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탕 사극에 ‘역사’는 없다
  • 정덕현│문화평론가 ()
  • 승인 2013.04.17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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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션화되고 있는 역사 드라마의 딜레마

<뿌리 깊은 나무>를 쓴 김영현 작가는 사실 세종대왕을 사극으로 해보자는 제의를 여러 번 받았지만 그때마다 고사했다고 한다. 세종 시절이 워낙 태평성대였기 때문에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나오기 어렵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게 완강히 고사해온 김영현 작가를 되돌린 것은 이정명 작가가 쓴 <뿌리 깊은 나무>라는 동명의 팩션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고 김영현 작가는 가능성을 보았다고 했다.

실제 역사는 태평성대였지만 소설은 한글 창제 이면의 극적이고도 미스터리한 사건에 추리 장르를 섞은 팩션으로 풀어냈다. 역사적 사료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극적인 이야기를 허구를 통해 창조한 것이다. 김영현 작가의 이 일화는 지금 현재 사극이 어떤 단계에 접어들어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사극에서는 이제 극적인 재미가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자리 잡았다. 제 아무리 역사적인 인물과 사료가 있다고 해도 극적 재미가 없다면 드라마화되기 어렵다. 당시 김영현 작가는 다음 작품은 어떤 것으로 할 것이냐는 필자의 질문에 “사극과 현대극의 구분은 이제 점점 의미가 없어지고 있다”고 답했다.

MBC 한 장면. ⓒ MBC 제공
<마의>에서 불거진 ‘자기 복제’ 논란

흥미로운 것은 <마의>를 끝낸 이병훈 PD 역시 향후 작품 구상에 대해 “역사의 한 인물을 조명하는 사극은 더는 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 말에는 사극이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이병훈 PD의 고민도 들어 있다. “사극은 이제 역사의 틀 안에만 머물러서는 아무도 보지 않게 되었다. 나름으로 역사를 지키려는 노력을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제 나조차도 어디 가서 역사 고증 운운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다.” 더 극적인 이야기를 원하게 된 대중의 욕구에 맞추기 위해서 점점 역사의 틀 안에서 상상하기가 어려워진다는 얘기다.

이병훈 PD는 ‘이병훈표 사극’이라고 불릴 정도로 사극의 한 장르를 개척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RPG 게임식 미션 구조에 한 단계의 고난을 이겨낼 때마다 성장하는 주인공의 스토리가 그것이다. 이 형식은 이미 고전적으로 검증된 것이지만, 너무 많이 반복되다 보니 대중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마의>에서 불거진 자기 복제 논란은 그래서 나오게 됐다. “MBC <성공시대>에 등장했던 사람들을 분석해봤다. 그 많은 사람의 성공 스토리에는 대부분 힘겨운 환경과 과제가 있고, 고난이 있으면 그 위기를 극복하는 등의 대체적으로 여덟 가지 과정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거기서 벗어나는 사례가 거의 없었다. 사극에서 그 성공 스토리를 담다 보니 역시 과정이나 패턴이 비슷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새로운 캐릭터를 담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한다. <마의>의 백광현이라는 캐릭터도 애초에는 허준 같은 성인이 아니었다고 한다. 백광현 주변에 유독 여자들(강지녕, 숙휘공주, 서은서, 소가영)이 많았던 것은 본래 이 인물을 여색을 밝히는 캐릭터로서 의술은 뛰어나지만 좀 더 인간적인 인물로 그리려 했기 때문이었다는 것. 하지만 서은서라는 과부와의 로맨스를 그리려고 하다 보니 백광현이라는 인물의 도덕성이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

결국 난봉꾼(?)으로 그리려던 계획을 접게 되면서 착한 캐릭터, 착한 사극의 반복이 생기게 되었다. 즉, 이병훈 PD가 앞으로 역사 속 인물을 조명하는 사극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깔려 있다. 그 하나는 역사 왜곡이라는 비판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상상력을 채워 넣기 위해 만들어낸 성공 스토리가 결국에는 반복적으로 보여진다는 것이다.

