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락 비밀 방북’ 기사 쓰려다 남산 끌려가 고문당해
  • 김현일 대기자 ()
  • 승인 2013.06.04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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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기 서울미디어그룹 회장이 쓴 <뛰며 넘어지며> 속 비사

심상기 서울미디어그룹 회장이 <뛰며 넘어지며>라는 회고록을 냈다. 격동의 세월 속에 50년 동안 언론인 외길을 걸어온 그의 치열한 삶이 오롯이 담겼다. 기자로서 뚜렷이 지켜봤던 역사의 현장과 현대사의 단면이 생생히 기록돼 있다. 심 회장은 현역 기자 시절 취재수첩에 깨알같이 적어놓은 글들을 한편의 역사로 되살려냈다. ‘올챙이 기자 50년 표류기’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에는 흥미진진한 비사(秘史)가 드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그간 가려졌던 중요한 사건의 이면들을 소개한다.

ⓒ 시사저널 이종현
■ ‘3선 개헌’ 파동의 목격자

우리 현대 정치사에서 어두운 기록의 하나가 3선 개헌 파동이다. 3선 개헌 작업은 1969년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해 1월 공화당 윤치영 의장서리가 연두 기자회견에서 헌법 개정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나선 것이 신호탄이었다.

개헌안 처리 공방이 벌어진 무대는 국회 본회의장이었다. 지금은 서울시 의회로 사용되는 태평로 건물이 그때 국회 청사다. 그러나 진짜 상황이 벌어진 곳은 국회 제3별관이었다. 지금의 광화문 서울파이낸스센터 빌딩 자리다. 공화당 의원들이 야당 의원들이 농성하던 본회의장을 피해 길 건너편 제3별관에 모여 눈 깜빡할 사이에 안건을 변칙 처리하고 해산한 것이다. 그야말로 날치기 처리였다. 일요일이던 그해 9월14일 새벽에 벌어진 어두운 헌정사의 한 페이지였다. 공화당은 3선 개헌안을 이런 식으로 처리하면서 몇 명의 기자들만을 불러 표결 과정을 지켜보도록 했다. 구차하게도 현장 증인용이었다.

■ 또 다른 민심 거역…국가 보위 특별조치법

1971년 12월 비상사태 선포 후 국가 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통과될 때의 얘기다. 이번에도 공화당이 야당을 배제한 채 안건을 처리하는, 민심을 거역하는 역사의 한 토막을 증인으로 지켜보게 됐다. 공화당이 추진하던 국가 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은 대통령에게 비상대권을 부여한다는 것이 요점이다. 언론·출판·집회 및 단체교섭을 규제하는 특별조치와 국가동원령을 내릴 수 있는 근거를 담고 있었다.

공화당이 제출한 법안은 이미 법사위에 회부되어 있었다. 신민당이 극렬히 반대하고 있었으나 백두진 국회의장이 의장 직권으로 올린 것이었다. 신민당의 김홍일 당수를 비롯해 소속 의원들은 본회의장과 법사위 회의실 그리고 제3별관을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가 있었다. 앞서 3선 개헌안 처리 때 모습과 비슷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공화당 신형식 대변인이 “가볍게 술이나 한잔하자”며 집으로 찾아왔다. 퇴근하고 집에서 쉬던 밤늦은 시간이었다. 내 집이 한강 넘어 사당동에 있을 때였다. (중략) 신 대변인은 나를 워커힐로 안내했다. 간단히 한잔하자던 얘기와는 달리 의외의 장소로 안내한 것이었다. (중략) 그 자리에서 비로소 국가 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 처리 방향 얘기를 들었다.

출입기자들이 전부 다 현장을 지켜볼 수 없으니 몇 명이서라도 현장 취재를 하라는 주문이었다. 취재 겸 현장 증인이었다. 출입기자 모두에게 사전에 이런 방침을 전달한다면 단독 처리 정보가 새나감으로써 계획이 틀어지기 십상이었으니 그랬을 것이다. 법안 처리 거사 장소는 외무위가 있던 제4별관이라 했다.

