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해도 기다려, ‘검토 중’이야
  • 김회권 기자·양창희 인턴기자 ()
  • 승인 2013.05.31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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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인권위 ‘인권 침해 및 차별에 대한 권고 내역’으로 본 정신병원 실태

업계 평가대로라면 실패한 광고다. 2010년 12월21일 10개 주요 신문에 실린 서울시의 무상급식 반대 광고 얘기다. ‘전면 무상급식 때문에 128만 학생이 안전한 학교를 누릴 기회를 빼앗아서야 되겠습니까?’라는 공격적인 카피로 시민들을 설득하려 했지만 눈길이 쏠린 것은 글자가 아닌 발가벗은 아이의 사진이었다.

서울시가 야심차게 내놓은 광고는 이내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아이의 발가벗은 모습을 사용한 서울시의 몰지각한 행태가 당장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인권 침해 논란이 확산됐고, 2011년 7월11일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는 ‘어린이와 그 보호자의 자기결정권 및 인격형성권 등 인권을 침해한 행위’라고 결정하며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에게 재발 방지 대책을 수립해 시행하도록 권고했다. 하지만 인권위 권고에 서울시는 묵묵부답이다. 이미 권고를 내린 지 2년이 다 되어가지만 이 건에 대해서 어떤 대책도 내놓은 적이 없다.

<시사저널>과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가 공동으로 추진하는 정보공개 청구 캠페인 ‘문제는 정보 민주화다!’의 첫 번째 주제는 ‘인권’이다. 국가인권위원회에 정보공개를 청구해 ‘2011~12년 인권 침해 및 차별에 대한 권고 내역’ 자료를 통해 본 우리네 인권의 현실이다.

© 일러스트 배중열

‘검토 중’ 답변 기관 중 절반이 정신병원

어제의 인권과 오늘의 인권은 그 가치가 다르다. 직전 세대의 인권보다 지금 세대의 인권은 그 값과 범위가 좀 더 확장되었다. 인간의 보편적 권리가 확장되는 과정에서 끊임없는 문제 제기와 수용 과정이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인권위 자료를 살펴보면 2년간 인권위가 권고한 내역은 총 679건이다. 권고를 받은 기관은 보통 ‘수용’과 ‘일부 수용’ ‘불수용’ ‘검토’ 등의 답변을 보낸다. 자료를 보면 인권위의 권고가 수용된 건은 407건으로 전체의 59.9%를 차지하고 있다. 부분적으로 받아들인 일부 수용이 150건, 인권위의 권고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불수용이 40건이다.

이 중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 받아들여지지 않은 불수용보다 ‘검토’가 더 나쁜 대답이다. 2011~12년 인권위 권고에 대해 수용 여부도 밝히지 않은 채 방치하고 있는 건은 전체 권고 중 70건으로 10%에 달했다. 인권위 관계자는 “검토 중이란 것은 답변을 보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인권위의 문제 제기에 수용 여부를 제시하지 않은 채 검토 중이라는 답변으로 끝내버리는 것은 해당 기관이 가진 인권에 대한 무관심의 표현이며, 이는 인권위 권고의 실효성에 의문을 갖게 한다.

인권위 권고에 사법기관의 판결과 같은 법적 구속력은 없다. 국가인권위원회법에는, 권고를 받은 기관은 권고 조항을 이행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검토를 계속 고집해도 인권위가 가할 수 있는 제재 수단은 별로 없다. 이행 여부를 모니터링하는 것뿐이다.

앞서 말한 관계자는 “2012년 3월부터 인권위 법이 바뀌어 그 전에는 회신 기한이 없었는데 3월부터는 90일 이내에 회신하도록 돼 있다. 그렇다 해도 강제 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90일을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번 정보공개 청구 자료 중에는 2011년 6월에 의결된 권고가 여전히 검토 중인 경우도 있었다. 인권위 권고를 수용하지 않는 것이 부담스러워 질질 끄는 수법으로 제도를 악용하고 있는 셈이다.

‘부당한 강박 및 가혹 행위에 의한 인권 침해(2012년 5월25일-검토 중)’ ‘대리 작성된 동의서에 의한 정신병원 입원(2012년 7월24일-검토 중)’ ‘퇴원 심사 청구서 발송 지연 등에 의한 인권 침해(2012년 11월8일-검토 중)’.

70건의 ‘검토 중’이라는 답변에서 단연 눈에 띄는 부분은 병원이다. 병원에 해당하는 곳이 33건으로 전체의 47%에 달한다. 그리고 이들 중 대부분이 부당 입원이나 강제 입원, 혹은 퇴원 심사 과정의 인권 침해를 고발하고 있다. ‘검토 중’이라는 답변으로 방관하고 있는 곳이 대부분 정신병원이라는 얘기다.

경남에 사는 진 아무개씨(35)는 이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동네 사람들의 수군거림 때문이다. 그들은 진씨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저 사람 정신병원 갔다 왔대.”

진씨는 ‘오해’라고 표현했다. 2011년 말 그는 회사에서 해고당했다. 불면증이 생겼고 치료도 받았다. 불면증을 이기기 위해 술을 먹고 귀가하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 술을 마시는 횟수가 많아지면서 주사도 함께 늘어났다. 때로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부쉈다. 주사로 생긴 부모와의 ‘오해’ 탓이다.