MBC 와 김이영 작가. ⓒ MBC 제공
퓨전 사극 시대 연 이병훈 PD

사실상 역사에 상상력을 덧붙인 퓨전 사극의 시대를 연 주인공이 이병훈 PD라는 점에서, 이제는 아예 역사를 벗어버리려 하는 사극 트렌드와 새로운 상상력에 버거움을 느끼는 그의 상황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과거 <조선왕조 오백년> 같은 정통 사극을 하기도 했지만 본격적으로 이병훈표 사극이 생긴 것은, 1999년 그가 <허준>으로 다시 사극을 시작하면서부터다. 이병훈 PD는 당시 <조선왕조 오백

SBS 와 김영현 작가. ⓒ SBS 제공
년> 같은 정통 사극을 한다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고 여겼다. 역사를 재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누가 만들어도 비슷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먼저 시도한 것은 사극을 한 번도 쓰지 않은 작가와 작업을 하는 것이었다. <허준>의 최완규 작가, <대장금>의 김영현 작가, <이산> <동이> <마의>의 김이영 작가를 그렇게 만났다. 이들은 모두 사극을 써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사극의 문법에서 벗어나 오히려 자유로운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고 한다.

사극에 색채를 입힌 것도 이병훈 PD의 첫 시도였다. 이전의 사극들은 거의 대부분의 의상이 무채색에 가까울 정도로 백의를 줄곧 사용했었는데, 다양한 색상의 의상을 입힘으로써 색채를 살렸던 것이다.

또 OST(드라마 배경음악)에서 과거 국악과 클래식에 머물러 있던 것을 과감하게 뉴에이지 같은 선곡으로 바꾼 것도 이병훈 PD다. 사극에 이야기를 바꾸고, 색채를 입히고, 음악을 바꾸면서 생겨난 변화는 사극의 시청자층이 젊어졌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중·장년층이 거의 대부분이었지만 <허준>을 기점으로 해서 젊은 층의 사극 시청이 본격적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이런 폭발적인 성공은 고스란히 이병훈 PD에게 부담이 되기도 했다. 1999년 <허준>부터 최근 <마의>까지 12년간 무려 7개의 사극을 만들었다. 한 사극당 최소 50회에서 77회까지 이어지는 사극을 하면서 매번 다르게 제작해야 한다는 대중의 요구는 버거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병훈 PD의 작품들은 원작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의 인물을 꺼내와 거기에 상상력을 덧붙이는 식이었다. 그러니 거의 2년에 한 번꼴로 만든 사극 속에서 계속 새로움을 내놓는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물론 최근의 사극들처럼 역사의 틀을 과감히 벗어버렸다면 이런 고민들은 좀 더 쉽게 해결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병훈 PD는 역사에 상상력을 섞는 퓨전 사극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긴 했지만, 그래도 실제 역사를 바꾸는 부분에 대해서는 상당한 고민을 해온 감독이다. “요즘 사극은 역사를 벗어나서 이야기를 훨씬 다채롭게 풀어내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본래 사극이 갖고 있던 독특한 색깔, 즉 역사가 만들어내는 어떤 힘이 사라지고 있는 것은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다.”

MBC 과 최완규 작가. ⓒ MBC 제공
거리낌 없는 현대어 사용도 문제

실제로 사극에서 이제는 별 거리낌 없이 현대어가 사용되는 것에 대해서도 이병훈 PD는 아쉬운 마음을 드러냈다. “사실 그건 잘못된 것이다. 사극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이고 문학적인 예법이 있고, 사극의 대사에는 그 시대의 고유한 맛과 아름다움이 있는데 그것을 마음대로 깨는 것은 문제가 있다. 물론 내 경우도 거기서 자유롭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이병훈 PD의 경우에는 그래도 주로 역사적 인물이 나오는 궁중에서는 고어체를 사용하고, 사가에서는 현대어를 사용하는 방식을 고집해오고 있다. 이병훈 PD만큼 우리 사극의 흐름을 꿰뚫는 인물도 없다. 그가 열어놓은 이른바 퓨전 사극의 문은 이후 사극의 흐름을 바꾸는 역할을 했다. 바로 그런 변화 때문에 <대장금> 같은 사극은 우리나라의 벽을 넘어 세계인으로 하여금 우리 사극과 문화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열려진 상상력의 세계는 이제 사극이 본래 갖고 있던 역사를 아예 벗어버리려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더는 사극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최근 방영되기 시작한 두 개의 사극이 대표적이다.