위스키를 한 잔씩 들이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형식 대변인을 따라 신라호텔로 안내되었다. 그날 표결에 참가하는 공화당 의원들이 신라호텔 영빈관에 집결하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밤중 늦은 시간인데도 미리 도착한 의원들이 끼리끼리 모여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의원들이 모두 집결하고 준비가 끝나 드디어 버스의 대열이 출발하려는 즈음이었다. 동아일보 안성열 기자와 신아일보 이긍규 기자가 허겁지겁 신라호텔에 들어섰다. 어떻게 얘기를 전해 들었는지는 몰라도 장경순 국회 부의장의 승용차에 올라 함께 도착한 것이었다.

그러나 합류는 허락되지 않았다. 오히려 영빈관 입구에서 대기 중이던 경찰 병력에 의해 끌려 내려져 주차장 대기실에 갇혀버렸다. 현장 참관조차도 사전 각본에 따라 정해진 인원만 허락됐다. 그렇다고 이들 두 명의 기자를 그냥 내버려둔다면 금방 비밀이 새나갈 것이었기에 잠시나마 감금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 버젓이 벌어졌다. 그것이 우리 정치의 한계였고 수준이었다.

신라호텔을 출발한 의원들의 버스는 경찰의 선도를 받으며 반도호텔 앞길을 거쳐 순식간에 국회 별관에 도착했다. 의원들은 미리 지시를 받은 대로 3층 회의장으로 줄지어 올라갔고, 특별조치법은 눈 깜빡할 사이에 의결되었다. 이미 자정을 훨씬 넘겨 그해 12월27일 새벽 3시쯤 벌어진 역사의 한 장면이다.

■ 김대중 납치 사건

1973년 8월13일 밤 10시20분경. 함께 야근하던 허준 기자가 소리쳤다. “김대중씨가 (동교동) 자택에 와 있대요.” 정치부 차장이던 나에게 조남조 기자(훗날 민정당 국회의원)가 보고했다. 동교동에 급보를 받은 기자 30여 명이 모여들었다. 김씨는 울먹이면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기분이다. 그들은 나를 바다에 던져 죽이려고 했다. 그때 비행기 소리가 났다. 배와 비행기 간 교신이 이뤄졌는지는 모르나 바다에 던져지지는 않았다’고 했다. 조 기자는 “김씨가 수척하고 매우 피로해 보였으나 정신은 또렷했고 말도 또박또박 이어갔다”고 전했다. 당시 TBC 사회부 소속이던 최철주 기자(전 중앙일보 편집국장)는 “김대중씨의 인터뷰 내용을 녹음, 생방송으로 내보냈다. 하지만 생방송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엄혹한 시대에 목소리를 내보냈으니…. 수사기관이 기자를 불러 경위를 조사했다”고 회고했다.

그때는 그랬다. 이 사건이 이후락(HR) 중앙정보부장 주도로 꾸며진 것은 밝혀졌으나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 여부, 살해 계획 여부 등은 주장들이 얽혀 지금까지 미루어지고 있다.

■이후락의 비밀 방북과 고문

1972년 5월 중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북한을 비밀리에 방문했다는 정보를 들었다. 당시로서는 획기적 사건이었다. 7·4 남북공동성명이라는 이름으로 공식 발표하기 50여 일 전쯤이었다. 이럴 때 기사화를 시도했으니 정보부가 펄쩍 뛰었다. 정보부 언론과장이 찾아왔다. 고위 간부가 만나잔다고 했다. 그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정부종합청사 19층에 자리한 정보부 별실이었다(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정보부는 종합청사 맨 꼭대기 층에 앉아 행정부를 호령했다). 김동근 보안차장보는 HR의 방북 사실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다그쳤지만 함구했다. 그는 나를 세종호텔 13층 정보부 조사실로 끌고 가도록 했다.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수사관 2명의 주먹과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밤 12시가 지나자 남산 청사로 끌고 갔다. 이미 고막이 터지고 무릎을 못 쓸 정도로 얻어맞은 상태였다. 다음 날 남산측과 타협이 이뤄졌다. 정보부 담당자가 자기네도 결과를 보고해야 하니 ‘국회 주변에서 그런 얘기를 들은 일이 있던 것으로 하자. 이름은 굳이 밝히지 않아도 좋다’고 제의해 타협이 됐다. 지금은 상상이 안 되지만 언론인조차 멋대로 끌어다 개 패듯 하던 시절이 이 땅에 있었다.

심상기 서울미디어그룹 회장이 펴낸 회고록 . ⓒ 시사저널 최준필
■ 보안사에 연행된 ‘욕망의 거리’

편집국장으로서의 내 기억은 고뇌와 번민의 연속이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떤 식으로든 응징 수단이 동원되곤 했다. 그것이 당시 우리 언론계가 겪어야 했던 수모다.

