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입’이…
  • 김회권·조해수 기자 ()
  • 승인 2013.05.14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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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중 사태’ 후폭풍, 국내 정치 지형 변화는 물론 외교적 문제 비화될 수도

박근혜정부가 또다시 성추문에 휩싸였다.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성접대 의혹에 이어 박근혜 대통령의 첫 해외 순방지에서 윤창중 청와대 대변인이 인턴직원 여성을 성추행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청와대는 5월9일 새벽 윤 대변인을 전격 경질했다. 출범 100일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성추문으로 낙마한 고위 공직자가 두 명으로 늘어났다.

윤 전 대변인의 성추행 사건은 방미 기간 중 일어난 일로, 국제적 망신이다. 그런데 이번 사건을 놓고 청와대가 윤 전 대변인의 도피성 귀국을 방조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이런 의문의 근거는 피해 여성의 경찰 신고 접수 시간이다. 워싱턴D.C. 경찰국 사건 보고서에 따르면 피해 여성이 윤 전 대변인을 경찰에 신고한 시각은 5월8일(이하 미국 현지 시각) 낮 12시30분이다. 그런데 정확히 1시간 후인 오후 1시30분, 윤 전 대변인은 덜레스 공항에서 인천공항으로 가는 대한항공편에 몸을 싣고 있었다. 윤 전 대변인이 묵었던 페어팩스에서 덜레스 공항까지는 차로 30여 분이 걸린다. 경찰이 신고 접수를 하자마자 이 사실을 윤 전 대변인에게 통보했다고 하더라도, 공항 도착 시간은 오후 1시가 넘었을 가능성이 크다. 윤 전 대변인이 외교 사절 신분으로 VIP 대접을 받았다고 해도 30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발권해 탑승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민주당 원내대표실에 깔린 윤창중 전 대변인의 사진. 그는 방미 수행 중 성추행을 저질렀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 연합뉴스
“박 대통령에게 보고됐을 것”

현지 소식통에 의하면 윤 전 대변인은 한국대사관의 차량 지원 없이 공항에 도착해 자신의 카드로 직접 발권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반인과 다름없는 절차를 거친 셈인데, 이 경우 비행기 이륙 2시간여 전부터 체크인과 출국심사를 하는 점을 고려할 때 윤 전 대변인은 경찰 신고 접수 이전에 이미 덜레스 공항에 도착해 있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이언주 민주당 원내대변인은 “5월8일 오전 박 대통령의 미국 상·하원 연설이 진행되고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대통령 대변인이 대통령에 사전 보고 없이 귀국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다. 사건이 접수되기 직전, 사전에 정보를 입수하고 미리 도피시킨 ‘짜고 친 고스톱’이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신고 접수 시각이 낮 12시30분이 아니라 새벽 0시30분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 경우 역시 청와대가 윤 전 대변인의 혐의를 인지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민주당 여성 의원 23명은 5월10일 기자회견에서 “피해 여성의 신고 후 찾아온 경찰에게 윤 전 대변인이 외교 사절 비자를 내보이자, 경찰은 ‘추후 소환하겠으니 호텔에 머무르고 있으라’고 통보했다. 경찰이 한국대사관에 연락해 신병 확보 동의를 구하는 사이 (윤 전 대변인이) 귀국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대사관을 통해 윤 전 대변인의 사건 정보가 청와대에 보고됐을 개연성이 생긴다. 여권 관계자는 “경찰로부터 통보를 받은 주미 대사관이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피해 여성측에 합의를 시도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이런 일은 주미 대사관이 단독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다. 분명 윗선의 지시가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사건이 발생한 5월8일, 윤 전 대변인은 박 대통령과 함께 수행 경제인 조찬 간담회(오전 8시), 미 의회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오전 10시30분) 등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현재 이 일정에 윤 전 대변인이 참석했는지 여부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출국 시간으로 미루어보면 최소한 조찬 간담회에는 참석이 가능하다. 이때 윤 전 대변인이 어떤 식으로든 박 대통령에게 자신의 상황을 보고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추측이 제기되고 있다. 한 여권 관계자는 “윤 전 대변인은 박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이 크다. ‘억울하게 성추행 의혹을 받고 있다’는 식의 보고는 했을 것이다. 윤 전 대변인이 호텔에 자신의 짐을 버려두고 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불호령을 받고 쫓기듯 온 것이라는 방증 아니겠느냐”고 귀띔했다.

