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돈 명단을 입수하라
  • 강성운│독일 통신원 ()
  • 승인 2013.04.24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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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와의 전쟁’ 벼르는 독일 정부, ICIJ 조세피난처 기밀 자료에 눈독

4월3일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가 조세피난처 기밀 자료를 일부 공개했다. 이를 계기로 전 유럽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탈세에 관한 강력한 규제책이 힘을 얻고 있다. 독일의 경우만 봐도 낮은 과세율과 은행 비밀법, 느슨한 규제 등을 내세워 해외 자본을 끌어들이는 이른바 ‘오프쇼어 마켓(offshore market)’에 적어도 수백 명이 재산을 은닉한 정황이 포착됐다. 자료 유출 소식이 전해진 4월4일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은 “관련 자료가 각국 세무 부서에 전달되리라 기대하며 이를 반긴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최근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는 조세피난처인 영국령 버진 아일랜드에 재산을 숨긴 세계 유력 인사 명단을 공개했다. ⓒ photoeverywhere.co.uk
독일 정부는 그동안 거액의 돈을 주고 탈세자 명단이 담긴 ‘세금 CD’를 구매해왔다. 지난해 말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NRW) 주는 스위스 UBS 은행 자료를 사들이는 데 350만 유로(51억2000만원)의 비용을 지불했다.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이지만 충분히 ‘남는 장사’이기 때문이다. 이 세금 CD 한 장으로 찾은 은닉 자산은 최소 2억400만 유로였고, 예상 추징 세금은 자료값을 크게 웃돌았다. 이런 세금 CD를 구입해 독일 정부가 추징한 세금은 지난해 8월까지 25억 유로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정치권이 이번에 유출된 조세피난처 자료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독일에서 이 자료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곳은 ‘쥐트도이체 차이퉁’ 신문과 공영방송인 ‘북독일방송사(NDR)’였다. 하지만 두 언론사는 탈세 자료를 요구하는 정치권 요구를 단칼에 거절했다. NDR의 마틴 가르츠케 대변인은 “폭발력 있는 자료에 대한 관심은 충분히 이해되지만 취재원 보호가 최우선이다. 우리 방송사는 취재 자료를 제3자에게 넘겨주지 않는다”고 이유를 밝혔다. ‘쥐트도이체 차이퉁’측은 “언론은 경찰이나 검찰 그리고 세무 사찰을 돕는 기관이 아니다”라며 날 선 반응을 보였다. 독일에서 취재원 보호 원칙은 헌법에 버금가는 위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정치권에서도 더는 조르지 못하고 속만 태우고 있는 모양새다.

쥐트도이체 차이퉁이나 NDR은 조세피난처 자료에 대한 공개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조세피난처 자료 공개는 모두 미국 워싱턴에 위치한 ICIJ 본부의 지휘 아래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폭로 보도는 1년여 전 ICIJ에 소포로 배달된 하드디스크에서부터 시작됐다. ICIJ는 250만건, 무려 260기가바이트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자료를 컴퓨터 법의학 기법을 이용해 분류·정리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12만2000여 개의 유령회사, 1만2000여 명의 브로커 그리고 13만여 명의 탈세자가 윤곽을 드러냈다. 이렇게 얻어진 자료를 바탕으로 ICIJ는 전 세계 46개국 83명의 언론사와 공동 취재를 진행했다. 하지만 모두가 이 자료를 공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료 선별 작업에 참여한 독일의 제바스티안 몬디알 기자는 “전체 자료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전 세계에서 두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독일의 두 언론사 역시 자료의 일부만을 열람할 수 있다는 얘기다.

조세피난처 자료가 이렇게 엄격한 통제 아래 진행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몬디알 기자는 “위키리크스와 달리 ICIJ는 비밀 유지와 취재원 보호를 최우선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위키리크스는 2010년 줄리안 어샌지가 미국의 외교 기밀문서 25만건과 미군의 바그다드 공습 비디오 등을 인터넷에 공개하면서 큰 파문을 일으켰었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는 자료를 제공한 취재원의 신상 보호를 소홀히 해 이들을 위험에 빠뜨렸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ICIJ가 주도권을 내주지 않기 위해서라는 추측도 나온다. 정치권에 명단을 넘기는 순간 이번 폭로 보도가 탈세자 개개인에 대한 세금 징수와 처벌로만 끝날 가능성이 짙기 때문이다. 이는 독일의 경우만 봐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세금 CD에 덜미가 잡힌 개인은 처벌해도 탈세를 가능하게 하는 시스템까지는 손대지 못하고 있다. 탈세의 연결망을 붕괴시키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와의 공조가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EU 국가 간 자동 정보 교환 협정은 국외에 거액의 자산이 있는 사람의 신상과 자산 규모, 예금 이자 등의 정보를 자국에 자동으로 통보해준다는 조항을 담은 것인데 스위스와 오스트리아, 룩셈부르크의 반대로 8년 논의가 지지부진하다.

유럽 내에 있는 조세피난처 그리고 탈세자에 대한 압박은 점점 커지고 있다. 명단이 공개된 지 사흘이 지난 4월7일 ‘세금 파라다이스’라 불리는 룩셈부르크가 그동안의 반대를 거두고 자동 정보 교환 협정에 참여하겠다고 발표했다. 2015년부터는 룩셈부르크 은행에서 고액의 이자 수익을 얻는 외국인 명단이 자동으로 자국 세무 부서에 전달된다.

이탈리아·스페인 등 금융 위기 국가들 눈총

ICIJ의 자료가 불씨가 된 지금 과도한 국가 부채로 다른 나라에 손을 벌린 이탈리아·스페인·그리스·포르투갈·키프로스 등에 대해서는 곱지 않은 시선이 쏟아지고 있다. 4월13일 발행된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가난하다는 거짓말-금융 위기 국가들은 어떻게 자산을 숨기나’라는 제목의 커버스토리를 통해 “이들 남유럽 국가의 세금 윤리가 북유럽만큼만 됐어도 경제난은 금방 해결됐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4월 초 유럽중앙은행(ECB)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가구당 자산 규모의 중간 값에서는 키프로스가 26만6900유로로 2위를 차지했고 스페인이 18만7200유로, 이탈리아가 17만3000유로, 그리스가 10만1900유로로 독일의 5만1400유로를 크게 웃돌았다. “가난한 나라가 잘사는 나라 빚을 대신 갚아준다”는 독일인들의 말이 엄살이 아닌 것이다. <슈피겔>은 “납세자와 소액 저축자들의 돈으로 마련된 유로화 구제 기금이 결국은 금융 위기 국가의 부자들 배만 불려준 셈”이라며 “독일 시민의 세금에 손을 대기 전에 먼저 (자국의) 부자들부터 계산대로 모셔오라”고 주문했다. ICIJ의 조세피난처 폭로 보도가 탈세 시스템 문제를 넘어 남유럽 국가의 세제 개혁과 유로존 부채 부담의 재분배로 이루어질지 관심 있게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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