트워크(TJN)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1970년대부터 2010년까지 한국에서 해외 조세피난처로 이전된 자산은 총 7790억 달러, 우리 돈으로 약 870조원에 달한다. 이는 중국과 러시아에 이어 세계 3위 규모다. 그럼에도 국세청에 BVI 등 조세 회피 지역에 거액의 해외 금융 계좌 신고를 한 개인이나 국내 기업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조세 회피 지역을 이용한다고 해서 모두 범법 행위로 볼 수는 없다. 국내 기업도 합법적인 절세 차원에서 이를 이용하고 있다. 국세청에서는 국내 기업이 역외 피난처에 세운 회사가 대략 20만개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하지만 금융위원회에 제출된 공시 서류에 등장하는 법인은 아무리 많아도 1만개가 넘지 않는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시사저널>은 공개된 자료를 중심으로 국내 기업이 조세 회피 지역에 세운 법인을 알아봤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조세  회피 지역은 카리브 해의 케이먼 군도와 버진아일랜드, 말레이시아의 라부안 정도다. 우리나라 기업은 이 중에서 케이먼 제도를 제일 선호하는 듯하다.

카페베네는 케이먼 군도에 카페베네글로벌홀딩스, 카페베네필리핀, 카페베네차이나 본사를 설립했다. 카페베네와 같이 프랜차이즈 영업을 하는 회사가 조세 회피 지역에 해외 지주회사를 세우는 이유는, 브랜드 라이선스료 등을 받는 영업을 할 때 조세 회피 지역이 절세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국내 영업과 관련된 지주사를 조세 회피 지역으로 옮겨 절세를 시도하는 기업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 국세청의 철퇴를 맞을뿐더러 국민 정서상으로도 용납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해외 현지법인에서 얻은 소득의 경우 외국에서 장사를 해서 얻은 수익이기 때문에 이런 절세 수법이 양해되는 것일 뿐이다.

이랜드그룹 계열사인 이랜드월드도 이랜드패션차이나홀딩스 본사를 케이먼 군도에 세웠다. 코스닥 등록기업인 코미코는 해외 법인을 관할하는 미코홀딩스를 2009년에 케이먼 군도에 설립했다. 중소기업인 서울금속도 지주회사인 서울메탈홀딩스를 세운 뒤 중국과 홍콩 등의 10여 개 계열사를 관할하는 글로벌 에스엠 테크 리미티드(Global SM Tech Limited)를 2008년 8월 케이먼 군도에 자회사로 설립했다. 국내 증시에 상장된 코라오홀딩스는 본사가 케이먼 군도에 있다. 라오스에서 현대차, 기아차, 중국 체리자동차의 딜러로 활동하고 있는 코라오디벨로핑을 자회사로 두고 있는 이 회사는 2009년 설립됐고, 2010년 10월 국내 증시에 상장됐다.

대기업도 카리브 해와 라부안에서 영업

대기업 중에서 조세 회피 지역에 지주사를 설립한 회사로는 현대자동차그룹이 있다. 현대자동차는 차이나밀레니엄코포레이션(CMEs)이라는 해외 지주회사를 케이먼 군도에 설립했다. 현대자동차가 59.6%, 기아자동차가 30.3%, 현대모비스가 10.1% 지분을 갖고 있다.

효성그룹도 효성캐피탈을 통해 카리브 해에 지주회사를 세웠다. 효성캐피탈은 자회사인 효성파워홀딩스를 케이먼 군도에 설립했다. 신고된 업종은 변압기 제조업.

케이먼 군도를 선호한 대표적인 기업은 SK다. SK그룹은 주력 계열사들이 모두 케이먼 군도에 투자회사를 차렸다. SK가스와 SKE&S는 공동으로 케이먼 군도에 본사를 둔 글로벌 오퍼튜니티즈 펀드(Global Opportunities Fund)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최태원 SK 회장의 선물 투자 사건과 관련해 이름이 오르내렸던 회사다. SK증권은 PCM Asia와 PCM Asia Opportunity Fund라는 회사를 케이먼 군도에 세웠다. SK이노베이션은 2007년 9월 케이먼 군도에 투자업을 하는 SK Energy Road Investment Co.,Ltd.라는 회사를 세웠고 버뮤다에는 SK Innovation Insurance(Bermuda), Ltd.라는 보험사를 세웠다.

