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렇게나 해야 더 맛나다
  • 황교익│맛 칼럼니스트 ()
  • 승인 2013.05.21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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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철에 캐는 고운 조개…동아시아 바다에 두루 서식

우리는 조개를 사철 먹는다. 이탈리안 레스토랑에는 봉골레 파스타가 있고, 칼국숫집에는 바지락칼국수가 있으며 중국집에는 홍합짬뽕이 있다. 그렇게 먹는다고 나쁘다 할 수는 없으나 음식을 맛있게 먹는 방법은 아니다. 조개는 맛있는 계절이 있기에 그때 이들 음식을 내놓는 것이, 또 그때를 맞춰 먹는 것이 좋다. 조갯살이 쪼글쪼글 겨우 붙어 있는 조개에서 얻을 수 있는 맛이란 바다의 짠 내밖에 없다.

대체로 조개가 맛있는 계절은 봄이다. 바지락, 동죽, 모시조개 등등이 맛있다. 여름에 들기 전까지 이들 조개는 탱탱한 살을 조가비 안에 꽉 채우고 있다. 단맛도 최절정에 이른다. 봄의 조개는 아무렇게나 해도 맛있다. 아니다. 아무렇게나 해야 더 맛있다. 아무 양념 없이 삶거나 굽거나 찌거나 하면 조개 맛을 더 풍성하게 느낄 수 있다. 비린내를 감당하지 못하겠다면 파 정도 송송 썰어 넣는 것으로 끝내면 된다.

봄 조개 중에 도시 소비자에게는 다소 생소할 수 있는 조개 하나를 소개할까 한다. 명주조개라는 것이다. 맛뿐만 아니라 때깔도 정말 고운 조개다.

명주조개는 살색이 예쁘다. 살이 연해 살짝 익혀 먹는 것이 좋다. 동해의 맑은 바닷물과 깨끗한 모래에서 자라서인지 조가비의 때깔이 선명하고 맛도 맑고 가볍다. ⓒ 황교익 제공
명주조개의 정식 명칭은 개량조개다. 개량조개과의 조개인데, 이 과의 조개로는 동죽, 명주개량조개, 북방대합이 있다. 명주조개라는 말은 강원도와 경상도 일부 지역 사투리다. 명주개량조개도 강원도와 경상도 일부 지역에서는 명주조개라고 부른다. 이 두 조개의 구별은 쉽지 않다.

이 글에서는 강원도 지역 명칭을 따라 개량조개를 명주조개라 쓰기로 한다. 이 지역의 것이 특별나게 맛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명주조개는 동해 외에 남해와 황해 연안에서도 사는데, 충청권에서는 밀조개, 전북권에서는 노랑조개, 부산과 경남권에서는 명지조개로 불린다.

명주조개는 중국·일본·한국·베트남·타이완 등 동아시아 바다에 두루 서식하는 조개다. 이 지역들 모두 명주조개를 맛있는 조개로 여긴다. 조간대(간조 때 노출되었다가 만조 때는 바닷물에 잠기는 땅)부터 수심 10m 내외 지역의 모래 또는 개펄 섞인 모래가 주요 서식지다. 명주조개의 조가비 색깔은 이 서식지에 따라 달라지는데, 모래밭에서는 옅은 노란색이고 검은색의 개펄이 섞인 모래밭에서는 약간 어두운 색을 띤다. 따라서 모래가 고운 동해의 것이 색깔이 옅고, 황해의 것은 짙은 것이 일반적이다.

명주조개는 동해·남해·황해 가리지 않고 ‘모래의 바다’가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자란다. 한때 낙동강 하구에서 대량으로 잡혔는데, 하구언 공사로 모래를 잃으면서 명주조개도 사라졌다. 황해에서는 모래가 섞여 있는 개펄에서 많이 난다. 동해와 황해는 같은 명주조개여도 서식 환경이 달라 잡는 방법에 차이가 있다.

동해는 조간대가 거의 없으니 명주조개는 바닷물 속에서 내내 살고, 따라서 명주조개를 잡기 위해서는 배를 이용해야 한다. 배 뒤에 그물이 달린 쇠갈퀴를 달아 바닥을 긁어내 명주조개를 잡는다. 황해에서는 썰물일 때 노출된 땅에서 호미 등으로 캐서 잡는다. 내내 바닷물 속에 있는 명주조개와 조간대에 사는 명주조개는 그 맛도 다를 것이다.

명주조개는 광복 이후 잠시 해방조개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일제의 압박에서는 벗어났으나 그 당시 식량 사정이 좋지 않아 굶주리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이때 엄청난 양의 명주조개가 한반도 연안에 밀려들었다. 이를 캐다가 끼니로 먹었는데, 해방을 맞아 갑자기 많이 잡힌 조개라 하여 해방조개라 불렀다.