한수산씨가 집필하던 연재소설 ‘욕망의 거리’로 곤욕을 치렀던 것이 그런 사례다. 소설에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이 포함됐다는 이유로 편집국 간부와 기자들이 보안사에 무더기로 끌려가 조사를 받고, 고문을 받았던 것이다. 1981년 5월의 일이다.

손기상 편집국장 대리 겸 문화부장과 정규웅 편집위원, 권영빈 출판부장, 이근성·허술 출판부 기자가 갑자기 들이닥친 세단에 태워져 ‘빙고 하우스’라 불리던 서울 동빙고동의 보안사 조사실로 끌려갔다. 끌려간 기자들이 당한 고문은 암흑시대의 무법 살상 행위와 다를 바 없었다. 아마도 간첩들을 잡으면 이 정도였으리라고 짐작됐다.

“5월30일(토), 10시30분 이른바 ‘빙고 하우스’에 도착. 곧 독방에 처넣어져 알몸으로 벗긴 채 검은 제복을 입은 5, 6명의 젊은이들로부터 몽둥이 구둣발질로 무차별 구타당하다. 약 한 시간 동안 초죽음이 되도록 폭행당하다가 고문실로 끌려감. 양 장단지 사이에 각목을 집어넣고 무릎을 짓이기는 고문, 의자에 앉혀 사지를 꽁꽁 묶고 얼굴에 타월을 덮어씌운 뒤 고춧가루 물을 쏟아붓는 고문, 전기가 통하는 의자에 앉혀놓고 열 손가락에 전깃줄을 연결시킨 뒤 스위치를 올렸다 내렸다 하는 고문, 두 팔을 허공에 있는 밧줄에 동여매고 몸이 뜨게 한 뒤 좌우로 흔들어 각목 세례를 퍼붓는 고문, 그 밖에도 엘리베이터 고문, 손가락에 연필 끼우고 고문… 등 있을 수 있는 모든 고문을 당하다. (중략)

5월31일, 고문자 신문자가 오다가다 방에 들어와 쓴 글을 읽어보고 ‘다시 쓰라’고 쥐어박기.

6월1일, 오후 3시쯤 ‘높은 분’의 부름을 받다. 도저히 걸을 수 없어 양쪽에서 부축을 받아 어기적거리며 응접실로 가다. 한바탕 꾸짖음을 듣고 이근성 기자의 등에 업혀 ‘죽음의 집’을 빠져나오다.” -정규웅

작가 한수산이 사건 6년 후인 1987년 대통령 선거 막바지에 한줌 글을 내놓았다.

“거기서의 며칠 몇 밤을 이제 와서 떠올릴 분노조차 나는 가지고 있지 않다. 도구만은 기억한다. 찢기고 부서져가는 내 알몸 위로 쏟아지던 몽둥이, 물, 전기, 주먹과 발길, 매달림….”

■ 안기부장이 직접 나서 저지한 ‘제3공화국’

1982년 1월부터 시작된 중앙일보의 야심찬 탐사기획이 바로 ‘제3공화국’ 시리즈였다. 주 6회 전면 연재가 시작되자 기대했던 대로 폭발적인 반응이 일어났다. 국내에서는 물론 미국 등 해외 교포 독자들로부터도 뜨거운 호응의 전화와 편지가 쇄도했다. 결국에는 다른 경쟁지들도 차례차례 뛰어들게 되었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한국일보 등이 나란히 제3공화국과 관련된 비화 시리즈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5·16 이후 베일에 가려져 있던 박정희 시대의 어두웠던 뒷면이 일제히 들춰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안전기획부가 나섰다. 어느 날 안기부의 유학성 부장이 이건희 삼성 부회장과 이종기 사장 그리고 편집국장인 나를 남산 오찬에 초대했다. “제3공화국의 정치 문제와 관련한 취재 경쟁이 너무 치열해 국가 기관의 업무에 지장이 많다”며 연재 중단을 요구했다. 다른 신문사들에 대해서도 연재를 중단토록 종용하겠다는 다짐도 덧붙여졌다. (중략) 거부했음에도 안기부의 중단 압력은 계속 이어졌다. 결국 이 시리즈는 34회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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