SK㈜는 케이먼 군도에 설립한 투자회사인 SK GI 매니지먼트의 지분 100%를 갖고 있고 SK텔레콤은 케이먼 군도에 있는 아틀라스인베스트먼트와 YTK인베스트먼트의 지분 100%를 갖고 있다. 아틀라스는 케이먼 군도에 SK Telecom China Fund L.P.와 Technology Innovation Partners L.P라는 투자회사를 차렸다. 동양그룹도 케이먼 군도에 Tong Yang Asia Ltd.라는 회사를 세웠다. 동양의 100% 자회사로 장부가액은 65억4000만원. 서류상 회사의 목적은 제조업이다.

현대중공업도 트라이브리지 등 두 개의 금융투자업종 회사를 케이먼 군도에 두고 있다. 이 회사는 선박 금융과 관련된 회사로 보인다. 현대중공업은 또 다른 조세 회피 지역인 마셜아일랜드에도 MS Dandy Ltd라는 회사를 갖고 있다.

이번에 금융 거래 정보 유출 사고가 터진 버진아일랜드에 관계사를 갖고 있는 국내 기업도 꽤 많다. 한화그룹의 한화케미칼은 버진아일랜드에 한화솔라원인베스트먼트 홀딩스를, 케이먼 군도에 한화솔라홀딩스, 한화솔라원, 한화큐셀인베스트먼트 등 3개의 계열사를 두고 있다. 한화에서는 이 회사에 대해 “한화가 인수한 솔라원과 큐셀에 달려 있던 회사”라고 밝혔다.

CJ그룹은 CJ대한통운과 CJ를 통해 각각 WPWL, 엔보이미디어파트너라는 회사를 버진아일랜드에 두고 있다. 금융회사인 엠벤처투자도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APVIM이라는 회사를 세웠고, 케이먼 군도에도 별도의 회사 두 곳을 두고 있다.

국내 대표적인 금융회사인 미래에셋캐피탈은 캐나다의 자회사를 통해 특수 목적 회사인 베타프로를 바베이도스에, 자회사인 YD온라인을 통해 YD인터내셔널이라는 투자 전문회사를 케이먼 군도에 세웠다.

우리금융지주나 현대증권은 말레이시아의 조세 회피 지역인 라부안에 회사를 세웠다. 라부안은 비금융회사도 많이 이용하는 곳으로 나타났다. 상장 기업인 통일교 계열의 일성건설의 장부상 최대 주주인 IB캐피탈이 라부안에 있는 투자회사다. 또 다른 제조업체인 한국타이어의 계열사 한국타이어월드와이드는 라부안에 증권 투자를 목적으로 한 오션캐피탈인베스트먼트를 설립했다. 자본금은 미국 돈 0.01달러. 탈세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이유영 조세정의네트워크 동북아 대표는 “고무를 다루는 타이어회사가 계열사를 라부안에 두고 있다면 반드시 또 다른 조세피난처인 네덜란드에 현지법인을 두고 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의 말처럼 한국타이어는 네덜란드에 Hankook Tire Europe Holdings B.V.와 Hankook Tire Netherlands B.V. 등 두 개의 회사를 갖고 있고, Hankook Tire Europe Holdings B.V.는 다시 이탈리아와 헝가리 등 유럽 지역 5개 법인을, 헝가리 부다페스트 법인이 다시 폴란드 법인을 지배하는 등 유럽 지배구조의 핵을 네덜란드에 두고 있었다.