2012년 4월 어느 날, 불면증 약을 받기 위해 나서던 그를 덩치 좋은 남자 세 명이 집 안에 들어와 끌고 가려고 했다. 저항했지만 장정들의 힘을 이길 수 없었다. 그렇게 그는 인근 정신병원으로 끌려갔다. “병원에 도착하고 저항했더니 나를 보호실에 격리했고 다리와 팔을 묶었다. 기저귀도 A채웠다.”

의사는 반항하는 진씨에게 “이런 식으로 하면 당신은 평생 있어야 한다”고 넌지시 말했다고 했다. 진씨는 “약 이름을 알려달라고 해도 알려주지 않고, 몸에도 맞지 않는 주사약을 맞아야 했다. 혈압이 오르는 등 이상 증세가 있어서 주치의를 바꿔달라고 이야기했지만 병원 규정상 바꿔줄 수 없다는 말만 들었다”고 말했다.

진씨는 퇴원 심사 청구서를 신청했지만 병원측이 늑장을 부리고 청구서를 제대로 전달해주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겨우 받은 심사 결과도 ‘계속 입원’이었다. 납득할 수 없었던 진씨는 “도지사에게 직접 퇴원 심사 청구서를 보냈다. 그랬더니 병원의 대표이사가 직접 찾아왔다. 그렇게 대표이사와 둘이서 일종의 ‘합의’를 봐서 퇴원했다”고 말했다.

그는 인권위에 두 건의 진정을 했다. 하나는 부당한 강제 입원 절차에 관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퇴원 심사 청구서 발송 지연에 따른 부분이었다. 인권위는 두 경우 모두 유사 사례가 발생하지 않도록 직원 교육을 실시하라고 권고를 내렸다.

정신병원 입원 환자의 대부분은 비(非)자발적 환자들이다. 2010년 보건복지부의 중앙정신보건사업지원단이 펴낸 보고서를 보면 국내 정신병원 환자들 중 자발적 입원은 20.3%에 불과했다. 10명 가운데 8명은 다른 사람이 요청해 입원한 경우다. 그렇다 보니 진씨처럼 입원과 퇴원에서 가장 많은 문제가 생긴다. 진씨가 낸 두 건의 진정이 대표적인 사례다.

2012년 11월 진씨가 입원한 경남의 ○○병원에 대해 인권위는 권고를 의결했다. 인권위는 병원장에게 “환자의 퇴원 심사 청구서 발송이 지연되지 않도록 소속 직원들에 대해 교육을 실시할 것”을 권고했다. 병원측은 이후 어떻게 조치했을까. “행정 파트가 해결했을 텐데 잘 모르겠다” “원무과에 알아봐야 한다”며 답변을 피했다. 인권위 자료에 따르면 6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이 병원의 답변은 ‘검토 중’이다.

정신질환자 입원 일수, 미국 8일·한국 233일

정신병원의 경우 구금 시설과 유사한 형태여서, 입원하고 있는 당사자가 인권 침해 상황에 지속적으로 노출되게 된다. ‘정신병원 피해자 인권 찾기 모임’(이하 정피모)에는 이런 피해 사례를 호소하는 사람들의 상담이 많다. 정백향 정피모 대표는 “정신병원 폐쇄병동 입원 치료는 치료의 절차이지만 그와 동시에 당사자 자유의사에 반해 신체를 감금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행동·정신 등 여러 가지를 강제하는 부분이 많을 수밖에 없다. 병원측은 강제성 없는 인권위의 권고에 대해 손실(경제적 측면, 손쉬운 환자 관리 등)을 감수하면서까지 수용할 생각이 없기에 무시하는 사례가 더 많을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정신병원 관계자는 “입원비에 정부에서 지원되는 부분이 있어서 환자 수가 중요하다. 문제가 있는 병원의 경우 병상 수익 때문에 환자를 퇴원시키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전했다.

2011년 기준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전국 1273곳의 정신의료기관에 입원한 환자는 6만7223명에 달한다. 이 중 자발적 의사가 아닌 보호 의무자 가족에 의해 입원한 환자는 69.4%인 4만6624명이다. 10명 중 7명은 타의로 입원한 셈이다.

2008년 기준 국내 정신질환자의 평균 입원 일수는 233일로 나타났는데 미국(8일), 독일(25.3일), 호주(52.8일) 등 다른 국가와 비교하면 엄청나게 길다. 물론 정신병원 강제 입원 제도는 치료를 거부하는 환자에게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순기능도 보여주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멀쩡한 사람도 정신병자가 되어 구금될 수 있는 위험도 함께 가지고 있다.

취재 중에 만난 피해자들 중에서도 드라마에나 있을 법한 일이 없지 않았다. 전남에 사는 서 아무개씨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재산 문제로 아버지와 다투다 2011년 7월 도복 끈으로 결박된 채 정신병원에 강제로 구금되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나빠진 서씨는 부친과 소송을 벌이던 중에 소송 당사자에 의해 정신병원에 갇힌 사례다.

다른 피해자는 “(그곳에 들어가 보니) 가족에 의해 정신병원에 갇힌 한 아버지가 자신은 미치지 않았다며 매일 창밖으로 종이비행기를 날렸다는 이야기가 이해가 되더라”고 말했다. 억울한 감금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 요즘 현실이다.

※ 이 기사는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의 정보공개 청구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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