<장옥정, 사랑에 살다>는 장옥정을 조선 시대의 패션 디자이너로 그려내고, <구가의 서>는 구미호 전설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완전히 다른 판타지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다. 이 두 드라마를 우리는 여전히 사극이라 부를 수 있을까. 하지만 이병훈 PD 역시 자신도 새로 작품을 계속하게 된다면 “더는 역사 속의 인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원작이 있는 작품을 하겠다”고 밝혔다. 역사의 시대는 확실히 저물고 있다.


ⓒ MBC 제공
은퇴한다는 보도까지 나왔는데 사실인가?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적어도 지금과 똑같은 패턴의 반복은 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늘 석세스 스토리를 다루다 보니 비슷비슷해진 게 사실이다. 최완규 작가, 김영현 작가, 김이영 작가, 이렇게 다 색채가 다른 작가들과 작업했는데도 비슷한 색이 나온다는 것은 결국 내가 갖고 있는 스토리에 대한 생각이 완고했다는 얘기다.

이 작가들은 모두 사극이 처음인지라 내게 거의 의지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더 비슷해지기도 한 것이다. 앞으로 또 이와 비슷한 사극을 반복한다는 건 무리일 것 같다. 다만 원작이 있는 작품이라면 역사를 벗어난 것에서도 조금 자유로울 것 같고, 또 새로운 이야기를 해보는 것에서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는 있다.

사극의 소재로서 인물을 선정할 때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나?

사극은 결국 역사 속의 인물을 꺼내 조명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굳이 의미 없는 인물을 보여줄 필요가 있을까? 예전에 <야인시대>라는 드라마가 있었는데 그게 결국은 깡패들의 이야기였다. 일본 깡패를 이겼다고 우리나라 깡패를 칭송하는 건 어딘지 잘못된 것 같았다. 허준 같은 인물은 <동의보감> 같은 명저를 남겼지만 역사에 몇 줄 나와 있지도 않다. 허준의 이야기는 그래서 소설 <동의보감>을 쓴 고 이은성 작가가 거의 만들어낸 것이다. 또 <상도>의 주인공인 임상옥 같은 거상은 조선 순조 때 나라 세금의 반을 냈다고 한다. 이렇게 큰일을 했지만 역사에 기록이 별로 없는 인물들을 조명하는 게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남녀노소 누구나 볼 수 있는 착한 사극을 고집해왔다. 그것은 이병훈 감독의 성향인가?

처음부터 그렇게 하려 했던 건 아니다. 나도 연출자다 보니 시청률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허준>을 찍을 때는 허준이 주먹질하는 장면이나 예진아씨의 노출도 준비시켰다. 예고편으로 나간 것에는 속옷 차림에 비를 맞으면서 무릎 꿇고 허준에게 비는 장면이 있는데, 10회 정도에 들어갈 이 장면은 결국 방영되지 않았다.

<허준>이 단 7회 만에 자리를 잡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니까 10회에서 자극적인 장면을 도저히 넣을 수가 없더라.(웃음) 그건 <대장금> 때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도 이영애씨 목욕신이 예고까지 나갔는데 결국 빠르게 자리를 잡으면서 본 방송에서는 포기하게 됐다. 이게 몇 번 반복되다 보니까 괜하게 착한 이미지가 생겨서 아예 그런 장면들을 못 넣게 된 것이다. 내 사극이 착하다고? 오해다.(웃음)

올해 69세다. 사극 촬영은 체력적으로도 많이 힘들 것 같다.

아니다. 절대 그렇지 않다. 사실 촬영은 하나도 힘든 게 없다. 체력적으로도 그렇고. 다만 좋은 그림을 잡아내는 과정에서 어려운 점은 있다. 하지만 사극에서 제일 어려운 건 촬영이 아니고 대본 작업이다. 어떤 인물을 할 것인지, 그 인물을 어떤 식의 이야기로 풀어낼 것인지 등 대본 사전 작업이 사실상 가장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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