이번 사건의 향후 파장은 엄청날 전망이다. 단순히 국내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동안 박근혜정부는 장·차관 인사 사고로 여론이 악화됐을 때도 인사 검증 책임자 경질이나 시스템 개선 약속 등을 하지 않았다. 당시 청와대 참모들은 “즉각적인 경질과 같은 대증 처방을 박 대통령이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일단 드러난 문제를 해결한 뒤, 근본적인 처방은 차후에 논의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 박 대통령의 의중이라는 얘기다.

5월6일 뉴욕행 전용기 안에서 기자들과 인사하는 박 대통령 뒤에 윤 전 대변인이 있다. ⓒ 연합뉴스
당·청 간 ‘갑·을’ 관계 한 방에 역전될 것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즉각적이었다. ‘해외 순방 중 성추문’이라는 특수한 경우였지만 인사(人事)에 관해서 요지부동인 박 대통령이 윤 전 대변인을 전격 경질한 것은 사태의 심각성을 절감한 까닭이다. 앞으로 국내에 몰고 올 정치적 후폭풍이 엄청날 것이라는 예측을 가능하게 한다.

이번 사건은 당장 케케묵은 박 대통령의 ‘인사 불통’ 문제를 다시 수면 위로 끄집어 올렸다. 따라서 윤창중 쇼크가 ‘친박’ 위주로 가동했던 인재풀을 재구성하는 계기가 될 여지가 생겼다. 새누리당의 한 당직자는 인수위 시절부터 발목을 잡을 인물로 줄기차게 지목되던 윤 전 대변인을 결국 쓸 수밖에 없었던 배경으로 친박의 역사를 들었다.

“과거 한나라당부터 있었던 친박이 정권을 잡는 시점에서는 여러 분야에서 인재가 수급되었는데 가치로 결합하지 않고 대부분 인적 유대를 중심으로 뭉쳤다. 권력을 잡은 뒤 검증으로 넘겨 필터링해야 하는데 그럴 만한 인력풀이 없었다. 세상일은 사람이 하는 것인데, 이제부터는 검증 시스템 자체를 좀 더 엄격하게 만들지 않겠나.”

향후 새누리당과 청와대의 당·청 관계에 현격한 변화가 있으리라고 예상하는 분석도 있다. 새누리당의 일방적 열세가 한 방에 뒤집힐 것이란 얘기다. 대통령 거수기, 행동대장 등 때로는 굴욕적인 표현까지 들어야 했지만 청와대의 실책으로 제 목소리 내기에 나서는 의원들이 나올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청와대 참모들이 당분간은 정치공학적 사고를 할 수 없는 상황이다. 황인상 P&C정책개발원 대표는 “새누리당 내부에 친박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은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주는 모양새였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이제는 자기 목소리를 내려는 기류가 강해질 수 있다. 당내에서 다양한 목소리가 나온다면 그만큼 정권 초반에 대통령의 힘이 빠지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윤 전 대변인이 급히 귀국한 것이 미국 수사 당국의 조사를 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사실로 밝혀질 경우 미국에서 우리측에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다. 이럴 경우 외교적 문제로 비화될 수 있다. 하지만 미국측이 정상회담을 순조롭게 끝낸 상황에서 굳이 외교 문제로 만들려고 할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 지배적인 관측이다. 앞서 언급한 당직자도 “윤 전 대변인에게 포커싱이 되는 그런 문제를 정부가 달가워할 리 있겠나. 사전에 모두 조율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고집스럽게 밀어불인 ‘박근혜식 인사 1호’가 낸 출혈은 너무 많다. 첫 순방의 스타일은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 이제 박 대통령은 자신의 인사 스타일을 버려야 하고, 여당의 제 목소리 내기에도 신경 써야 하고, 야당의 비판도 감내해야 할 상황에 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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