네덜란드에 몰리는 국내 대기업들

네덜란드는 형식상 ‘조세 회피 지역’이 아니지만, 내용적으로는 조세 회피 지역과 다를 게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네덜란드는 ‘역외 절세 수법’의 모든 길로 통한다. 말레이시아의 주산품인 고무나 목재를 다루는 무역이 네덜란드에서 꽃을 피웠고, 이곳에서 역외 금융을 통해 사실상 조세 회피 효과를 내는 서비스를 하는 회사가 많기 때문이다. 이유영 대표는 “네덜란드를 포함한 베네룩스 3국은 지주회사와 관련된 규제 수준이 낮고 회사법이나 세법 규제 수위가 낮아 사실상 조세 회피 지역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특히 특허 라이선스료를 많이 챙기는 IT 관련 기업이 본사나 지주회사를 베네룩스 3국에 차리는 경우가 많다. 이 대표는 “무수히 많은 글로벌 기업의 해외 영업망에서 벌어들인 돈의 합법적인 중간 기착지(해외 지주회사)이자, 경우에 따라서는 이 돈이 꼬리를 자르고 비실명 은닉 계좌로 흘러들어가는 연결 고리 노릇을 한다”고 설명했다.

애플·구글 같은 글로벌 IT기업이 역외 금융이나 조세피난처에 두고 있는 해외 지주사를 통해 ‘절세’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진 일이다. 이들이 본사가 있는 미국에 내는 세금이 실제로는 매출액의 1%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알려지고 있다. 해외에서의 수익을 본사가 있는 미국으로 송금하지 않고 대부분 미국 밖의 조세 회피 지역에 있는 지주사 등에 쌓아놓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글로벌 기업인 삼성그룹은 흔히 알려진 조세피난처에는 계열사나 종속회사가 없는 대신, 조세 회피 지역이나 마찬가지인 네덜란드를 이용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경우 Samsung Electronics Benelux B.V.라는 회사를 네덜란드에 세운 뒤 이 회사 산하에 서아프리카·동아프리카·이집트를 커버하는 자회사와 칠레·페루·베네수엘라 등 남아메리카 대륙을 커버하는 회사, 러시아·우크라이나 등 동유럽을 관할하는 회사 등 20여 개의 자회사를 세웠다. 삼성물산, 삼성SDS, 제일기획도 네덜란드에 자회사를 두고 있다.

절세를 목적으로 조세 회피 지역에 회사를 차리는 것은 불법이 아니다. 하지만 수출 대금 등을 국내에 들여오지 않고 조세 회피 지역에 쌓아둔 채 세금을 회피하고 있는 이들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재미있는 점은 조세피난처를 제공하고 있는 카리브 해의 조그만 섬나라들이 그 대가로 큰돈을 벌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은 농한기에 비닐하우스를 불법 도박장으로 빌려주고 푼돈을 받는 도시 근교의 영세농과 다를 게 없다. 조세피난처 운영의 최대 수혜자는 이 시스템의 설계도를 만들고 운영해온, 식민지 시대부터 유럽 금융자본의 태동을 함께한 서유럽의 금융자본이다. 이들은 여전히 글로벌 기업을 대상으로 역외 금융 등 꼬리가 잡히지 않는 복잡하고 현대적인 금융 서비스와 비밀 금고를 제공하고 있다. 그래서 아시아 출신이든 남미 출신이든 아프리카 출신이든 돈이 많아지고 비밀이 많아지면, 일단 ‘첨단 금융 서비스’의 본산인 서유럽에 거점을 마련한 뒤 이들의 주선으로 돈의 꼬리표를 자르고 인도양과 카리브 해 연안에 차려진 ‘하우스’로 돈을 숨긴다.

영국계 금융자본이 좌지우지하는 것으로 알려진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의 금융 정보가 털린 것을 놓고 세계 각지의 부자와 글로벌 기업이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한국 정부를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 정부가 이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겠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1차 대전 이래 미국을 포함한 서방 선진국 정부는 이들을 상대로 제대로 칼을 뽑아본 적이 한 번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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