이처럼 엄청난 양의 명주조개가 연안에 몰려들 때가 있다. 깊은 바다에 있던 것이 어떤 환경 변화에 의해 뭍 가까이 몰려오는 것일 터인데 이때는 캐는 것이 아니라 거의 줍다시피 하는 상황이 연출된다. 근래에도 동해와 황해에서 가끔 이런 일이 벌어진다. 그러나 보통의 경우에는 명주조개가 귀하다. 도시 소비자에게는 더더욱 귀한데, 조가비가 얇고 살이 여려 장거리 운송과 장기 보관이 어렵고, 그래서 상인들이 도시로 내다팔지 않기 때문이다. 도시의 그 많은 조개구이집에서 명주조개를 만나는 것은 목욕탕에서 영화배우 만나기보다 어렵다.

명주조개의 명주는 비단을 말한다. 때깔이 예뻐 붙인 이름일 수도 있겠지만 조가비의 표면이 매끄러워 그 촉감에서 따온 이름이 아닌가도 싶다. ⓒ 황교익 제공
시인 백석이 쓴 동해 조개

흔히 조개 하면 황해의 것을 떠올리지만 동해에도 많은 종류의 조개가 있다. 명주조개를 비롯해 접시조개, 가리비, 개조개, 민들조개, 섭 등이 흔하다. 황해의 것은 갯벌의 조개이고 동해의 것은 모래의 조개다. 이 서식지의 차이 때문인지 조개 맛도 많이 다르다. 황해의 조개는 진하고 무거우며 동해의 조개는 맑고 가볍다. 1938년 6월7일자 동아일보에 시인 백석이 동해에 대한 글을 남겼는데, 여기에 동해 조개가 나온다. 동해 조개에 대해 이처럼 아름답게 쓰기는 어려울 것이다. 글의 일부를 옮긴다.

‘동해여! 오늘 밤은 이러케 무더워 나는 맥고모자를 쓰고 삐루를 마시고 거리를 거닙네. (중략) 이러케 맥고모자를 쓰고 삐루를 마시고 날미역 내음새를 맡으면 동해여 나는 그대의 조개가 되고 싶읍네. 어려서는 꽃조개가 자라서는 명주조개가 늙어서는 강에지조개가. 기운이 나면 헤를 빼어물고 물속 십리를 단숨에 날고 싶읍네. 달이 밝은 밤엔 해정한 모래장변에서 달바래기를 하고 싶읍네. 궂은비 부실거리는 저녁엔 물 우에 떠서 애원성이나 불르고 그리고 햇살이 간지럽게 따뜻한 아침엔 인함박 같은 물바닥을 오르락나리락하고 놀고 싶읍네. 그리고 그리고 내가 정말 조개가 되고 싶은 것은 잔잔한 물밑 보드러운 세모래 속에 누워서 나를 쑤시려 오는 어여쁜 처녀들의 발뒤굼치나 쓰다듬고 손길이나 붙잡고 놀고 싶은 탓입네.” <자연계와의 대화집/동해>

봄이면 나는 백석이 맛보았을 해정한 조개를 먹으러 동해로 간다. 내가 사는 도시에서는 이를 찾을 수 없으니 동해까지 가는 것이다. 속초시장 지하 어물전에도 조개가 있기는 하나 부러 고성군의 송지호 어항에 간다. 동해의 모래 바닥을 긁어 조개를 잡는 어부들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조개를 사고 요즘의 바다 사정은 어떤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는다. 그들과 말을 나누고 사는 명주조개는 더 귀하게 여겨진다. 이를 들고 집에 와서 한소끔 슬쩍 끓여 먹을 양이면, 봄 한철 이만한 호사가 없다. ‘맥고모자 쓰고 삐루를 마시고’ 동해를 거닐었던 백석이 가히 부럽지 않다.

여름이면 동해의 명주조개를 보기 어렵다. 모래 해안들이 거의 해수욕장으로 쓰이므로 조개잡이를 나가지 못하는 것이다. 한겨울에도 파도가 심해 조개잡이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대체로 봄과 가을에 동해의 조개가 많이 나온다. 송지호의 어부들은 봄 한철에만 명주조개를 잡고 만다. 자원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또 송지호의 명주조개는 제법 씨알이 굵은데, 어부들이 그해 많이 잡았다 싶으면 장기간 명주조개잡이를 쉬기 때문이다.

최근 전북 고창과 부안, 충남 보령 등 황해 연안에 명주조개가 몰려들었다. 이 지역들은 예전에 명주조개가 많이 나던 곳이었는데 어떤 이유에선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것이다. 동해의 명주조개는 꾸준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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